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임용고시 기타

수험 윤리 지문 모음 (3) 서양 중세

neon_eidos 2023. 3. 3. 22:05

천재교과서(변순용 외) 인용문("-" 없는 단락들은 본문)

수능특강 자료플러스

수능 및 모평 기출 제시문 (마더텅 활용)

임용 기출 제시문 (김병찬 기출집, 도교사 serenity 선생님 타이핑 자료 활용)

 

아우구스티누스

“나는 플라톤 학파의 책을 읽고 무형의 진리를 탐구하였고, 신이 만든 눈에 보이는 만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영혼의 어둠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을 가까스로 느끼고 알게 되었다. 신이 참으로 실재하며 항상 동일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플라톤에 대한 독서가 진리를 찾도록 나를 고무시켰을 때, 천상의 나라에 계신 당신에 관한 비가시적 사실들을 나는 보았습니다. 당신은 결코 어떤 변화도 겪지 않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자신과 동일한 자로서 존재합니다. 

신의 존재는 진리의 존재로부터 증명됩니다. 악은 의지의 산물이지만 덕은 신의 은총의 산물이며, 신의 은총이 있어야 완전한 행복이 가능합니다. 또한 두 가지 사랑이 있음으로써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있게 됩니다. 

 

[최고선은 신]

신은 인간의 최고선이고, 최고선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삶이다. 따라서 좋은 삶은 온 가슴과 온 영혼과 온 정신으로 신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신은 모든 선한 것의 이데아이자, 인간의 최고선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이 따라 나온다. 즉, 최고선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삶이기 때문에, 좋은 삶은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정신으로 신을 사랑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은 이성적 인식의 대상을 넘어 실존적으로 만나야 할 인격적 존재입니다. 현세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므로 어느 누구도 온전히 신국의 구성원일 수만은 없습니다. 

[2018A] 최고선은 신이다. 신은 변함없는 선이며 영원하고 불멸하는 선이다. 선한 신이 창조한 세계는 선하다. 따라서 악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선이 결여된 상태이다. 선은 악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하지만, 악은 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중략) … 용기, 지혜, 절제, 정의와 같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덕은 최고의 덕인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덕의 다른 측면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에 대한 (사랑)을/를 통해 신에 도달하게 되고 결국 행복에 이르게 된다. (고백론)

“행복이 더는 선할 수 없는, 가장 선한 것으로 구성된다면 우리는 이를 최고선이라고 부르는데, 최고선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지닌 모든 선한 것들의 완전함, 그리고 우리의 완전한 선은 바로 신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들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추구해야만 할 것이며, 이것에 맞추어 우리의 모든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한다.”(마니교와 도나투스파에 대한 반박)

 

[원죄, 자유의지]

행복은 오직 신앙으로 가능하다. 행복의 필수 조건은 영원한 생명인데 원죄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은 신의 은총을 믿음으로써 지상의 나라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신의 나라로 가야 한다. 

최초의 두 사람이 지은 원죄가 인간의 본성을 변하게 하였다. 그 죄의 결과로 인간 본성이 우리가 보며 느끼는 대로 부패하게 되었고, 인간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지상의 국가는 이렇게 천상의 국가에서 멀어졌다.

신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 의지를 통해 선을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선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여전히 많은 인간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신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께서 자유 의지를 주신 의미를 깊이 새기면서, 신의 은총 속에서 참된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두 나라]

[2010] 두 종류의 사랑에 의해서 두 종류의 국가가 형성된다지상의 국가는 자신을 사랑하고 심지어 신을 경멸함으로써, 천상의 국가는 신을 사랑하고 심지어 자신조차도 경멸함으로써 형성된다. 전자는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찾으며 후자는 신으로부터 영광을 찾는데, 후자가 훨씬 더 위대한 영광이라는 점은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는 바이다. (신국론 11권)

신을 열망하는 것은 최고의 행복(至福)을 바라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지상의 국가는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형성되지만, 천상의 국가는 신을 사랑함으로써 형성된다

신은 최고 존재이며, 무(無)에서 창조한 것들에게 존재를 주었다. 그런데 두 가지 사랑이 두 나라를 건설했다. 지상의 나라는 인간의 자기 사랑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은 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멸시할 때, 천상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

선한 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했다. 선하고 아름다운 신이 만든 만물은 아름답고 선하다. 신은 선으로서 선한 것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신은 세상을 신의 국가와 인간의 국가로 나누었고, 인간 삶의 모든 역사는 신의 국가의 승리로 귀결된다.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있는 것은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과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신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따른다.

세속의 나라는 신의 멸시에까지 이르는 자기애를 통해서, 천상의 나라는 신을 사랑하고 자신조차도 경멸하는 것을 통해서 생겨난다. 전자는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찾고 후자는 신으로부터 영광을 찾는데, 후자가 훨씬 더 위대한 영광이라는 점은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다. 

 

[덕]

“절제란 온전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게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는 사랑이다. 용기란 사랑해야 할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참아 내는 사랑이다. 정의는 사랑받아야 할 존재만을 사랑함으로써 바른 다스림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랑이다. 지혜란 온전한 사랑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것과 도움이 되는 것을 지혜롭게 분별해 내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을 받을 존재는 최고선이며 최고의 지혜이며 완전함 그 자체인 신뿐이다. (가톨릭교회의 도덕에 관하여)

“절제는 신을 위해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랑이며, 용기는 모든 것을 신을 위해 쉽게 인내하는 사랑이며, 정의는 오직 신만을 섬기며 이것 때문에 인간에게 복속된 다른 모든 것을 잘 다스리는 사랑이며, 지혜는 신께 도움이 되는 것과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을 잘 분간하는 사랑이다.”(아우구스티누스, 가톨릭교회의 관습과 마니교도의 관습)

 

아퀴나스

덕에는 지상의 행복을 위한 것과 천상의 행복을 위한 것이 있고, 법에는 영원법, 신법, 자연법 등이 있다. 자연법의 제1원리는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라.”는 것이다. 

신의 존재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증명됩니다. 인간의 의지는 자연법을 따를 수 있지만 거부할 수도 있으며, 자연법은 신의 명령인 영원법에 근거합니다. 또한 완전한 행복에 이르려면 종교적 덕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신학의 목적은 영원한 행복이다. 모든 실천적 학문의 목적은 그것에로 질서 지워져 있다. 따라서 신학은 모든 학문보다 우위에 있다. 철학은 계시의 진리를 명료화하기 위해 필요하며,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다. 

 

[자연법, 영원법, 실정법]

“인간에게는 모든 다른 실체들과 공유하는 성향, 즉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과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자연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고유한 자연적 성향이 있는데, 이는 이성이라는 자연적 본성을 따르는 것으로, 신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과 사회적 공동체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이다.”(신학대전)

“이성적 피조물은 영원한 이성 안에 참여한다. 이를 통해 이성적 피조물은 적절한 행동과 목적에 대한 자연적 성향을 지닌다.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영원법의 참여가 바로 자연법이다.”(신학대전)

[2013] (’자연적 성향’ 중 1가지에 근거하여 이 사상가가 갑에게 조언할 말을 쓰시오. 갑: “나는 모든 지식을 거부하고 무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거야.”) 세계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 우주의 모든 공동체가 신의 마음에 의해서 지배 된다는 점은 자명하다. 신의 마음은 단지 시간상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개념이므로 이로부터 생겨난 법 또한 영원하다. 지적 피조물인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영원한 법을 자연법이라 부르며, 인간은 영원한 법을 반영하는 자연적 성향을 갖고 있다. (신학대전 2부)

“인간이 자연적 성향을 갖는 것은 자연법에 귀속된다. 이 가운데 인간이 이성에 따라 행위를 하려는 것은 올바르다. 선은 행하고 증진해야 하며, 악은 피해야 한다. 이것이 이 법의 첫 번째 계율이며 자연법의 다른 모든 계율의 기초가 된다.”(아퀴나스, 신학 대전)

[2013] 이성은 자연적으로 선을 지향하고 악을 거부한다. 이러한 자연적 성향에 의해서 자연법의 가르침에는 질서가 있다. 첫 번째로 인간은 자연의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선을 지향하는 성향을 지닌다. 이에 의해 자연법은 인간이 생명을 보존하고 그 반대의 결과를 피하게 한다. 두 번째로 인간은 좀 더 특별한 피조물의 성향을 동물과 공유한다. 이에 의해 자연은 인간에게 남녀의 결합과 자식의 부양 등을 하게 한다. 세 번째로 인간에게는 이성의 선에 따른 특수한 성향이 있다. 이에 의해 인간은 신과 사회 속에서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무지를 회피하고 자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해 해를 끼치지 않게 된다. (신학대전 2부)

[2016A]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을 성찰함으로써,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닫게 되며 신이 우리를 창조하면서 부여한 인간의 본질 또는 이상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범위에서 우리는 신의 영원한 법을 인식할 수 있다. 제한적이지만 지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영원한 법을 우리는 (자연법)(이)라 부른다. … (중략) … 선은 목적의 본성을 갖고 악은 그 반대의 본성을 갖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적 경향성으로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이성에 의해 선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그 반대는 악으로 이해 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의 계율들의 질서는 자연적 경향성의 질서를 따른다. (신학대전 2부)

[2010] 세계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주의 모든 공동체가 신의 마음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점은 자명하다. 신은 피조물에서 발견되는 모든 행위와 개념들의 지배자이다. 영원한 법칙은 모든 것의 운동과 행위를 지배하는 것으로서의 신의 지혜이다.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영원한 법칙을 우리는 자연법이라 부른다. (신학대전 2부)

이성적 피조물은 영원한 이성 안에 참여함으로써 적절한 행동과 목적에 대한 자연적 성향을 지닌다.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영원법의 참여가 바로 자연법이다. 자연법의 제1원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는 성향, 종족을 보존하려는 성향, 신에 대해 알고자 하는 성향, 사회적 삶을 영위하려는 성향에 의해 구체화된다.

신 안에 있는 법이 영원법이고, 영원법이 인간에게 분유되어 있는 것이 자연법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본성을 포함하여 공동선을 위한 실천 원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라.”라는 자연법의 제1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가변적이고 다양한 인간의 일에 추상적인 자연법을 직접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정법이 필요하다.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 이성은 자연적 성향을 가진 모든 것을 선(善)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자연법의 첫째 원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것이다.

행복은 이성에 따르는 삶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본성적으로 내재하는 자연법의 명령에 따라 덕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현세의 행복일 뿐이고, 영원한 행복은 신을 보고 신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영원법은 모든 운동과 행위를 지배하는 신의 지혜이다. 만물은 신으로부터 영원법을 통해 각자의 특정한 본성을 부여받았다. 인간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러한 영원법을 따르는데, 여기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영원법에 참여하는 것을 자연법이라고 부른다. 현실에서 실정법은 이성이 따르라고 명령한 자연법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이성적 피조물은 영원한 이성을 통해 그가 행해야 할 행위와 목적에 대한 자연적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 이성적 피조물이 영원법에 참여하는 것을 자연법이라고 부른다.

 

아퀴나스가 강조한 자연법은 신이 자연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전제로 삼는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자연법은 자기 생명을 보전하려는 욕구, 종족을 지속시키려는 욕구, 신·인간·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구,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등과 같은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다. 또한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고,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인간 사회의 실정법도 이러한 자연법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완전한 행복, 신학적 덕]

모든 것들은 완성을 향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최종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의 완전한 선이며 자신을 충족시키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궁극 목적은 창조되지 않은 선, 곧 신이다. 신은 무한한 선이므로 오직 선만이 우리의 의지를 넘칠 만큼 가득 채울 수 있다.

신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이 인간의 최종 목적인 궁극적 행복이다. 자연적 욕구가 안식에 도달하기 전까지 그 사람은 최종 목적에 아직 도달한 것이 아니다. 최종 목적을 위해서는 자연적 욕구를 잠재우는 신의 본질을 인식해야 하며, 그 외의 지적 인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19A]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속성인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통해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이다. 달리 말해서, (자연적 덕)을/를 통해 도달할 수있는 행복은 불완전하다. (자연적 덕)에는 선과 진리를 추구할 수있도록 이론적인 지성을 완성시키는 덕과 올바른 생활을 할 수있도록 욕망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덕이 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신의 본질을 보는 것에 의해서 가능하다. 인간이 신의 도움을 받아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하는 덕에는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이 있다. (신학대전 2부)

[2012] 모든 것들은 완성을 향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최종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의 완전한 선, 자신을 충족시키는 선이다. …(중략)… 우리의 궁극 목적은 창조되지 않은 선, 곧 신이다. 신은 무한한 선이므로 오직 신만이 우리의 의지를 넘칠 만큼 가득 채울 수 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이성으로 탐구되는 철학의 여러 분과 외에 신의 계시에 따라 성립되는 어떤 가르침이 있을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은 이성의 파악을 넘어서는 어떤 목적, 즉 신을 지향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들이 신의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었다.”(아퀴나스, 신학 대전)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원리에 의해, 인간의 범위 안에 있는 행복을 향해 전진한다. 그런데 완전한 행복은 인간적 본성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다른 원리가 신에 의해 인간에게 추가되어야 하고, 이 원리를 신학적 덕이라 한다. 

완전한 행복은 신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 가능하다.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만 신에 도달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완전한 행복은 오직 신에 의존해 그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며, 이 참여 활동의 원천은 신학적 덕이다. 

 

[신 존재 증명]

신 존재를 증명하는 첫 번째 논증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움직이는 모든 것 각각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운동의 원인 소급은 무한할 수 없다.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 제1원동자, 즉 신은 존재해야 한다. 

(수특문제) 자연 만물은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자연 만물이 항상, 혹은 빈번히 최고로 좋은 것을 얻기 위한 방식으로 운행한다는 데서 이 사실은 분명하다. 이로써 그들이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목표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에 의해 인도받지 않으면,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궁수에 의해 인도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자연 만물을 목적을 향해 질서 지어 주는 어떤 지성적인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그는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신의 존재를 이성을 통해 철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며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조화를 추구한다.

 

종교개혁

[루터]

“36조: 어떤 그리스도교인이든 자기의 죄에 대하여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에서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 ... 43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더 큰 선행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교인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루터, 95개조 반박문)

인간은 면죄부가 아니라 신의 은혜로 그리스도가 있는 천국에 이를 것이다. 신에게 순종할수록 죄의 세력이 약해지지만, 신에게 거역할수록 죄의 세력은 강해진다. (루터)

교황의 이름으로 된 면벌부를 사게 되면 죄의 형벌을 면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인간에게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완전한 회개를 통해 사면과 신의 은총을 충분히 누릴 권리를 갖고 있다. (루터)

 

루터(1483~1546)는 교회의 부패한 행태를 지적하며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부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며, 예수의 가르침과 사랑을 실천해야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루터의 주장은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독점적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와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누구나 성서와 기도를 통해 신과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이 세상에서 신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칼뱅]

칼뱅(1509~1564)은 인간의 구원은 신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고 보고, 모든 직업은 신이 부여한 소명이라는 직업 소명설을 바탕으로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모든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노동은 신성하며 노동으로 얻은 것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이는 종교 개혁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던 근대 산업화 사회의 책임과 성실이라는 윤리적인 요청에도 부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