임용고시/임용고시 기타

수험 윤리 지문 모음 (6) 서양 현대

neon_eidos 2023. 3. 7. 00:43

천재교과서(변순용 외) 인용문("-" 없는 단락들은 본문)
수능특강 자료플러스
임용 기출 제시문 (김병찬 기출집, 도교사 serenity 선생님 타이핑 자료 활용)
 

생철학: 쇼펜하우어, 니체

[2005] 19세기 말에 전개된 사상은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에 반대하고 인간의 현실적 삶 자체를 중시하였다. 쇼펜하우어 (A . S chopenhauer)는 모든 동물, 심지어 무생물에서도 나타나는 활동적인 ㉮충동(-->답: 삶에의 의지)에 주목하였다. 그는 자연계를 끊임없는 충동으로 말미암아 갈등과 파괴가 불가피한 투쟁의 장으로 묘사하였다. 이 공격적 충동으로부터 도피하는 통로 중의 하나가 도덕이었다. 반면에, 니체(W . F . Niet zsche)에게 도덕은 결코 공격적 충동의 피신처가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애초부터 선과 악의 양면적 역사가 존재하며, 이것은 ㉯2가지 도덕(-->답: 주인도덕, 노예도덕)으로 나타난다. 

[2015]쇼펜하우어의 ‘(의지)’은/는 살고자 하는 본능과 충동, 욕망이다.
 

실존주의

[사르트르]

“한 자루의 종이칼과 같은 사물은 그것을 만드는 제작자가 설정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며, 한정된 쓰임새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종이칼과 같은 사물의 본질은 제작자의 구상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사물과 달리 미리 결정된 보편 개념으로서의 인간성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2021] 갑: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달리 말하면 (ㄱ)주체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다. 이는 곧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삶의 가치란 개인이 삶에 부여한 의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인간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며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에 있다. 인간의 우주, 즉 인간 주체성의 우주 이상의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 속에 얽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이 우주 속에 처해 있다는 의미로서 주체성과의 관계, 그것을 우리는 ‘실존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2013] 갑 :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먼저 있어 세상에 나타나고, 그 다음에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주의자가 생각하는 사람이란 처음 에는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되어 스스로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2017B] 갑 : 인간은 목적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동시에 그자체로서 목적이 아닌 결코 누군가의 한낱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격성은 우리 자신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제 당연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법칙의 주체요,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의 주체 이며, 이 주체를 위하여 그리고 이 주체와 일치해서만 도대체 무엇인가가 신성하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인격성의 이념은 우리의 행태가 우리 본성의 숭고함에 어울리지 않는 결함이 있음을 주의시키고, 동시에 우리의 본성이 숭고함을 눈앞에 제시 한다. 이러한 인격성의 이념은 가장 평범한 인간 이성에서도 자연스레 그리고 쉽게 눈에 띈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1편 1권 3장)

을 : 신이 없다면 적어도 (본질)보다 앞선 존재, 또는 어떠한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전에 존재하는 것이 있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먼저 있어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는 그 다음에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성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을 상상할 신이 없기 때문이다. … (중략) …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자가 생각하는 인간은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비로소 그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그 스스로 되고자 하는 존재를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구상할 신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구상하는 그 무엇이며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리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키르케고르]

[2021] 을: 진리는 (ㄱ)주체성이다. ...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특별한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상의 그 어떤 육체적인 질병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죽음은 질병의 최후이긴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결코 종국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최후가 죽음이고 또한 죽음이 종국적인 것과 같은 그러한 병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병이야말로 분명하게 말해 (절망)이다. 이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은 신 앞에 홀로 서서 그토록 큰 노력으로 그토록 큰 책임을 지면서 특정한 개별자가 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빈칸+(ㄱ)(주체성)에 대한 갑, 을의 입장의 차이점을 ‘신’, ‘자기 자신’을 활용하여 2가지 서술)

감히 전체적으로 자신이 되고자 한다는 것, 한 개별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다는 것, 신 앞에서 오직 혼자 된다는 것, 이는 막대한 노력과 막대한 책임성 앞에 선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절망은 주체성 있는 단독의 인간을 규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이다. 물론 절망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절망을 생각하는 일은 가능하다. 절망은 비현실적인 개념이라서, 절망하는 단독자가 존재한다면 그 절망하는 사람이 비로소 현실적일 것이라고 사유를 통해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절망은 단독자에게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인간 각자를 단독자나 단독의 죄인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되고, 천지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절망의 가능성을 한곳에 집중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단독자 각자를 향해 “너는 믿을지어다. 즉 너는 절망하든지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덧붙일 말도 없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하이데거]

[2013] 을 : 불안 속에 잠재해 있는 요인을 형식적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불안은 심경으로서 세계-내-존재의 한 존재 양식이다. 둘째로 불안의 대상은 세계 속으로 던져진 세계-내-존재이다. 셋째로 불안의 이유는 세계-내-존재의 가능성 때문이다. 따라서 불안의 완전한 현상은 현존재를 사실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세계-내-존재로서 드러낸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6장)

[2020] 갑: “(죽음)은 현존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을: 그 말은 (죽음)을 통해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직면하게 됨을 뜻합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현존재가 이제까지 집착해 왔던 모든 일상적인 가능성의 허망함을 드러내면서 그것들을 무(無)로 떨어뜨리는 극단적인 가능성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간으성은 다른 모든 가능성에게 위계와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실존의 전체성과 통일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현존재의 최고 심급입니다.”

갑: 그렇군요. 그러면 “(불안)은 세계의 무의미성을 열어 보인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세요.

을: 그 말은 (불안)이라는 기분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안주해 온 일상적인 세계는 의미를 상실하게 됨을 뜻합니다. (불안)은 나의 심연으로부터 치밀어 올라와 나를 송두리째 사로잡으면서 ‘내가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이렇게 존재한다.’라는 적나라한 사실 앞에 세웁니다. 나는 (불안)이라는 기분 안에서 그 어떠한 일상적인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고 다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나 자신의 유일무이한 존재와 만나게 됩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편 6장, 2편 1장)
 

현상학적 윤리학: 셸러

[2004] 
경수 : 인간은 고통, 슬픔보다는 쾌락, 기쁨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므로 인간 각자는 자신에게 쾌락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행위를 해야 한다.
지연 : 가치는 사유작용이 아닌 가치 감정이라는 지향적 작용에 의해 파악되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다) 위계적 서열을 지닌다.(-->(다)(위계적 서열을 지닌다)를 근거로 경수를 비판하시오) (셸러, 윤리학에 있어서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 윤리학)
예시답안: 이념적 객체인 가치들은 감각적 가치, 생명 가치, 정신적 가치, 신성한 가치 순으로 위계 서열화되어 있다. 인간은 이처럼 위계 서열화되어 있는 가치들 중에서 더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선천적인 도덕적 성향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가장 낮은 가치인 쾌락, 기쁨과 같은 감각적 가치를 선호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경향이 아니다. 그리고 네 종류의 가치들 중에서 선천적인 도덕적 성향에 따라 인격이 보다 높은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이고, 보다 낮은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가치의 위계 서열에서 가장 낮은 감각적 가치인 쾌락의 실현을 보편적인 의무로 간주하는 경수의 입장은 모든 사람에게 악을 행할 것을 요구하는 비도덕적인 입장이다.
 
[2009] 다음에 설명된 서양 윤리 사상가의 주장과 거리가 먼 것은?
● 현상학적 방법을 가치 영역에 적용하였다.
● 가치와 가치를 평가하는 주관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 가치를 감각적, 생명적, 정신적, 종교적 가치로 구분하였다.
① 더 오래 지속될수록 높은 가치다.
② 가치의 서열은 가치 담지자에 따라 변한다. (x - 가치의 서열은 자립적이고 선천적이며 객관적인 것으로 가치 담지자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③ 가치는 순수한 정서의 지향 활동에 의해 파악된다.
④ 행위를 통해 실현된 가치가 그 행위의 도덕성을 결정한다.
⑤ 관련된 가치들 중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가 도덕적이다.
 
[2012] (갑) 의지를 단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일컬을 수 있기 위해서는, 법칙의 표상 이, 그로부터 기대되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의지를 규정해야만 한다. 나는 의지로부터 어떤 법칙을 준수할 때 의지에서 생길 수도 있는 모든 충동을 빼앗았으므로, 남는 것은 오로지 행위 일반의 보편적 합법칙성뿐이고, 이것만이 의지의 원리로 쓰여야 할 것이다. (칸트 정초)
(을) 가치질은 사상(事象)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푸른 공에 붉은 색을 칠하더라도 푸른색이 붉은 것으로 되지 않는 것과 같이, 가치와 가치의 질서는 그 담지자의 가치가 변하더라도 이에 의해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친구가 잘못한 것으로 판명되고, 그가 나를 배신했다고 해서 이에 의해 우정의 가치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을의 입장에서 갑을 비판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 ② 실질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형식주의 윤리학을 추구한다.)
 

실용주의

[제임스]
“진리의 소유는 그 자체가 목표이기는커녕 다른 필수적인 만족을 위한 예비 수단일 뿐이다. 만일 내가 숲에서 길을 잃고 굶주리다가 소가 다니는 길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길 끝에 있는 집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해서 그 길을 따라간다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생각이 참인 이유는 그 대상인 집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관념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그 대상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하다는 데에서 나온다. ...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리에 대해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유용하다.' 아니면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제임스, 실용주의)
[2022] 갑: 우리와 무관한 세계를 말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진리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새로운 진리는 새로운 경험과 낡은 진리가 결합되어 수정된다. 세계에 대한 진리는 (성장)한다. 
새 진리는 낡은 진리에 의존하면서도 새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 새 관념은 진리의 계열 속에 끼어들어 형성된다. 어떤 것이 참되다고 하는 것은 낡은 것과 새것을 맺어준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려는 (ㄴ. 지향성이나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런 진리관에서는 진리를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ㄷ.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임스, 프래그머티즘)
(갑이 ㄷ를 주장하는 이유를 ㄴ를 이용하여 서술 예시답안: 갑에 의하면, 진리란 현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경향성이나 욕구를 효과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수단이고, 그러한 경향성이나 욕구는 개인들이 경험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와 관련하여 상이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평가는 상이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평가는 상이한 경향성이나 욕구를 지닌 개인들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듀이]
“정적인 성과나 결과보다 성장, 개선, 진보의 과정이 의미 있다. 최종적으로 고정된 목적으로서의 건강이 아니라 필요한 건강의 개선의 목적이자 선이다. 목적은 더 이상 도달해야 할 종착점이나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상황을 변화시키는 능동적 과정이다. 건강, 부, 학식과 마찬가지로 정직, 근면, 정의도 마치 그것들이 획득해야 할 고정된 목표를 표현하는 선은 아니다. 성장 자체는 도덕의 유일한 목적이다.”(듀이, 철학의 재구성)
[2022] 을: 인간은 상황 속에서 상황과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평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평형이 깨지기도 한다. 평형이 깨지면, 인간은 당혹감과 불안을 느끼고, 이를 (문제 상황)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탐구는 (문제 상황)과 함께 시작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자동차를 의식하며, 고장의 원인을 생각하게 된다. 탐구의 목적은 문제 해결에 있으며, 탐구의 결론은 관념이나 지식이다. 따라서 관념이나 지식은 (ㅁ. 문제 해결)의 도구이다. (듀이, 논리학: 탐구의 이론)
(ㅁ의 결과를 을의 진리관에 근거하여 서술 예시답안: 을에 의하면, 진리란 경험 과정에서 인간이 직면하는 실제적인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이므로, 그것은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구 활동을 통해 생성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즉, 기존에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상황에 처하여 탐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기존의 지식은 수정, 확장, 재조직되어 세계에서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는 데 보다 적합한 새로운 지식이 수립된다.)
[2018B] ● 나쁜 사람이란, 지금까지 아무리 선했다 하더라도 현재 타락하기 시작하고 점점 덜 선해지기 시작하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란, 지금까지 아무리 도덕적으로 무가치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현재 점점 더 선해지기 시작하는 사람 이다. … (중략) … 정적인 성과나 결과보다는 (성장), 개선, 진보의 과정이 더 의미 있는 것이다. 목적은 더 이상 도달 해야 할 종착점이나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성장) 그 자체가 유일한 도덕적 ‘목적’이다.
● 이와 관련하여 (㉡ 악의 문제에 대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논의)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먼저, 비관주의는 우리를 무력 화하는 신조이다. 왜냐하면 ‘비관주의’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악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 (중략) … 그리고 악의 문제에 대한 낙관주의 역시 우리에게 악몽이기는 마찬가지 이다. 왜냐하면 ‘낙관주의’는 이 세계가 모든 세계 가운데 이미 가능한 최상의 세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듀이, 철학의 재건) (빈칸+ㄴ에 대한 이 사상가의 비판 서술)
[2013?2014A?] 사유는 사물에 내재하는 정적이고 영원한 성질과 같은 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진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삶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다.  치는 좋아함(liking), 높이 평가함(prizing) 등과 연관되며, 고정불변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운동 방향이 (성장)을/를 지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듀이, 철학의 재건) 
[2011] 유용성으로서의 '진리'란 관념과 이론이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재조직화에 기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은 행위의 일람표도 아니고 약국의 처방전이나 요리책의 요리법처럼 적용해야 할 일련의 규칙도 아니다. 도덕에서의 필요는 탐구와 고안에 관한 특정한 탐구 방법에 대한 것이다. (듀이, 철학의 재건)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그들이 어떤 고정된 결과에 도달했는지 아니면 미치지 못했는지에 따라 파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악한 사람이란, 그가 지금까지 아무리 선했다 하더라도 현재 타락하기 시작하고 선을 상실해 가고 있는 사람이다. 선한 사람이란, 그가 지금까지 아무리 도덕적으로 무가치했었다 하더라도 현재 더 선해지기 시작하는 사람이다. (듀이, 철학의 재구성)
 

메타윤리학

[비인지주의]
[2020] ‘지구는 자전한다.’라는 문장은 사실 판단을 나타낸다. 사실 판단은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는 내용을 지닌 (명제)를 나타낸다. ‘사람을 현혹하는 행위는 그르다.’라는 문장은 도덕 판단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도덕 판단이 나타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크게 두 입장으로 나뉜다. 우선 도덕 판단이 나타내는 것과 사실 판단이 나타내는 것이 서로 같은 종류라는 입장에는 도덕 실재론, 오류 이론 등이 있다. 한편 (비인지주의) 입장에 따르면 도덕 판단이 나타내는 것은 (명제)와 대조되는 승인, 비난 드으이 정서나 감정의 상태이다. 이와 같은 (비인지주의) 입장에는 정서주의, 규정주의 등이 있다.
 
[비자연주의]
[2021] (메타윤리학)은 윤리학의 한 분야로서, 윤리 일반 개념 등을 그 대상으로 삼아 ‘선한’, ‘올바른’ 등의 의미를 탐구한다. 이 윤리학 분야는 올바른 행위, 선한 행위 등의 판단 기준을 탐구하는 윤리학 분야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메타윤리학)의 한 입장인 비자연주의 이론에 따르면, 선함, 올바름 등의 도덕적 성질은 고유한 종류이어서 쾌락의 증대 등 계산 가능한 (자연적) 성질로 환원될 수 없다. 열린 질문 논증을 제시한 현대 비자연주의 이론가에 따르면, ‘선한’, ‘올바른’ 등의 표현을 ‘쾌락을 증대하는’ 등의 ‘자연적’ 표현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예외 없이 모두 오류를 범한다.
 
[이모티비즘]
[2005] "내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곤경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의 철저한 희생을 선택하는 것은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흄(D. Hume)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기초하는 도덕이론)을 수립하였고, 공감을 '도덕적 특질의 주요 원천'으로 삼았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견해는 이모티비스트 (emotiv ist)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특히 스티븐슨 (C. L. Stevenson)은 윤리적 불일치를 사실에 대한 불일치에서 나오는 소견 혹은 믿음(belief)의 불일치와 태도(attitude)의 불일치로 분류하면서, 태도의 불일치를 한층 더 강조 하였다. 태도란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향 또는 어떤 방식의 행동 경향을 말한다. 따라서 태도의 불일치는 소견의 불일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취향 혹은 기호의 차이에서 나오며, 윤리적 불일치는 대개 이러한 종류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도덕가(moralist)들에게는 태도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견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법과는 (㉯다른 차원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가를 따를 때 덕과 악덕은 무엇ㅇ니지 서술, 나의 명칭과 그 특징 서술)
(예시답안: 덕이란 어떤 행위나 성품이 불러일으키는 시인의 감정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악덕이란 어떤 행위나 성품이 야기하는 부인의 감정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나)의 명칭은 설득이다. 설득이란 윤리학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방법으로서, 상대편 소견의 변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가 감정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력(언어의 역동적 용법)을 통해 상대편의 태도를 변경하고자 하는 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