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임용고시 기타

수험 윤리 지문 모음 (4) 스피노자, 흄

neon_eidos 2023. 3. 3. 23:39

천재교과서(변순용 외) 인용문("-" 없는 단락들은 본문)

수능특강 자료플러스

수능 및 모평 기출 제시문 (마더텅 활용)

임용 기출 제시문 (김병찬 기출집, 도교사 serenity 선생님 타이핑 자료 활용)

베이컨

[우상]

우리가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네 가지 편견이 있다. 그것은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다. 

인간의 지성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과 그릇된 관념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진리도 얻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들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학문을 혁신하려고 해도 곤경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인간의 지성을 고질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우상은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진리를 얻을 수 없게 한다. 인간은 우상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학문을 혁신할 수 있다.

 

[귀납적 학문 방법]

이성을 사용하면서 발명과 발견을 중시하지 않아 학문의 발전이 없었다. 형식 논리학의 경우,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지 않고 기존 지식을 맹신함으로써 우상에 빠졌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따라 제시된 논증은, 세계를 인간의 사유에 예속시키고, 인간의 사유를 언어에 예속시킬 뿐이다. 그릇된 논증은 우상을 보호하는 방책에 불과하다. 

자연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을 고질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우상들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참된 귀납법으로 개념과 공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경험에만 의존하거나 독단을 휘둘렀다. 경험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오로지 자료를 모아서 사용하고, 독단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거미처럼 자신의 속을 풀어내서 집을 짓는다. 그러나 꿀벌은 중용을 취한다. 즉 들에 핀 꽃에서 재료를 구해다가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한다. 참된 학문의 임무는 이와 비슷하다. 참된 학문은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 얻은 재료를 지성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베이컨, 신기관)

  

데카르트

“나는 진리 탐구를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버림으로써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기로 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렇게 의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부동하기 때문에 회의론자들의 모든 가정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고 나는 주저 없이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데카르트, 방법서설)

 

[방법적 회의]

이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이성도 착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 얻은 진리는 생각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내던져 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학문의 기초로서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은 우리를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정신을 감각으로부터 떼어 내는 데 가장 쉬운 길을 열어 준다. 이러한 의심은 우리가 참이라고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해 준다.

인간은 선입견 때문에 진리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입견에서 벗어나 진리를 파악하려면 먼저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인식의 제1원리를 찾아야 한다.

누구라도 이성을 완전히 사용하기 전에는 많은 선입견으로 인해 진리 인식에서 멀어져 있다. 이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불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물의 본성을 단 한번이라도 의심해 보는 것이다. 

 

[철학의 제1원리]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아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의 제1원리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진리는 아주 확고부동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스피노자

[신 또는 자연]

“나는 실체를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생각되는 것, 곧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나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으로, 바꾸어 말하면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생각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존재할 수 없고 생각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어떤 것도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생각될 수 없다.” (스피노자, 윤리학)

“인간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인간은 신의 본성을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자연 안에는 어떤 것도 우연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결정되어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

[2012]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이다. …(중략)… 신 이외의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양태는 실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양태는 오직 신성한 본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것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에티카 1부)

[2013] 우리는 생산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을 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 아니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 곧 자유로운 원인으로 고찰되는 신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생산된 자연(natura naturata)을 신의 속성이나 그 속성의 필연성 에서 생기는 모든 것, 즉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는 것으로 고찰되는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로 이해한다. (에티카 1부) 

“자연 안에는 우연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영향을 미치게끔 결정되어 있다.”(스피노자, 에티카)

“이성은 자연에 반하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성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라고 요구하며,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노력할 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스피노자, 에티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있을 수 없다. 신은 우리의 정신이 인식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그것의 세 각의 합은 두 직각의 합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 영원에서 그리고 영원으로 -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이 필연과 동일한 필연으로, 신의 최고의 힘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양태의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항상 따라 나올 것이다. 

신 또는 자연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필연성에 의해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신 또는 자연이 왜 작용하는가에 대한 이유 또는 원인과, 왜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이유 또는 원인은 동일하다. 

신, 즉 자연은 무한하고 완전하며 유일한 실체입니다. 오직 신만이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입니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오직 신의 무한한 본성의 법칙에서 생깁니다

우리가 파악하는 모든 것은 모두 신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신 안에 있고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신의 본성이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이다.

실체는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진 실체다. 신을 제외한 다른 실체는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하고, 그 어떤 것도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

인간은 유일한 실체인 신의 유한한 양태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인 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덕을 갖춘 사람은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자신과 신과 사물을 파악하며, 항상 마음의 평화를 누립니다. 여기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고 드뭅니다. 그런데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 뿐만 아니라 어려운 법입니다. (삶의태도 가장적절?) 옳.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인 신을 이성을 통해 인식하려고 힘쓴다.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실체로 이해한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다. 최고의 행복은 신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생산하는 자연, 즉 신은 만물의 원인이다. 신은 자신에게 아무런 목적도 설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의거해서만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러나 생산된 자연은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이고,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다.

 

[신 인식, 필연성 인식]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것은 우리의 이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오직 이것에 최고의 행복이 있다. 최고의 행복이란 신을 인식함으로써 생기는 정신의 만족이다.”(스피노자, 에티카)

신은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인간의 최고선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인간의 최고덕도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의 가장 고상한 덕은 자연의 필연성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에 의해 추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성을 사용하는 한에서 인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결코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 정신의 최고의 덕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삶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것은 가능한 한 지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이것에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있다. 진실로 최고의 행복은 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정신의 만족일 뿐이다. 그런데 지성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따라 나오는 활동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이 품고 있는 최고의 욕망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인식하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2014A] ● 수동적인 정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명석 판명한 관념을 형성하는 순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

● 지복(至福)은 신에 대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덕의 결과물이 아니라 덕 자체이다. 우리는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은 자신과 신체를 (영원의 상) 아래에서 파악함으로써 신의 인식을 획득해야 한다. (에티카 5부)

완전한 행복은 신에 대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랑은 현존하는 것으로 표상되는 한에서의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신을 영원하다고 인식하는 한에서의 신에 대한 사랑이다. 신과 사물을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인식해야 한다. 

“무지한 자는 외부 원인으로부터 갖가지 시달림을 받아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현명한 자는 어떤 영원한 필연성의 관점에서 자신과 신, 그리고 사물을 인식하며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스피노자, 에티카)

인간의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써 가능하다.

(자유로운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음을 이성적으로 관조하는 존재라네.

현자는 영혼의 흔들림이 거의 없고,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인식하며, 항상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이성으로 감정을 인식하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모든 것은 신, 즉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산출되어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감정은 없다. 

사람이 어떤 상실의 슬픔에 빠졌을 때, 그 상실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는 순간 슬픔은 감소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무지한 사람은 외부 원인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달림을 받아 참된 마음의 평화를 결코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신과 사물을 모르는 것처럼 살며, 작용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 이에 반해, 현명한 사람은 거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인식하며, 존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고, 항상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여기에 이르는 길은 매우 어렵게 보일지라도 발견될 수는 있다. 또한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물론 험준한 일임에 분명하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스피노자, 윤리학)

 

[코나투스]

[2021]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conatus)’은 만물의 본질입니다. 이 성향은 생물학적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 또한 자기보존에 힘씁니다. ‘자아의 본질을 지킨다.’라는 것은 나의 행동이 내 밖의 것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의 내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외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의 내적 원인에 의해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행동의 원인이 나 자신 안에 있으며 신과 ‘나’가 같은 외연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때 이 세상에 나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나 밖에서 나의 행동을 제약할 아무런 힘의 존재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연 전체를 하나의 주체로 볼 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인 동시에 (자유)입니다. 모든 일의 원인은 신, 즉 ‘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티카 1,3,5부)

[2016A]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신은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각자는 신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능력을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어떤 존재도 그 자체가 파괴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또는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는 어떤 것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제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한다. 각자의 주어진 본성에서 여러 가지가 필연적으로 생긴다. 그리고 자신의 일정한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코나투스)을/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각 존재의 주어진 또는 현실적인 본질을 구성한다. (에티카 3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데 다음과 같은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즉, 모든 사람이 모든 측면에서 일치하여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리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두가 함께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스피노자, 에티카)

 

[외부와의 좋은 만남]

“외부에는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추구할 만한 것이 많다. ... 맛있는 음식, 좋은 향기, 푸른 식물의 아름다움, 장식, 음악, 운동, 연극, 그리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각자가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것으로 자신을 상쾌하게 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것은 현명한 사람의 모습이다.”(스피노자, 에티카)

 

스피노자는 자연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을 신으로 보고, 신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신을 자연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창조자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본다. 신, 즉 자연은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이며, 자연의 개별 사물은 하나의 실체가 보여 주는 여러 가지 모습인 양태이다. 그리고 실체는 자기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움직이므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스피노자(1632~1677):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의해 생각되는 것, 즉 자신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모든 개별 사물을 신의 양태, 혹은 신의 표현으로 본다. 따라서 개별 사물은 신의 힘을 일정한 정도로 지니는데, 이 힘은 각 사물의 자기 보존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성을 지닌 인간 역시 자기 보존의 노력을 기울이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기 보존에 유익한 것은 선으로, 해로운 것은 악으로 여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념에 속박된 사람은 외부 원인에 휘둘리며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좋은 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을 못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정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우리의 이성을 계발하고 이성에 따르는 삶을 살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외부와 좋은 만남을 가지면 이성적 삶을 더욱 증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필연적 인과 관계를 인식할 때 최고의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성을 온전히 사용하여 만물의 궁극적 원인인 신, 즉 자연으로부터 사물이 발생하는 질서를 파악함으로써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할 때, 신이 우리를 통해 신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신과 우리가 하나이며 자연의 모든 존재가 신을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관조하는 데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본다.

감정을 다스리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감정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발생하는 인과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감정의 영향을 덜 받게 됩니다. 모든 것은 신, 즉 자연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며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감정은 없습니다.

 

[선악]

악덕과 덕은 단순히 관념들의 비교 혹은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없다. 우리가 악덕과 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감정에 의해서이다. 도덕적 선악은 판단되기보다는 오히려 느껴지는 것이다. 

“악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행위든지 살펴보자. 이 행위를 모든 면에서 검토하고, 당신이 악이라고 말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라. 당신이 대상을 살피는 한, 전혀 악을 발견할 수 없다. 당신이 고찰의 방향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돌려서,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부인의 감정을 찾을 때까지 결코 악을 발견할 수 없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어떤 살인 행위를 모든 면에서 검토하고 당신이 악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지 보라. 이때 당신은 어떤 정념, 동기, 의욕, 생각만을 발견할 뿐, 다른 사실은 없다. 당신이 그 대상을 고찰하는 동안, 그 악덕은 당신을 피해 달아난다. 당신이 고찰의 방향을 자신의 마음으로 돌려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그 행위에 대한 부인의 감정을 발견할 때까지는 당신은 그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의 목소리와 몸짓에서 어떤 감정의 결과를 볼 때 나의 마음은 즉시 이런 결과로부터 이것의 원인으로 나아가 그 감정에 대한 생생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이것은 곧바로 감정 자체로 전환된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내가 감정의 원인을 지각할 때 나의 마음은 그 결과로 나아가 그 결과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끔찍한 수술실에 있다면 수술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도구를 준비하고 붕대를 정리하며 철제 기구를 가열하는 일과 환자의 보조원의 불안과 걱정의 모습은 나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강한 가엾음과 공포의 감정을 일으킬 것이다. ... 결국 타인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우리의 추론이 다양해짐에 따라 우리의 행동도 다양해질 것이다. …(중략)… 그러나 행동은 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다만 이성에 의해 지도될 뿐이다. 혐오나 선호가 어떤 대상을 향해 일어나는 것은 고통이나 쾌락에 대한 전망 때문이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악덕과 덕은 단순히 관념들의 비교 혹은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악덕과 덕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감정에 의해서임이 틀림없다. 도덕적 올바름과 악함에 관한 우리의 결정은 명백히 지각이다. …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말해서 도덕성은 판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느껴진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적의 훌륭한 품성은 우리에게 해롭지만 우리의 존경심을 유발할 수 있다. 어떤 품성이 도덕적 선 또는 악이라 불리는 감정을 일으키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우리의 개별적 이익과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고려될 때이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사람의 품성과 행위에서 발생하는 쾌락 또는 고통의 모든 감정이 우리가 칭찬하거나 비난하게 되는 특별한 종류의 감정은 아니다. 적의 훌륭한 품성은 우리에게 해롭지만 우리의 존경심을 유발할 수 있다. 어떤 품성이 도덕적으로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이나 감정을 일으키는 경우는 오직 그 품성을 우리의 개별적 이익과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고려할 때뿐이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유용성이 도덕적 감정의 근원이고, 이 유용성이 항상 개인 자신만을 챙기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도출된다. 즉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곧바로 우리의 시인을 받는다.”(흄, 도덕 원리에 관한 연구) 

“만약 유용성이 도덕적 감정의 근원이라면 그리고 이 유용성이 항상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만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로부터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곧바로 우리의 시인을 받으며 선한 의지가 그것을 추천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유용성은 우리의 동의와 시인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의 유용성은 우리 자신의 것만은 아니다. 이처럼 유용성이 항상 자기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호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도덕의 기원을 대부분 설명해 주는 원리가 놓여 있다.

 

[이성의 역할]

“우리가 감정과 이성의 반목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엄밀하게 그리고 철학적으로 말하고 있지 못하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성은 감정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역할도 요구할 수 없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이성 혼자서는 그 어떤 의지 작용의 동기가 될 수 없으며, 이성은 의지를 지도함에 있어서 감정에 반대할 수 없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2012] 이성만으로는 어떤 행동도 유발할 수 없고 어떤 의욕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추정으로는 이성은 의욕을 막거나 어떤 정념 또는 정서를 선택하려고 싸울 역량이 없다. …(중략)… 그런데 우리가 가정이 거짓된 것임을 지각하는 순간, 우리의 정념은 어떤 대립도 없이 이성을 따른다. 뛰어난 향기 때문에 어떤 과일을 욕구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나에게 나의 실수를 확인 시켜 주면 나의 갈망도 그친다. (논고 3권 1부 1절)

“이성 혼자서는 그 어떤 의지 작용의 동기가 될 수 없으며, 이성은 의지를 지도함에 있어서 감정에 대립할 수 없다. …(중략)… 사람들이 감정과 이성의 싸움을 이야기할 때,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엄밀하자도 그리고 철학적이지도 않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성은 감정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임무도 요구할 수 없다.”(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이성은 인간이 야수보다 우월하다는 주된 근거이지만,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직접 유발하지 않는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고 노예여야 하며, 감정에게 봉사하고 복종할 뿐이다. 

 

흄은 도덕적 선악은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즉 그는 도덕적 선악이 지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행위를 바라볼 때 느끼는 시인의 감정과 부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선악은 도덕적 판단 대상인 사람의 행위나 품성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인과 부인의 감정, 즉 도덕적 감정에 있다. 이러한 도덕적 감정은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도덕적 감정이 개인의 주관성을 넘어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 까닭은 공감 덕분이다. 흄에 따르면, 공감이란 우리가 감정을 교류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편협하고 개인적인 관점을 극복하도록 해 주는 자연적 성향이다.

이러한 공감은 우리의 경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어떤 감정을 느끼는 타인을 볼 때 우리는 그 감정과 관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관념을 갖게 되고, 이 관념이 우리 내부에서 타인과 같은 감정을 일으킨다. 흄은 우리에게 공감의 능력이 있으므로 사회의 행복에 유용한 행위가 사회적 시인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이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것에 쾌감을 느끼게 되며 그것이 바로 도덕적 선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도덕의 기초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감정과 이성이 대립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은 말입니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이성은 감정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임무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