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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교과서(변순용 외) 인용문("-" 없는 단락들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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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및 모평 기출 제시문 (마더텅 활용)
임용 기출 제시문 (김병찬 기출집, 도교사 serenity 선생님 타이핑 자료[https://cafe.daum.net/ethicsteacher/IPjk/2338] 활용)
에피쿠로스
[쾌락]
쾌락은 마음의 혼란과 육체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쾌락은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최고선이자 행복한 삶의 시작이고 끝이다. 아름다움과 탁월함도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버려야 한다.
쾌락은 행복한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다. 우리는 모든 행동을 쾌락에 따라 택하거나 피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육체적 고통이 없고 마음에 혼란이 없는 상태에 기여할 때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의 쾌락은 방탕한 사람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과 마음의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넘칠 만큼의 음식이나 맛있는 생선 요리와 같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있는 것들이 쾌락적인 삶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욕구와 회피의 근거를 파악하고 영혼을 회오리바람처럼 뒤흔드는 광기를 몰아내는 명료한 사고만이 쾌락적인 삶을 만들어 준다.”(에피쿠로스, 쾌락)
“아름다움과 덕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에피쿠로스, 『쾌락』)
[2019A] ● 우리는 쾌락이 제일의 선천적인 재산임을 알고 있으며, 쾌락에 의해 추구와 회피를 조정한다. 죽음과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욕구가 무제한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쾌락은 신체에서 어떤 고통도 갖지 않는 동시에 정신에서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XII.8장,34장 or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하는 쾌락은 무분별한 욕구 충족에서 오는 쾌락이 아니고, 사치스러운 향락에서 오는 쾌락도 아니다. ... 에피쿠로스학파가 중시하는 쾌락은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는 평온함이다. 이러한 상태를 평정심, 즉 아타락시아라고 한다. 이처럼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고통과 불안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데, 이런 점에서 그들의 쾌락주의를 소극적 쾌락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쾌락은 행복한 삶을 이루는 시작이자 끝이며, 다른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최고선이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쾌락]
[2016B]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쾌락의 양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숙고를 통해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인생의 유한함도 우주의 무한함도 우리에게 똑같은 쾌락을 의미한다. … (중략) … 욕구들 가운데 어떤 것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며, 어떤 것은 자연적이나 필연 적이지 않다. 그리고 어떤 것은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으며 단순히 공허한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or 중요한 가르침)
[2012] 단순한 음식이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제거해 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사치스러운 음식과 같은 쾌락을 준다. 또한 빵과 물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며, 우리가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주저하지 않게 해 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연의 순리가 요구하는 재산의 양은 제한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갈망으로 말미암아 추구하는 재산은 어마어마하다.”(에피쿠로스, 『쾌락』)
부나 군중으로부터의 명예를 소유함에 의해서도, 한없는 욕구로부터 생기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몸의 고통과 마음의 불안’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족을 큰 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적은 것을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비록 많은 것을 갖지 않더라도 '가장 적은 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자연적인 것은 얻기 쉽지만 허황된 것은 얻기가 어렵다.'라고 생각하며 적은 것들에 만족하기 위해서이다.”(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학파는 참된 쾌락을 누리려면 우선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이들에 따르면, 고통과 불안은 우리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거나,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를 충족하려는 데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수면에 대한 욕구처럼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는 충족하지 못하면 고통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치, 부나 명예, 권력에 대한 욕구처럼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충족하지 못하여도 고통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욕구를 충족하려는 노력이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쾌락을 누리려면 필수적이지 않은 헛된 욕구를 자제하고,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를 최소한으로 충족하는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음으로 에피쿠로스학파는 대중과 속세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공적인 삶은 집착, 좌절, 다툼, 분노 등을 불러일으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피쿠로스학파는 가까운 친구와 함께 은둔 생활을 하며 우정을 나누고 정의롭게 살 것을 강조한다. 이때 우정은 서로 지적인 즐거움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중요하고, 정의는 인간관계에서 서로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기 위해 필요하다.
[쾌락 계산]
“모든 쾌락은 우리의 본성에 일차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모든 쾌락이 추구할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회피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비교하여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을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에피쿠로스, 쾌락)
[2010] 쾌락은 우리에게 최우선적으로 주어진 자연적인 재화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쾌락 때문에 더 큰 불쾌가 초래될 위험이 있을 경우에 우리는 많은 쾌락들을 지나쳐 버린다. 오랜 고통의 시간 뒤에 보다 큰 쾌락이 뒤따라올 경우에, 우리는 고통을 쾌락보다 높이 평가한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성에 심어진 일차적 선은 쾌락이다. 그런데 쾌락이라고 다 선택하는 것도, 고통이라고 다 피하는 것도 아니다. 이중 무엇이 득과 실이 되는지를 측정, 비교해서 판단해야 한다.
[신, 죽음, 운명]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하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 『쾌락』)
[2010] 모든 불행 중에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하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아무 관련이 없다. 산자에게는 죽음이 없으며,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2011]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았으며,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는 불멸성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에서 벗어나 우리의 유한한 삶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2016B]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습관을 들여라. 왜냐하면 모든 선과 악은 감각 능력을 전제하는데, 죽음은 바로 (모든 감각 능력의 상실)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덧없는 삶을 비로소 유쾌하게 만들어 준다. 현자는 삶을 거부하지도 않으며, 더 이상 살아있지 않는 상태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or 중요한 가르침)
[2017A] 내가 지속적으로 당신에게 명령해 온 것들을 잘사는 것의 제1원리로 받아들이고 또한 행하라. 가장 먼저 (신)은/는 영원한 존재이며 완전히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하라. 대중들은 그가 악한 자들에게는 가장 큰 불행을 가져다주고, 선한 자들에게는 가장 큰 이로움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추측이다. 그는 스스로 어떤 고통도 모르며, 다른 것들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을 밤낮 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너는 자나 깨나 고통 받지 않게 될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or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체가 분해되면 감각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평정심을 추구하는 현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단순히 오래 살려고 하기보다 가장 즐겁게 살기를 원합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죽음, 운명, 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제거하면 마음의 불안이 없어지고 평온함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죽음은 모든 감각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필연적인 운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운명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으며 행복한 존재인 신은 인간에게 호의나 악의를 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자연학]
[2017A] 우리는 무게가 있고 크기는 다양하지만 그 크기가 무한하지 않은 원자들이 덩어리를 형성할 때 처음부터 소용돌이가 끼어들어서 천체의 회전 법칙이 생겨났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들의 원인을 정확히 발견하는 것이 자연학의 역할이며, 행복은 천체 현상의 본성에 대한 지식 들을 획득하는 데 있다고 믿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큰 괴로움이 생겨나는 이유는 사람들이 천체는 (신) (이)며 천체 자신의 의지를 가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or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2019A] 우주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하고 미신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주의 궁극적 근거에 대해 의심하면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는 완전한 ㉡ 쾌락을 즐길 수 없다. (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XII.8장,34장 or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쾌락과 덕]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며,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고서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덕은 본성적으로 즐거운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즐거운 삶은 덕과 분리할 수 없다.”(에피쿠로스, 『쾌락』)
스토아
[우리에게 달린 것, 일이 아닌 일에 대한 생각, 부동심, 금욕]
“세상에는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사물에 대해 의견을 내고, 의욕을 느끼며, 그것을 갈망하거나 기피하는 것과 같은 의지적 활동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체·재산·평판·권력 등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닌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다.”(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인간의 정신을 방해하는 것은 사건들 자체가 아니라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다. 예를 들어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그것이 두렵다는 사람들의 판단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동요와 슬픔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의견과 판단에 돌리도록 하자.”(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2019A] 우리는 ㉠ 어떤 인상들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에 의해 휩쓸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쾌락에 사로잡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히려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 다음으로 두 순간, 즉 쾌락을 행한 후에 후회하게 될 때와 그것을 멀리함으로써 기뻐하고 자신을 찬양하게 될 때를 상기해야 한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8 or 34장)
[2012]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코 “내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하지 말고, “되돌려 주었다.”라고 말하라. 자식이 죽었는가? 되돌려 준 것이다. 땅을 빼앗겼는가? 그것 또한 되돌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니, 너에게 그것이 무슨 관심일 수 있겠느냐?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11장)
“몸에 관련된 것들은 겨우 필요한 만큼만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식, 옷, 집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사치스러운 모든 것과는 단절해야 한다. 쾌락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쾌락을 멀리하였을 때 자신이 얼마나 기뻐할지, 그리고 자신을 얼마나 칭찬할지를 생각해야 한다.”(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욕망에 대한 태도는 우리의 뜻대로 조절할 수 있다. 우리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이성의 힘으로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에 이르러야 한다.
충동과 욕망이 생길 때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우선 그것이 올바른지 이성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신성한 우주에는 질서가 있다. 선한 삶은 우주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에 만족하고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쾌락의 유혹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념에 이끌리지 말고 자연의 섭리인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수특문제) 설사 미덕이 쾌락을 주게 된다 하더라도 쾌락 때문에 미덕이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미덕이 쾌락을 준다면 쾌락은 미덕의 부수적 현상일 뿐이다. 미덕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하다가 쾌락도 얻게 되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과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인도자로 삼아야 한다. (세네카)
[운명 순응, 세상만사는 이성적]
[2019A] 우주는 생겨난 모든 것의 원천이다. 생겨난 것은 그것을 지배하는 신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여되었다.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지 말고, 오히려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야 한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8 or 34장)
(스승님, 만물의 운행 원리는 무엇입니까?) 신적인 이성에 의해서 미리 결정된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이라네.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임을 알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네.
인간 본성이 지금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라. 자신의 고유한 선을 찾는 자는 누구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자연과 우주 전체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본성과 운명에 따라 할 일을 정해야 욕구의 횡포로부터 벗어나고 덕을 따를 수 있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일의 본성과 자신의 본성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자연과 일치하지 않는 일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나에게는 신과 나의 영혼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전 우주를 주재하는 자의 의지에 정신을 일치시키면서 모든 각각의 일을 행한다면, 바로 이것이 유덕한 삶이자 강물같이 순조롭게 흐르는 행복한 삶이다.
“운명에 대해 버둥거릴수록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될 뿐이다. 마치 그물에 걸린 새가 날개를 퍼드덕거릴수록 더욱 사로잡히게 되는 것과 같다. 최상의 방법은 오직 신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세네카, 행복론)
“빵을 구울 때 표면의 갈라진 부분들은 빵을 굽는 사람의 의도와 기술에 어긋나기는 해도,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며 먹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이와 같이 자연의 순리에 따른 것이라면 아무것도 나쁘지 않다. 우주에서 생성되는 사건과 사물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로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물들 중 그 어떤 것도 기쁨을 제공하지 않도록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011] 죽음을 멸시하지 말고, 죽음을 기뻐하라. 죽음은 자연이 원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자연의 과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맞는 태도이다.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너에게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죽음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신체도 자연 만물처럼 해체되기 때문입니다. 부동심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인간에게 적절한 태도는, 죽음에 무관심하거나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스토아
[2005] (밑줄 친 두 학파의 명칭과 각 학파가 목표로 삼았던 최고의 경지를 서술하시오.)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그리스 문명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 당시 그리스인 들은 동방 문명국가들과 접촉하면서 점차 이방(異邦)에 대한 차별 관념을 버리게 되었고, 그 결과 세계 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관념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폴리스적 존재로서 바람직한 삶을 모색하기보다는 더 큰 틀인 우주 안에서 자신의 본성을 찾으려 했고, 마침내 우주 안의 자기를 상정하기에 이른다. 이 시대에 등장했던 대표적인 두 학파는 그 뿌리를 소크라테스부터 퀴닉학파와 키레네학파에서 찾을 수 있다.
[2013] 절제하는 훈련은 (가: 에피쿠로스학파의 온건한 금욕주의), (나: 스토아학파의 엄격한 금욕주의) 모두 강조하지만, 그 훈련이 가진 의미는 서로 다르다. (가)에 따르면,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기본 욕구들만을 충족하여도 충만하고 순수한 기쁨을 계속 해서 맛볼 수 있다. 그래서 (가)는 절제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 되는 지점을 알아내려 한다. 이와 달리 (나)에 따르면, 우리는 절제하는 훈련을 통해 필수 불가결한 것도 언제나 제어할 수 있으며, 명성과 과시 등의 욕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살 수 있다. 또한 (나)는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기 때문에, 박탈이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하는 모든 근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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