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ington, R. L. (1998). Western ethics: An historical introduction. Blackwell Publishers.
김병찬. (2022). 『중등임용 시험대비 서양·동양·한국윤리』. 에프엠.
점점 형성되어가는 공부 패턴:
1. 애링턴과 김병찬 책의 해당 챕터을 쭉 읽는다.
2. 김병찬 책을 기준으로 워드에 노트한다.
3. 이 노트를 기반으로 하고, 애링턴을 참고하면서 티스토리에 최종 노트를 작성한다.
(노트를 다시 한 번 애링턴, 김병찬 책과 대조하여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그냥 완성도 낮게 대충 한바퀴 돈다는 기조에 따라 생략한다)
4. 원전, 윤사 교과서, 수능특강, 전공 개론서, 서양철학사 책들, SEP, 학부 전공수업 노트들... 등등 참고하고 싶은 자료들은 나중에 참고하여 노트를 수정 보완하기를 기약한다.
# 인간적 덕만으로는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는 직관은 있는데, 그 귀결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 각 개념과 논변의 중요성이나 의의를 하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뭔가 lost touch한 상태... 나중에 모든 것을 다시 더 공부해야 한다...
1. 행복
- 인간 행위는 항상 목적 또는 좋음을 지향함.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행복임(목적론적 윤리). 행복은 완전한 선을 얻는 데 있음. 인간은 완전해지기(perfection)를 궁극 목표로 추구함.
- 인간에게 궁극 목적은 신임.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선인 신만이 인간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키고 완전성을 부여할 수 있음. 궁극적이고 완전한 행복, 즉 지복은 신을 직관하고 신과 하나될 때 실현됨. 신을 보는 것 속에 인간의 완전한 행복이 있음.
- 지복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으로는 달성될 수 없고, 신의 은총을 필요로 함. 자연적 덕인 품성적 덕과 지성적 덕만으로는 행복에 이를 수 없고, 신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믿음·소망·사랑이라는 종교적 덕이 필요함.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 현세의 행복은 내세의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예비 단계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행복은 신의 은총을 통해 내세에 신과 하나가 되고, 신의 무한한 선을 향유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하고 자기 충족적인 행복이다."(비상))
- 현세에서는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없음. 행복은 내세에서 신과 더불어 완성되는 것임. 이 삶에서는 이성을 통해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적 삶을 살고 현세적 행복을 얻을 수 있음. (from 지문라이브러리: 완전한 행복은 신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 가능하다.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만 신에게 도달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완전한 행복은 오직 신에 의존해 그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며, 이 참여 활동의 원천은 신학적 덕이다.)
- 철학과 신학 (신학의 목적은 원한 행복이다. 모든 실천적 학문의 목적은 그것에로 질서 지워져 있다. 따라서 신학은 모든 학문보다 우위에 있다. 철학은 계시의 진리를 명료화하기 위해 필요하며,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다.)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 능력만으로는 신의 본질을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므로, 이런 이해 능력은 반드시 신의 은총을 통하여 보충되어야만 한다. (『신학대전』) (?)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완성을 향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최종의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의 완전한 선, 자신을 충족시키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이성으로 탐구되는 철학의 여러 분과 외에 신의 계시에 따라 성립되는 어떤 가르침이 있을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은 이성의 파악을 넘어서는 어떤 목적, 즉 신을 지향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들이 신의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었다. (『신학대전』) (?)
신학은 철학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철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학이 전달하는 것들을 보다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신학대전』) (?)
우리에게 주입된 신앙의 빛은 신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인간 정신의 자연적인 빛이 신앙을 통해 드러난 것들을 보여 주기에는 불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들이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과 반대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반대된다면, 둘 중의 하나는 거짓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신(神)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이기 때문에, 신이 우리에게 오류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철학은 신학과 관련하여 세 가지 측면에서 유익하다. 첫째, 신앙이 전제하거나 기초로 삼는 진리들을 증명하기 위해서(예를 들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나 신이 하나라는 것과 같은 진리들). 둘째, 자연적인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취한 비유와 예들로써 신앙의 진리를 조명하기 위해서. 셋째, 신앙에 대한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서(철학의 도움으로, 신앙을 거슬러서 사용된 근거들이 거짓이거나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주해』) (?)
모든 것들은 완성을 향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최종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의 완전한 선, 자신을 충족시키는 선이다. …(중략)… 우리의 궁극 목적은 창조되지 않은 선, 곧 신이다. 신은 무한한 선이므로 오직 신만이 우리의 의지를 넘칠 만큼 가득 채울 수 있다.
위(Q1A8,Q2A7)에서 답한 바와 같이 우리의 목적은 두 가지 방식으로 고려된다. 첫째는,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 욕망하는 대상 그 자체로서이며, 이는 수전노가 돈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둘째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달성하거나 소유하거나 혹은 사용하거나 향유하는 것이며, 이는 수전노가 돈의 소유를 목적으로 한다거나 무절제한 사람이 어떤 쾌락을 향유하고자 한다고 말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의미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되지 않은 선, 즉 신, 유일하게 그 자신의 무한한 선으로써 인간의 의지를 완전하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신뿐이며, 다른 어떤 것도 궁극적 목적의 달성이나 향유가 될 수 없다. 이제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인간의 행복을 그것의 원인이나 대상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이것은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의 바로 그 본질에 대해서 고려한다면, 이것은 창조된 것이다. (『신학대전』 2-1부, 3문, 1절)
2. 자연법
1) 자연법과 영원법
- 인간은 이성을 통해 도덕 원리, 도덕적 의무를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도덕 원리, 도덕적 의무를 자연법이라고 함. (from 지문라이브러리: 자연법이란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법이며, 인간법은 자연법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 자연법 = 이성에 의해 인식된 신의 영원법 = 신의 영원법이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반영된 것 = 사람의 본성 안에 영원법이 참여해 있는 것 = 인간이 공유하는 영원법 (영원법: 만물을 지배하는 신의 지혜) ("자연법은 신이 창조한 영원불변하는 존재의 질서인 영원법에 기초한다 ...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한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다."(비상)) ("인간은 이성을 통해 신의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 판단은 이성의 명령이다"(교학사))
(from 지문라이브러리: 영원법은 모든 운동과 행위를 지배하는 신의 지혜이다. 만물은 신으로부터 영원법을 통해 각자의 특정한 본성을 부여받았다. 인간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러한 영원법을 따르는데, 여기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영원법에 참여하는 것을 자연법이라고 부른다. 현실에서 실정법은 이성이 따르라고 명령한 자연법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 “인간이 자연적 성향을 갖는 것은 자연법에 귀속”되므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신의 자연적 성향을 성찰함으로써 자연법의 규칙들을 알 수 있음. 인간이 자연적 성향을 갖는 모든 것을 이성은 좋은 것이며 추구해야 할 것으로 파악함.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적 아래 질서 지어 있으므로, 마땅히 자연법이나 실정법을 초월하여 신에 의하여 주어진 법에 의해서도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신학대전』)
세계가 신의 섭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주의 모든 공동체가 신의 마음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은 자명하다. 신의 마음은 시간상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개념이므로 이로부터 생겨난 법 또한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지혜를 통해 신은 우주 모든 것의 창조자가 되고 …… 각각의 모든 피조물에서 발견되는 모든 행위와 개념의 지배자이다. 따라서 우주의 창조 원리로서 신의 지혜는 행위 · 모범 · 관념을 의미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법칙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원한 법칙은 모든 것의 운동과 행위를 지배하는 것으로서 신의 지혜의 실례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신학대전』) (?)
신성한 학문(sacra doctrina) 안에는 모든 것이 신의 관점에서 고려되었다. 신 그 자체가 문제가 되거나, 혹은 제 사물들이 마치 그들의 원리나 목적처럼 신에게 관계된 것에 따라서 제 사물들이 문제가 되거나이다. 따라서 신은 진정으로 이 학문의 주제이다. (『신학대전』) (?)
우리의 자연적 성향으로부터 우리의 도덕적 의무가 도출된다. 인간이 자연적 성향을 가지는 모든 것은 이성에 의해 선으로 이해되고, 추구의 대상이 된다. 그 반대는 악으로 이해되고, 회피의 대상이 된다. (『신학대전』) (?)
이성적 피조물은 영원한 이성 안에 참여한다. 이를 통해 이성적 피조물은 적절한 행동과 목적에 대한 자연적 성향을 지닌다. 이성적 피조물 안에서 영원법의 참여가 바로 자연법이다. (『신학대전』) (?)
위에서 진술했듯, 법이란 자와 기준으로서,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한 가지 방식으로는, 그가 측량하고 기준을 짓는 것으로서, 다른 한 가지 방식으로는 측량되고 기준 지어진 것으로서 존재한다. 위에서 논의했듯, 신적인 통치에 복종하는 모든 존재들은 영원법에 의해 측량되고 기준지어지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은 그들에게 각인된 것에 따라 영원법을 어느 정도 나누고 있고, 이 영원법은 그들의 고유한 행위와 목적에 대한 각각의 성향들을 도출한다. 모든 존재들 가운데, 이성적 피조물은 그들이 그 자신과 타인에 대한 통치의 부분에 참여하는 한, 신적인 통치에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복종한다. 그런 까닭에 이성적 피조물들은 그들의 고유한 행위와 목적에 대한 자연적 성향이 되는 것을 영원한 지성의 한 부분으로 갖는다. 그리고 이성적 피조물 안에 있는 영원법의 이러한 참여를 자연법이라 부른다. (『신학대전』 2-1부 91문 2절) (?)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어떤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알려질 수 있다. 한 가지 방식은 그 자체로서 알려지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서 원인과의 유사성에서 알려지는 것이다. 이는 태양을 그 실체인 태양 자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의 빛줄기를 보고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신을 신의 본질에서 보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영원법을 그 자체로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이성적 피조물들은 영원법을 반성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모두―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할 것처럼―변하지 않는 진리인 영원법에 대한 반성이나 참여이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진리를 알고 있으며, 적어도 자연법의 일반적인 원리들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진리의 지식에 참여하며, 그 정도만큼 영원법을 인식하고 있다. (『신학대전』 2-1부, 93문, 2절) (?)
cf. SEP: The key text for Aquinas’s thinking about the moral law is his Treatise on Law (ST1a2ae 90–108). There he distinguishes between four kinds of law that play a role in guiding right human action:
- eternal law: God’s plan of governance for the world (q. 93);
- natural law: the distinctive way rational beings participate in the eternal law (q. 94);
- human law: particular developments of natural law worked out by human reason (qq. 95–97);
- divine law: divinely revealed laws directing human beings to their end (qq. 98–108).
2) 자연법의 제1원리
- 인간 본성에 대한 아퀴나스의 목적론적인 관점에 따라, 인간은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려는 기본적인 성향을 가짐.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 성향으로부터 자연법의 제1원리, 즉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라.”가 도출됨. 이것이 자연법의 다른 모든 계율의 기초가 됨.
좋음은 ‘목적’으로서의 의미를 그리고 나쁨은 이와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거기에 대하여 자연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모든 대상을 이성은 자연스럽게 좋은 것으로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행위를 통해 추구해야 할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이성은 나쁜 것으로 그리고 피해야 할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자연법 명령의 질서는 자연적 성향의 질서를 따른다. (?)
인간이 자연적 성향을 갖는 것은 자연법에 귀속된다. 이 가운데 인간이 이성에 따라 행위를 하려는 것은 올바르다. 선은 행하고 증진해야 하며, 악은 피해야 한다. 이것이 이 법의 첫 번째 계율이며 자연법의 다른 모든 계율의 기초가 된다. …… 그러므로 우리의 자연적 성향으로부터 우리의 도덕적 의무가 도출된다. 인간이 자연적 성향을 가지는 모든 것은 이성에 의해 선으로 이해되고, 추구의 대상이 된다. 그 반대는 악으로 이해되고, 회피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의 계율들의 질서는 자연적 성향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신학대전』) (?)
보편적으로 파악되는 것들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규칙이 있다. 존재라는 개념은 인간이 이해하는 모든 것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다. 그런 까닭에 첫 번째 자명한 원리는 “같은 것이 동시에 긍정되면서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존재와 비존재(not-being)의 개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원리들은 모두 이 원리에 근거한다.(형이상학 4장 9절) “존재”라는 것은 단순하게 가장 먼저 이해되는 것이기에, “선”(good)이라는 것이 행위와 직접 연결된 실천이성을 통해 가장 먼저 이해된다. 모든 작인의 행위는 선의 관점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이성의 첫 번째 원리는 선의 개념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이것은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다.”이다. 이로부터 법의 첫 번째 계율이 나온다. 그것은 “선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추구되어야 할 것이며, 악은 피해야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자연법의 계율들은 모두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실천이성이 자연적으로 인간의 선(혹은 악)이라고 이해한 모든 것은 추구되거나 피해야 할 것으로서 자연법의 계율에 속한 것이다. (『신학대전』 2-1부, 94문 2절) (?)
3) 자연법의 계율들
- 인간이 물리적 자연의 일부이자, 동물이자, 이성적 피조물임을 반영하는 다른 자연적 경향들에서 자연법의 일반적 원리들이 추가적으로 도출됨.
- (생명 가치) 첫째, 생명을 보존하라: 모든 실체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며, 인간 역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 반대되는 것은 저지하려는 성향을 가지기 때문에, 생명 보존은 인간에게 선임. 이로부터 ‘생명은 보존되어야 한다.’라는 자연법의 일반 명령이 도출됨. (생명 가치)
- (생식 가치) 둘째, 종을 번식하고 자녀를 양육하라: 동물인 인간은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을 가지기 때문에, 종족 보존은 인간에게 선임. 따라서 남녀의 결합과 아이들을 기르는 것 등은 자연법에 속함.
- (지식 가치, 사회성의 가치) 셋째,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신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며, 사회적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을 가짐. 이로부터 ‘진리를 추구하고 무지를 피하라.’,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와 같은 자연법의 일반 명령이 도출됨.
선은 목적의 본성이고 악은 그 반대의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모든 자연적 성향들은 이성에 의해 선한 것으로 파악되며 따라서 추구의 대상이 되고, 그 반대의 것인 악은 회피의 대상이 된다. 자연적 경향의 질서는 자연법의 계율의 질서를 따른다.
첫 번째로, 인간이 다른 실체들과 공통적으로 갖는 본성들에 일치하는 경향이다. 모든 존재는 본성에 따라 그 자신의 존재의 보전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 경향에 근거해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 이것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법에 속한다.
두 번째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공통적으로 갖는 본성들에 일치하는 경향이다. 이 경향의 덕에 의해서 “자연이 모든 동물들에게 가르치는 것”[Pandect. Just. I, tit. i], 성적인 관계, 후손을 양육하는 것 등이 자연법에 속한다.
세 번째로 인간이 인간에게 고유한 인간의 이성에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이간은 신에 대한 진리를 알고자하는 자연적 경향과 사회 속에 살고자하는 경향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이런 경향에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 자연법에 속한다. 예를 들어 무지를 피하고자 하는 것, 주위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나 위의 성향과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해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피하는 것이 자연법에 속한다. (『신학대전』 2-1부, 94문, 2절) (?)
4) 도덕 인식의 구조: 도덕적 직관과 양심
- 도덕적 직관(synderesis): 자연법의 제일원리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 양심(conscientia): 제일원리로부터 구체적인 도덕규칙을 도출하는 능력(= 직관적인 도덕적 진리를 대전제로 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소전제로 하여, 구체적인 도덕적 명령을 도출하는 능력 = 보편적 지식을 특정한 행위에 적용하는 판단 행위 = 실천적 추론력)
- 도덕적 직관은 자명하고 항상 참된 진리를 파악하며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 반면, 양심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지님.
3. 덕
1) 덕
- 덕: 인간을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완성하며 그의 궁극 목적인 행복에 이를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끌어가는 것 (자연법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본성을 완성하고 행복을 도모하는 방식)
- 덕을 자연적 덕과 종교적 덕으로 구분함. 인간은 자연적 덕을 획득함으로써 자연적 행복을 얻게 되지만, 인간의 참된 행복 즉 지복은 신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종교적 덕을 필요로 하며, 내세에서나 완전히 획득될 수 있음.
2) 자연적 덕
- 자연적(인간적) 덕: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는 품성상태 = 마음의 좋은 활동적 습관 = 덕행을 하도록 인간을 완전하게 하는 습관.
- 자연적 덕을 가지면 자연적 선 또는 자연적 행복을 성취하게 됨.
- 인간 행동의 원리는 두 가지, 즉 이성과 욕망이므로, 각 부분을 완전하게 하는 두 가지 인간적인 덕이 있음. 즉, 자연적 덕은 둘로 나뉨.
(1) 지적 덕: 이성의 탁월한 활동을 통해 얻어짐.
(2) 품성적(도덕적) 덕: 비이성적 부분인 욕구적인 부분을 이성의 규칙에 따르게 하는 것.
- 자연적 덕들 중에서 특히 정의, 절제, 용기, 사려를 중시하여 사주덕이라고 부름.
(1) 사려: 이성에 연관되어 선을 만들어 내는 덕. (이성의 규범.)
(2) 정의: 정당하고 옳은 행동을 이루는 선을 만들어 내는 덕. (의지의 규범.)
(3) 용기: 모든 형태의 고통에 맞서서 영혼을 강건하게 하는 덕. (분노의 규범.) 정념으로 하여금 이성이 명령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인데 여기서 인간은 이성이 그에게 정해준 곳에 멈춰서야 하며 그 이상 움직여서는 안 됨.
(4) 절제: 정념을 누르고 억제하는 덕. (탐욕적 욕구의 규범.) 정념이 이성에 모순되는 어떤 것을 강요할 때 정념을 절제하는 것.
cf. SEP The cardinal virtues are
- prudence: the perfection of the intellect’s practical reasoning(ST2a2ae 47–51);
- justice: the will’s stable disposition to give to each individual what is due to him (ST2a2ae 58);
- bravery: the strength of the irascible appetite in pursuing what is in accord with reason (ST2a2ae 143);
- temperance: the moderation of the concupiscible appetite with respect to its desires that conflict with reason (ST2a2ae 141).
3) 종교적 덕
-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종교적 덕이 필요함. 종교적 덕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능력을 발휘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해 인간에게 주입되는 것임.
- “지성에 믿음, 의지에 신을 향한 소망, 그리고 신과 결합시켜 주는 사랑.”
- 믿음: 자연적 지혜를 넘어서 이성으로는 찾을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하는 지적 통찰. “그 자체로 제1의 덕이다. 영성 생활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 소망: 자연적 인간에게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나 신에게는 지혜가 되는 경건하고 헌신적인 행위를 향한 의지의 지향. “신에게 의지하며 그로부터 하나의 영원한 선을 희망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대상은 영원한 행복이다.”
- 사랑: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서, 믿음이 통찰하고 소망이 지향하는 것, 즉 신과 하나가 되는 열렬한 환희. 셋 중에서 최상의 덕은 사랑임. “인간과 신 사이의 우정이며 동시에 서로를 위해 선을 원함으로써 서로를 위하는 덕이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덕 중에서 가장 탁월한 덕의 형상이다.”
믿음은 우리를 믿음의 대상인 신에게로 인도하며, 소망은 우리의 의지가 신을 지향하도록 인도하고, 사랑은 우리의 의지가 신과 영적인 통일을 이루도록 인도한다. (『신학대전』) (?)
지적인 덕과 도덕적 덕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 획득되며, 우리 안에 미리 존재하고 있는 특정한 자연적 원리에 의해 발생한다. 이런 자연적 원리 대신에, 신은 종교적 덕을 우리에게 수여하였다.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그 종교적 덕 덕분에 우리는 초자연적 목적을 향하게 된다. 종교적 덕과 비례적으로 상응하는 다른 습관들이 종교적 덕과 관련되어있는 신에 의해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의 행복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인간 본성에 적합하며, 우리의 본성을 능가하는 행복은 오직 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즉 신성에 대한 참여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러한 행복은 인간 본성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타고난 우리의 능력은 우리의 본성을 능가하는 행복으로 이끌어 주기에 적합하지 않다. 신의 도움 없이는 행복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활동의 원천은 종교적 덕이라고 불린다. (『신학대전』) (?)
인간은 자연적 존재 이상의 것이다. 그는 또한 불멸의 영혼이다. 모든 자연적 덕을 성취한다고 해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 즉 영원한 행복[至福(지복)]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인간이 아담의 타락 이전의 순정 무구한 상태를 회복한다고 할지라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세 가지의 신학적 덕, 즉 초자연적 덕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오직 내세에 신과 하나가 되고 그의 무한한 선을 향유할 때만 가능하다. (『신학대전』) (?)
인간의 행위는 그 적절한 척도에 따라 규제되는 경우에 한해서 선하다. 덕은 인간 행위의 척도에 이르게 한다. 덕이 선한 행위들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의 척도는 인간의 이성과 신(神)이라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 행위의 가장 우선적인 척도이고, 인간의 이성은 신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 신학적 덕은 가장 우선적인 척도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신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신학적 덕이 인간의 이성에 이르게 하는 품성적 덕과 지성적 덕보다 더 탁월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신학대전』) (?)
cf. SEP: Although the four cardinal virtues, as their name suggests, have historically been given pride of place within philosophy, Aquinas gives greater preeminence to the theological virtues that Paul describes in 1 Corinthians 13:
- faith: the intellectual disposition to assent to what is not apparent (ST2a2ae 1–7);
- hope: the will’s dispositional confidence in achieving a good that is difficult to obtain (ST2a2ae 17–18);
- charity: the will’s disposition for perfect love (ST2a2ae 23–27).
4) 주지주의
- 주지주의 윤리설: 도덕에서 의지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주장
- 지적 본성을 지니는 인간에게 고유한 욕구 방식은 지적 욕구이며, 이러한 이성적 욕구가 바로 의지임.
- 욕구(경향성)에는 세 종류가 있음.
(1) 자연적 경향성: 모든 피조물과 공유함
(2) 감각적 욕구: 사랑과 쾌락에 대한 욕구(concupiscible appetites) 및 두려움이나 해악을 피하려는 욕구(irascible appetites)
(3) 이성적 욕구 또는 의지: 이성이 파악하는 선을 대상으로 함. 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목적을 지향하게 함.
- 인간은 이성적 욕구를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음. 즉,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움. 이성적 욕구의 대상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자발적 행위 또는 자유의지를 드러냄으로써 인간 고유의 본성을 발휘함. 인간은 이성과 의지에 의해 자신이 행위의 주인임. 그러므로 숙고된 의지에서 이루어진 행위들이라야 고유한 의미로 인간적 행위임. 의지는 신을 사랑하고 덕을 추구할 수도 있고, 쾌락이나 권력을 사랑하고 악덕을 추구할 수도 있음. 자연법을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음. (모든 존재자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욕구하는데, 인간은 동물적 존재로서 자기 보존과 쾌락 추구 및 고통 회피의 욕구를 갖는 동시에, 이성을 가진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은 이성적 욕구, 즉 의지를 가진다. 인간은 이성적 욕구를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다.) (“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자신에게 적합한 선에 대한 욕구를 지닌다. 지적 본성을 지니는 인간에게 고유한 욕구 방식은 지적 욕구이며, 이러한 지적 욕구 능력이 바로 의지이다.”(?))
- 이성적 욕구는 이성에 의해 산출되는 욕구임. 즉 의지는 이성의 판단에 따르며, 이성이 의지를 움직이는 원인임. 이성은 자연법을 인식하며, 의지는 이성이 명령하는 목표를 지향할 때 비로소 선한 의지가 됨. 이처럼 옳은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의지를 움직여 그것을 선하게 하고, 나아가 행위를 선하게 하는 궁극적인 동인은 이성임.
4. 신 존재 증명
- (from 지문라이브러리: 우리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는 것이지, 이해하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도 신에 대한 믿음, 즉 신앙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신의 존재는 다섯 가지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다. 그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운동에 의한 증명, 원인에 의한 증명, 필연적 존재에 의한 증명, 완전한 존재에 의한 증명, 우주 질서의 창조자로서 지적인 존재에 의한 증명으로 불릴 수 있다.)
( from 지문라이브러리: 구원을 받기 위해 모든 인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런데 신이 존재 증명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신앙으로 신을 알아야 한다.)
(1) 운동을 통한 증명: 모든 운동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의 무한 소급은 불가능하며)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원동자, 즉 신이 존재해야 한다.
(2) 능동인을 통한 증명: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어떤 것도 그 자신의 능동인일 수 없으며, 능동인들의 계열에 무한 소급은 있을 수 없으므로) 원인을 소급해 가면 모든 것이 의존하는 제1의 능동인, 즉 신이 존재해야 한다.
(3) 가능성과 필연성을 통한 증명: 세상은 우연적인 존재와 필연적인 존재로 되어 있다. 우연적인 존재(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는 필연적인 존재, 즉 신의 존재를 요구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완전성을 통한 증명: 우리가 어떤 것의 선함, 참됨, 고상함 등을 평가하려면, 평가 기준이 되는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 완전한 존재가 신이다.
(5) 우주의 질서를 통한 증명: 세계의 모든 존재는 자신들의 목적을 지향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의 목적을 결정하고, 자신들의 목적으로 향하게 해 주는 최초의 지성적 존재, 즉 신이 요구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첫째 방식은 운동에 의한 증명이다. 이 세계 속에서 어떤 것들이 움직여진다는 것은 확실하며 감각적으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진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여진다면, 또한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며 움직이게 하는 저것은 또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한테도 움직여지지 않는 최초의 제1원동자(原動者)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이는 이런 존재를 신으로 이해한다. (『신학대전』) (?)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즉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을 향해 작용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궁수에 의해 인도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을 향해 질서 지어주는 어떤 지성적 존재가 있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신(神)이라 부른다. (『신학대전』) (?)
계시된 진리와 철학의 진리는 모순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는 진리는 이성적 논증을 통해 보다 뚜렷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의 진리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전체적이고 완전한 계시된 진리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우리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 (?)
- (신: 신은 피조물들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행위와 개념들의 지배자이다. 신의 지혜는 우주를 창조하는 원리이며,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법칙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은 우주의 모든 것의 창조자이며, 또한 각각의 피조물들에서 발견되는 모든 행위와 개념들의 지배자이다. 신의 지혜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법칙을 의미한다. 이 영원한 법칙은 모든 것의 운동과 행위를 지배하는데, 지적 피조물인 인간은 이 법칙에 부분적으로 참여한다. 인간의 궁극 목적은 창조되지 않은 선, 곧 신이다. 신은 무한한 선이므로 오직 신만이 인간의 의욕을 넘칠 만큼 가득 채울 수 있다. (?)
5. 자연법 이론에 대한 비판
- 인간 행위에 대한 기술적 설명과 규범적 설명을 부당하게 결합한다는 비판을 받음. 사람들이 자연법에 어긋나게 행위할 때, 인간 행위에 대한 기술적 설명으로서의 자연법이 틀린 것이고 규범적 설명으로서의 자연법은 근거를 잃음.
- 이에 대해 인간의 경향성 중에서도 이성적 경향성을 따르라는 것이 자연법의 규범적 지시라고 대답할 수 있음. 그러나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서 어떤 것이 이성적이고 따라서 자연적인지 누가 결정하는가?
6. 기타
- 정의로운 전쟁
어떤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 되기 위해서는 군주의 명령에 의하여 선포되거나 수행되어 야 한다. 군주는 국가의 질서와 안전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처벌할 수 있다. 외부의 적들을 처벌하는 행위가 바로 전쟁이다. 정의로운 전쟁을 통해 부당함이 처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한 민족이나 한 국가가 자기 구성원에 의하여 부당하게 행하여진 것을 징벌하는 데 소홀하거나, 부당하게 강탈된 것을 배상하는 데에 소홀할 경우 그런 종족이나 국가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부당하게 피해를 입은 국가 가 정당하게 배상하지 않은 가해 국가에 대해 일으키는 전쟁은 정의로운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은 전쟁 수행자들이 올바른 의도를 갖는 것이 요구된다. 즉 선을 증진하거나 악을 회피하도록 해야 한다. 부당한 보복과 같은 악한 경향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전쟁 수행자들에게 관용과 온유함과 같은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신학대전』) (?)
- 동물윤리
인간은 사고하고 선택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다. 바로 이런 능력 때문에 인간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동물은 그와 같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만, 동물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동물을 죽이는 것이 죄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자연의 과정에서 인간이 사용하도록 운명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죽이거나 동물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어떤 대상을 그 사물이 존재하는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자연의 생성 과정이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의 진행인 것에서 볼 수 있듯,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을 위해 있다는 것은 사물의 질서이다. 사람의 창조에 있어서 처음에는 살아있는 사물들이, 다음에는 동물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단지 생명만을 가지는 식물들은 동물들을 위해 존재하고, 모든 동물들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때문에 사람이 식물을 동물들의 선을 위해 사용하고, 동물들을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비합법적이지 않다.
이제 가장 필수적인 사용들은 동물들이 식물들을 식량으로 사용하며, 이것이 그들이 삶을 박탈당하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식물들의 생명을 동물들이 사용하는 것, 동물들의 생명을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적법하다. 사실 이것은 신의 계율과 일치하는 것이다.(창세기 1:29, 30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9: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신학대전』 2-2부, 64문, 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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