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ington, R. L. (1998). Western ethics: An historical introduction. Blackwell Publishers.
김병찬. (2022). 『중등임용 시험대비 서양·동양·한국윤리』. 에프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김주일·김인곤·김재홍·이정호 옮김, 2021,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나남.
오유석, 「에피쿠로스주의: 치유로서의 철학」, 『서양고대철학2』, 도서출판 길, 2016, pp.287-311.
+ 24.2.29 교과서 및 기출
알렉산더 사후(기원전 323)부터 로마 공화정의 공식적 몰락(기원전 31)까지의 역사를 흔히 '헬레니즘 시대'라고 말한다. ... 헬레니즘을 대변하는 철학 유파로서는 흔히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회의주의 학파가 거론된다. (『서양고대철학2』 p. 263)
- 헬레니즘 시기에는 "공동체 속의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고립되고 사적인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의 보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가설을 제시할 수 있음. (시르베크·길리에, 『서양철학사 1』, p.186)
1. 쾌락주의
- 쾌락주의: 쾌락을 최상의 좋음으로 보는 입장. / 행복을 쾌락의 획득 및 고통의 회피와 동일시함 (사람들이 쾌락을 추구한다는 경험적 사실에 근거해 쾌락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감)
- 쾌락(주의)의 역설: 쾌락을 직접적으로 추구할수록 쾌락을 얻기 더 어려워지고, 오히려 쾌락을 의식하기보다는 다른 목표와 가치를 열심히 추구할 때 쾌락이 얻어짐
- 쾌락주의와 스토아주의의 성공에 대한 표준적인 역사적 설명: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등장으로 도시 국가와 그것이 규정하던 삶의 방식이 해체됨 + 전쟁과 가난 등이 만연한 혹독한 시기에 극적인 삶의 철학이 요청됨
2. 아리스티포스와 키레네 학파
1) 개요
- 키레네 학파: 헬레니즘 시대 이전의 쾌락주의 학파로, 중심 인물은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35~355년경).
- 아리스티포스의 저술 중 어떤 것도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나, 그는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으로 보임.
2) 주장
- 가능한 최대한의 쾌락을, 가장 강렬한 형태로 얻으라! (쾌락의 극대화가 행복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
- 쾌락이 삶의 자연적인 목표다. 모든 인간이 본래적으로, 항상 추구하는 유일한 것이다.
- 미래보다는 지금의 쾌락이 중요: 미래에 생겨날지도 모르는 가능한 고통 때문에 현재의 확실한 쾌락을 포기하지 말라.
- 정신보다는 신체의 쾌고가 중요: 창백하고 하찮은 성찰과 관조의 쾌락 대신 육체의 생생하고 강렬한 쾌락 - 먹을 것, 마실 것, 성행위의 쾌락 - 을 추구하라. 이성은 단지 쾌락을 최대화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 [정적 쾌락을 인정하지 않고 동적 상태의 쾌락만을 인정한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권 에피쿠로스 136)]
3) 문제점
- 키레네주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고, 아리스티포스가 권하는 방탕한 삶을 살면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점을 바로 알게 된다. 숙취, 병, 다툼...
- 항상 쾌락의 기회를 포착하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삶은 쾌락주의가 권하는 태평스럽고 즐거운 삶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3. 에피쿠로스
1) 소극적 쾌락주의
- 쾌락이 최고선이자, 삶의 목표이며,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임: "쾌락은 지복한 삶의 처음이자 끝".
[128] 이것들에 관한 흔들림 없는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택과 기피를 몸의 건강과 영혼의 평정에 연관시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몸의 건강과 영혼의 평정이야말로 복된 삶의 목적이니까. 우리의 모든 행위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에게 이것이 생기게 되면, 영혼의 폭풍은 완전히 진정된다. 왜냐하면 이제 살아 있는 것은 부족한 것이라도 있는 양 무언가를 찾아 돌아다니거나 영혼의 좋음과 몸의 좋음을 충족시켜 줄 다른 것을 쫓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쾌락이 없어서 괴로워할 때 우리는 쾌락의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로워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과서 번역: 우리가 쾌락의 부재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에는 쾌락을 필요로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쾌락을 지복한 삶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129] 우리는 쾌락을 첫 번째로 좋은 것이자 선천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쾌락을 출발점으로 삼아 모든 선택과 기피를 행하며, 쾌락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이 감정을 기준으로 좋은 것을 모두 판정하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8-129, 김주일 외 옮김 p. 390)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에게 안부를 묻는다.
[122] 젊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미루어서도 안 되고, 늙었다고 해서 철학하는 것을 피곤해해서도 안 된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너무 이른 나이도 없고 너무 늦은 나이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을 시작할 나이가 아직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에는 아직 나이가 안 됐다거나 더 이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젊은이든 늙은이든 철학을 해야 한다. 늙어서는 지난 일들의 즐거움으로 인해[주: 또는 '지난 일들에 감사함으로써'] 좋은 것들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젊을 때는 앞으로 있을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음으로 젊음과 나이듦을 동시에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익혀야 한다. 행복이 곁에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지만, 행복이 곁에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2, 김주일 외 옮김 pp. 386-387)
- 당장의 모든 쾌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더 많은 쾌락을 가져오는 것을 계산하여 선택해야 함
# 이게 분별(phronēsis)인가?
[바로 이어서] 하지만 쾌락이 첫 번째로 좋은 것이고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모두 쾌락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쾌락들로부터 불쾌감이 더 많이 뒤따를 때 우리는 많은 쾌락들을 지나쳐 버릴 때가 있다. [교과서 번역: 쾌락은 우리에게 최우선적으로 주어진 자연적인 재화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 καὶ ἐπεὶ πρῶτον ἀγαθὸν τοῦτο καὶ σύμφυτον, διὰ τοῦτο καὶ οὐ πᾶσαν ἡδονὴν αἱρούμεθα (김주일 외 번역이 직역에 가까움)]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견디면 더 큰 쾌락이 우리에게 생길 때 우리는 많은 괴로움들이 쾌락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니 모든 쾌락은 우리에게 친숙한 본성을 갖고 있는 탓에 좋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쾌락이 선택할 만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이 나쁜 것이지만 그것들을 모두 본래부터 언제나 회피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130] 그렇지만 쾌락과 괴로움을 상호 비교 측정하여 이익과 불이익에 주목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판정해야 한다. [교과서 번역: 우리의 과제는 참을 것과 못 참을 것을 재고 구분하여 항상 모든 것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이다. / [130] τῇ μέντοι συμμετρήσει καὶ συμφερόντων καὶ ἀσυμφόρων βλέψει ταῦτα πάντα κρίνειν καθήκει / 나의 직역: 비교 측정함으로써, 그리고 유익한 것들과 유익하지 않은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 (김주일 외 번역에서는 '쾌락과 괴로움을'을 의미상 첨가한 것 같고, 교과서 번역은 이해가 안 됨... sumpherwn이 '참을 것'인가? 그리고 blepsei는 어디갔지? 다른 판본인가?)] 때때로 우리는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반대로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9-130, 김주일 외 옮김 p. 390)
8) 어떤 쾌락도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쾌락들을 산출하는 것은 쾌락들 자체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괴로움들을 가져온다. (<핵심 교설> 141, 김주일 외 역 p.396)
-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은 고통의 부재(정적 쾌락)임: "쾌락이란 몸에 괴로움도 없고 영혼에 동요도 없는 상태". 이 상태는 “평정심(평온함, ataraxia)”이라고 불리며 이는 동적 쾌락보다 우월하고,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됨.
- 동적 쾌락과 정적 쾌락: 동적 쾌락은 고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예: 음식을 먹음으로써 배고픔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고, 정적 쾌락은 고통의 부재 상태를 완전하고 안정적으로 즐기는 상태임.
그러므로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무지하거나 우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거나 오해하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처럼 방탕한 자의 쾌락을 말한다거나 관능적 향락에서 주어지는 쾌락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몸에 괴로움도 없고 영혼에 동요(ταράττεσθαι)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132] 유쾌한 삶을 낳는 것은 계속해서 술판을 벌이고 흥청거리는 데 있지 않으며, 소년이나 여인들과의 성적 교제를 즐기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생선이나 그 밖에 사치스러운 식탁의 진미를 즐기는 데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선택과 회피의 원인들을 찾아내거나 가장 큰 소동이 영혼을 장악하는 데 근거가 되는 의견들을 몰아내는 각성한 헤아림의 능력이 유쾌한 삶을 낳는 것이다. [교과서 번역: 오히려 모든 욕구와 회피의 근거를 파악하고 영혼을 회오리바람처럼 뒤흔드는 광기를 몰아내는 명료한 사고만이 쾌락적인 삶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30-131, 김주일 외 옮김 p. 391)
[136] 쾌락에 관해 에피쿠로스는 퀴레네학파와 생각을 달리한다. 퀴레네학파는 정적(靜的) 쾌락을 인정하지 않고 동적 상태의 쾌락만을 인정한다. 반면에 (...) 그런가 하면 에피쿠로스는 <선택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평정과 고통에서 벗어남이 정적 쾌락인 반면에, 기쁨과 유쾌함은 동적 활동 상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137] 더 나아가 그는 퀴레네학파와 생각을 달리한다. 그들은 신체적 괴로움이 영혼의 괴로움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과오를 범한 자들은 몸으로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괴로움을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육신은 당면한 폭풍만을 감당하지만 영혼은 지나간 것과 당면한 것과 앞으로 올 것을 모두 감당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에피쿠로스는 또한 영혼의 쾌락이 몸의 쾌락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생명체는 태어남과 동시에 쾌락에는 큰 만족감을 느끼지만 노고에는 본성적으로, 그리고 이유 없이 반발한다는 점을 증거로 들어 쾌락이 삶의 목적임을 입증한다. 따라서 우리는 느낌에 의지하여 괴로운 것을 피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136-137, pp.393-394)
3) 쾌락의 크기의 한도는 모든 괴로운 것의 제거이다. 쾌락이 있는 곳에는, 그리고 그것이 있는 동안에는 육신의 괴로움이나 마음의 고통, 또는 두 가지 것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핵심 교설>, 139, 김주일 외 옮김, p.395)
17) 정의로운 사람은 동요가 가장 적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극도의 동요로 가득 차 있다.(<핵심 교설>, 144, 김주일 외 옮김, p.398)
[146] 21) 삶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결핍으로 인한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과 전 생애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안다. 그러므로 경쟁을 포함하는 행위들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핵심 교설>, 146, 김주일 외 옮김, p.399)
26) 욕망들 가운데 충족되지 않아도 우리를 괴로움으로 이끌어가지 않는 것들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얻기가 어렵거나, 해를 가져온다고 여겨질 때는 충족의 열망이 쉽게 해소되는 욕망들이다. (<핵심 교설>, 148, 김주일 외 옮김, p.400)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은 육체적·순간적 쾌락(동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지속적 쾌락(정적 쾌락)이다. 동적 쾌락이란 어떤 행위를 하는 것 혹은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에서 오는 쾌락인 반면, 정적 쾌락은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근심의 부재로부터 귀결되는 쾌락이다. (오유석, 2016: 303)
[교과서 인용문]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쾌락은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으며 육체나 정신 또는 이들 모두에게 어떤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 경우뿐이다. (<쾌락>?)
[교과서 인용문] 쾌락은 행복한 삶의 근원이자 목표이다. 참된 쾌락과 행복은 영혼의 고요한 평정에 있다. 두려움, 욕망, 고통 등과 같은 영혼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때 바람 한 점 없는 잠잠함과 바다와 같은 고요함이 나타난다. (<쾌락>?)
[교과서 인용문] 우리에게 쾌락이란 신체 영역에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동시에 정신적 영역에서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넘칠 만큼의 음식이나 맛있는 생선 요리와 같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있는 것들이 쾌락적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욕구와 회피의 근거를 파악하고 영혼을 회오리바람처럼 뒤흔드는 광기를 몰아내는 명료한 사고만이 쾌락적인 삶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쾌락의 철학>?)
[교과서 인용문] 사치스러운 자들의 쾌락의 대상을 없애고 죽음이나 고통과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버리면, 그리고 욕구가 제한 없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고, 어떤 것으로부터도 고통이 오지 않으며, 고통이나 악[나쁜 것]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도 갖지 않게 될 것이며, 사방이 쾌락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쾌락>?)
- 공적 삶을 벗어나 은둔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 (정치 활동은 집착, 좌절, 다툼, 두려움, 분노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
14) (...) 가장 순수한 안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평온함과 은거에 의해 달성된다. (<핵심 교설> 143, 김주일 외 역 p.398)
- 우정 중시.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
27) 전 생애에 걸친 지복을 위해 지혜가 요구하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애의 획득이다. (<핵심 교설> 148, 김주일 외 역 p.400)
2) 수단적 덕 개념
- 분별, 정의, 덕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즐거운 삶을 이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를 가짐. (오직 쾌락만이 본래적 가치를 지님)
[138] 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가 덕을 선택하는 것도 쾌락 때문이지 덕 자체 때문은 아니다. 의술을 택하는 이유가 건강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 또 에피쿠로스는 덕만큼은 쾌락에서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밖의 것, 이를테면 음식은 쾌락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2』 138, pp.394-395)
이 모든 것들의 출발점이자 가장 큰 선은 분별[사려 깊음, phronēsis]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은 철학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며, 분별로부터 나머지 모든 덕들이 자라난 것이다. 분별 있게, 훌륭하게 그리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는 유쾌하게 살 수 없으며, 유쾌하게 살지 않고서는 분별 있게, 훌륭하게 그리고 정의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별이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덕은 유쾌하게 사는 것과 함께 자랐으며, 유쾌한 삶은 이것들과 떨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32, 김주일 외 옮김 p. 391-392)
5) 분별 있게, 그리고 훌륭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는 사람은 유쾌하게 살 수 없고, 유쾌하게 살지 않는 사람은 분별 있게, 그리고 훌륭하고 정의롭게 살 수 없다. (<핵심 교설> 140, 김주일 외 역 p.396)
[교과서 인용문] 사려 깊고 고상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고서 사려 깊고 고상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덕은 본성적으로 즐거운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즐거운 사람은 덕과 분리될 수 없다. (<쾌락>?)
[교과서 인용문] 아름다움과 덕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쾌락> ?)
- 정의는 서로 해치지 말자는 합의로서, 고통을 피하기 위한 사람들 간의 계약이지 그 자체로 본래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님.
- 우리가 불의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불의하게 행동한다면 이런 행위가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 채 처벌의 가능성으로 인해 고통받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정당하게 처우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이로써 우리의 삶은 더 평안해질 것이다. (오유석, 2016: 307)
31) 자연의 정의는 서로 해를 끼치지도 않고 해를 입지도 않도록 상호 이익을 보증하는 것이다.
32) 동물들 가운데 해를 끼치지도 않고 해를 입지도 않기 위한 계약을 맺을 능력이 없었던 것들에게는 정의도 없었고 불의도 없었다. 사람의 종족들 가운데 해를 끼치지도 않고 해를 입지도 않기 위한 계약을 맺을 능력이 없었거나 그럴 의지가 없었던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33) 정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언제 어떤 곳에서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할 때 해를 끼치지도 않고 해를 입지도 않기 위한 일종의 계약이다.
34) 불의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와 같은 불의를 처벌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의 눈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에 따른 두려움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핵심 교설> 150-151, 김주일 외 역 pp.400-401)
36)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교류할 때 이익이 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의 특수성이나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한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같은 것이 정의로운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핵심 교설> 151, 김주일 외 역 p.401)
38) 주변 상황에 새로운 변화가 없었음에도 정의롭다고 여겨졌던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지각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을 경우에, 그 행위는 정의롭지 않다. 다른 한편, 상황이 새롭게 바뀌어 정의롭다고 규정되던 같은 행위가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 경우에, 그 행위는 시민들 간의 상호 교류에 이익이 되었을 때는 정의로운 것이었지만, 나중에 이익이 되지 않을 때는 더 이상 정의롭지 않은 것이다. (<핵심 교설> 153, 김주일 외 역 p.402)
3) 욕구의 세 종류와 자족
- 욕구에는 세 종류가 있음: (1)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예: 식욕), (2)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는 않은 욕구(예: 성욕), (3)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헛된 욕구(예: 화려한 옷에 대한 욕구, 명예욕)
욕망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고 어떤 것들은 근거 없는 것들임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필수적인 것이고 어떤 것들은 단순히 자연적인 것에 불과하며, 필수적인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몸의 평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어떤 것들은 삶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메노이케스에게 보내는 편지> 127, 김주일 외 역 p.389)
14) 자연이 요구하는 부(富)는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쉽게 얻어진다. 그러나 헛된 의견들이 요구하는 부는 무한정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핵심 교설> 144, 김주일 외 역 p.398) (교과서 번역: 자연의 순리가 요구하는 재산의 양은 제한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갈망으로 말미암아 추구하는 재산은 어마어마하다.)
29) 욕망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자 필수적인 것이지만, 어떤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면서도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것들은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필수적인 것도 아니며 근거 없는 의견으로(κενὴν δόξαν, 헛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30) 자연적이지만 충족되지 않아도 괴로움으로 이끌어가지 않는 욕망들 중에 열의가 강렬한 것들은 근거 없는 의견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며, 그것들이 완화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근거 없는 의견 때문이다. (<핵심 교설> 149, 김주일 외 역 p.400) ♥
[교과서 인용문] 가장 적은 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쾌락> ?)
[교과서 인용문] 충분한 것을 적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다. (<쾌락> ?)
- 삶을 단순화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
또한 우리는 자족을 큰 선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적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것을 가지지 않을 경우에 적은 것으로 만족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치를 가장 적게 필요로 하는 자들이 가장 즐겁게 사치를 누린다는 것을, 그리고 자연적인 것은 모두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쓸모없는 것은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신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일단 결핍에 따른 괴로움이 제거될 경우에는 간소한 식사가 사치스러운 식사와 똑같은 쾌락을 가져다준다. [131] 보리빵과 물도 결핍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공급해 주면 최상의 쾌락을 돌려준다. 그러므로 단순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식사에 익숙해지는 것은 건강을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필수 요건들에 주저 없이 대응할 수 있게 해주며, 우리가 오랜만에 사치스러운 성찬에 접했을 때 우리를 더 나은 상태에서 그것을 즐기게 하고, 운명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만들어 준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30-131, 김주일 외 옮김 p. 390-391)
[교과서 인용문] 자족(自足)의 가장 큰 열매는 자유이다.
[교과서 본문] 그는 "육체는 항상 무한한 쾌락을 요구하지만, 지성은 그것에 뒤따르는 불편을 고려하여 욕망을 제한한다."라고 하며, 참된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가 권장하는 욕망의 충족으로서 쾌락이란 바로 첫 번째 욕망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을 부유하게 하려면 그에게 더 많은 재물을 주기보다는 그의 욕망을 줄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씨마스 윤리와사상)
# 실행하기: 헛된 욕망 포기하니 좋더라고 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자...
# 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사실 역사적 혼란기의 '생존 철학'에 어울리는 소박한 목표가 아니라 심오한 정신 상태로의 진입을 요구하는 듯? (cf. 불교)
# cf. 루소. 자연적이지 않고 사회로부터 유래한 정념들, 악...
4) 죽음, 운명, 신에 대한 두려움
- 자연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신과 죽음 등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함임. 죽음, 운명, 신들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는데, 그런 두려움의 근원은 잘못된 믿음이며, 사물의 본성을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
- 우리는 죽은 다음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죽음은 감각 능력의 소멸이므로, 죽으면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삶의 유일한 악은 고통이므로, 어떤 사건이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죽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모두 감각에 달려 있지만, 죽음은 감각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올바른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죽게 되어 있는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삶에 대한 무한한 시간을 부여함으로써가 아니라, 불사에 대한 동경을 제거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살아 있지 않은 상태에는 두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삶에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임했을 때 그것이 고통을 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고 닥쳐올 죽음이 고통을 주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로 닥쳤음에도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미리 예상함으로써 괴로워하는 것은 근거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에게 나쁜 것들 중에서 가장 전율할 만한 것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우리 곁에 와 있지 않고, 죽음이 우리 곁에 와 있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과도 관계가 없고 죽은 자들과도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은 자들은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4, 김주일 외 역 p.388)
2)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 교설> 139, 김주일 외 역 p.395)
11) 천체현상에 대한 우려나, 혹은 그것이 우리와 뭔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죽음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괴로움이나 욕망의 한계를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자연에 대한 연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12) 전 우주의 본성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신화에 근거한 설명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두려움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연구 없이는 쾌락을 순수한 상태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13) 우리의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땅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무한한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 일반에 관해 우리가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안전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핵심 교설> 142-143, 김주일 외 역 p.397)
[교과서 인용문] 많은 사람이 때로는 죽음을 가장 큰 악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다른 때에는 죽음이 인생의 악들을 중지시켜 준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열망한다. 반면에 현자(賢者)는 삶을 도피하려고 하지 않으며, 삶의 중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삶이 그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부재가 어떤 악으로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단순히 길기만 한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 (<쾌락> ?)
- 신들은 지극히 행복하고 불멸하는 존재인데, 인간사에 관심을 갖거나 개입하는 것은 신의 그런 속성과 모순된다. 따라서 우리는 신들의 분노나 처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1) 복되고 불멸하는 것은 자신이 문젯거리를 갖지도 않고 다른 것에 그것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분노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호의에 이끌리지도 않는다. 그런 일은 허약한 자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 교설> 139, 김주일 외 역 p.395)
[123] 그러므로 내가 자네에게 끊임없이 지시했던 것들을 훌륭한 삶의 원리로 견지하고서 그것들을 실천하고 익히도록 하게. 먼저 신에 대한 공통 관념[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이 시사해 주는 대로 신은 불멸이며 살아 있는 지복의 존재라고 믿고, 신의 불멸성과 무관한 것을 신에게 돌려서도 안 되고, 지복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신에게 돌려서도 안 된다. 신에 관해서는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믿도록 하게. 신들은 존재하며, 그들에 관한 인식은 명증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신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들에 대해 일관된 믿음을 견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믿는 신들을 부정하는 자가 불경한 것이 아니고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들을 신들에게 가져다 붙이는 자가 불경한 것이다. [124] 왜냐하면 신들에 관한 대다수 사람들의 언명들은 지각(prolēpsis)들이 아니고 거짓된 추정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짓된 추정에 따르면, 나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해악이 주어지고 좋은 사람들에게는 신들로부터 가장 큰 유익이 주어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은[주: 문맥상 신들이라고 봐도 될 듯] 자신들 고유의 덕목들에 언제나 친숙한 까닭에 자신들과 닮은 자들은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낯선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3-124, 김주일 외 역 pp.387-388)
더욱이, 천체들의 운행과 회귀, 식(蝕)과 뜨고 짐, 그리고 이런 것들에 이어지는 일련의 현상들이, 불멸과 동시에 만복을 누리는 어떤 존재가 그것들을 보살피고, 현재나 미래에 지시함으로써, 일어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77] (왜냐하면 수고, 걱정, 분노, 호의는 복된 존재와 양립하지 않으며, 이런 것들은 오히려 허약함과 두려움, 그리고 이웃들에 대한 의존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뭉쳐진 불덩어리가 지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 운동들을 취한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관념들에 적용되는 모든 용어들 속에 온전한 존엄성을 보존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 용어들로부터 이 존엄성과 모순된 어떤 의견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모순성 자체가 영혼들 속에 가장 큰 동요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생겨날 때, 처음에 밀집한 원자들이 방해받는 일이 일어남에 따라 이 필연적 회전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78]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들에 관한 원인을 정확힣 아는 것이 자연학의 일이라고 믿어야 한다. 행복은 여기에 있으며, 이 천체현상들에서 관찰되는 본성들이 무엇인지 알고 이것[주: 행복]을 위한 정확한 앎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을 아는 데 행복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더욱이, 이처럼 가장 중요한 것들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기거나 뭔가 다른 상태로 있을 수 있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며, 불멸적이고 지복적인 본성 속에는 언쟁과 분란을 시사하는 어떤 것도 무조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도 행복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무조건 그러하다는 것을 사유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76-78, 김주일 외 역 pp.364-365)
[81] 이 모든 것들 일반에 덧붙여, 인간의 영혼에 가장 영향력이 큰 동요가 생기는 것은 천체들이 복되고 불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이와 모순되는 의지나 행위나 원인들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신화들로 인해서, 또는 죽은 상태의 무감각함 자체가 마치 자신들과 관계가 있기라도 한 듯이 두려워함에 따라, 영원히 계속되는 어떤 고통을 예상하거나 우려하는 데서 생기기도 하며, 의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합리한 어떤 표상작용에 의해 그런 심리 상태를 겪는 데서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규정하기 않기 때문에 의견에 의지하여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만큼의 동요를 겪거나 그보다 더 강력한 동요를 겪는다. [82] 그러나 평정(ataraxia)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일반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을 가지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81-82, 김주일 외 역 pp.366-367)
# 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두렵게 하는 다른 어떤 불합리한 생각들에 관련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말. 일반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을 가지기!
- 운명
[133] 도대체 이런 사람보다 우월한 자가 누구라고 자네는 생각하는가? 신들에 대해 경건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자연이 정한 목적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보다 말일세. 이 사람은 좋은 것들의 한계는 쉽게 충족되고 쉽게 달성될 수 있지만 나쁜 것들의 지속 시간과 힘듦은 짧고 가볍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며, 일부의 사람들이 만물의 군주로 도입하는 운명을 비웃는다. ... 그는 어떤 것들은 필연에 의해 발생하고 어떤 것들은 우연에 의해 발생하며 어떤 것들은 우리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필연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우연은 불안정한 것인 반면에, 우리의 능력 내에 있는 것은 지배받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본래부터 비난도 뒤따를 수 있고 그 반대의 것(칭찬)도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134] [자연철학자들이 말하는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따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는 신들을 공겸함으로써 기도가 받아들여진다는 희망을 시사하지만, 운명은 기도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분별 있는 자는 많은 사람들이 믿듯이 우연을 신으로 여기지도 않으며 [신의 행위에는 무질서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연을 모든 것의 불확실한 원인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지복의 삶을 위해서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우연에 의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대단히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의 출발점이 우연에 의해 제공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135] 이성적으로 행동하면서 불운한 것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행운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행위를 함에 있어서 훌륭하게 판단했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쪽이 잘못 판단했는데 우연으로 인해 성공하는 쪽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위의 가르침과 이런 종류의 가르침들을 밤낮으로 익히도록 하게. 자네 혼자도 하고 자네와 비슷한 자와 같이도 하게. 그렇게 하면 자네는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결코 영혼이 동요하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신처럼 살게 될 것이네. 왜냐하면 불사하는 좋은 것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죽어야 할 생명들과는 닮은 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33-135(끝부분), 김주일 외 역 p.391-393)
#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의 구분은 스토아의 전유물이 아님.
# 쾌락주의라고 해서 의도를 무시하고 결과만 고려하는 것이 아님. 쾌락주의가 결과주의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쾌락이라는 결과를 불러오겠다는 의도'가 중요하다는 것인가? 결과주의와 동기주의를 나누기 어렵고, 어떤 동기주의도 일종의 결과주의이고, 어떤 결과주의도 일종의 동기주의가 아닌지... 나중에 생각 정리하기.
5) 원자론
(가) 원자 가설
(오유석, 2016: 292, <헤로도토스의 편지> 39~44)
- 모든 물체는 분할 불가능하고 불변하며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모양을 한 미세한 물체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음
-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 존재하는 것의 총체는 물체와 허공뿐이다. 물체들 중 어떤 것은 결합체이며, 다른 것은 결합체의 구성 요소, 즉 원자들이다.
- 원자의 개수와 허공의 크기는 무한하다.
- 허공의 무한한 크기 때문에 원자들은 영원히 움직인다.
모든 것은 <물체들과 장소>이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39, 김주일 외 역 p.342)
나아가, 물체들 중에 어떤 것들은 복합체고 어떤 것들은 복합체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후자는 나눌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것들이다. [41]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 무(無)로 돌아가지 않고, 복합체들이 분해될 때 강하게 견디면서 남아 있으려면 말이다. 그것은 견고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어느 지점에서도, 또는 어떤 방식으로도 분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초가 되는 것들은 나눌 수 없는 물체적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우주는 무한하다. (...)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40-41, 김주일 외 역 p.343)
(나) 원자의 빗나감(이탈)
- 원자들은 그 무게 때문에 자연적으로 아래로 떨어지며, 동일한 속도로 허공 속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약간의 빗나감으로 인해 최초 운동이 발생하고, 원자들이 서로 충돌하고 결합체들이 생성될 수 있었다.
- 원자들의 빗나감은 인간의 자발적 또는 의도적 행동의 가능성에 대한 근거로 사용됨. (그런데 구체적으로 빗나감과 자발적 행위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움)
- 의의: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운 동시에 물리적 인과의 지배를 받는 자연 세계의 일부일 수 있을지 설명하려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
- 데모크리토스의 초기 원자론과의 결정적인 차이점.
6) 감각과 인식
- 감각과 선개념(prolēpsis)을 탐구의 출발점으로서 확립: 진리 판단의 기준이자 탐구의 출발점은 감각 경험의 명증성임. & 선개념: 감각 증거뿐 아니라 축적된 감각 경험에 대한 기억이며 탐구의 앞서서 파악된 개념
# 엇 김주일 외 번역에선 프롤렙시스를 감각이라고 번역하던데... 어떻게 되는 거지
- 외부 대상으로부터 쉼 없이 분리되어 나오는 필름처럼 얇은 겉껍질(모상, eidolon 또는 typos 영상)이 감각기관에 충돌할 때 우리는 대상을 감각한다. (모든 감각이 참이라는 것을, 감각의 수동성을 강조함으로써 정당화함)
- 생각은 외부 대상에서 생겨난 더욱 미세한 원자들이 감각 기관을 거치지 않고 정신에 직접 스며들어서 사고의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결과임.
- 느낌은 육체와 정신 모두에 일으키는 운동으로, 외부로부터의 운동이 신체에 가하는 운동에 의해 또는 그 자체 운동인 생각들에 의해 발생함.
- 영혼은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서, 매우 미세하고, 매끈하고, 둥글며, 작으며 빠르게 움직이는 원자들로 구성됨.
- 확증을 요하는 대상(예: 기둥이 멀리서 둥글게 보일 때, 그 기둥이 실제로 둥근지 아니면 사실은 네모난지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야 함)과 확증 불가능한 것(예: 200만 광년 떨어진 별의 모습 혹은 원자의 존재 여부)에 대한 탐구: 둘에 대한 추론 모두의 표지로서 감각과 느낌을 사용해야 함. 확증 불가능한 대상이 감각적 증거에 비추어 반증되지 않는다면 참인 것으로 인정되는 반면 반증된다면 거짓으로 인정됨.
7) 에피쿠로스주의의 문제점
- 쾌락주의에 내재한 핵심 문제: 쾌락과 고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쾌락이 고통이 없는 상태고, 쾌락과 고통은 서로 반대라면, 쾌락이 없는 상태는 고통이어야 한다. 반면 우리의 경험상 쾌락이 없을 때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 쾌락과 고통은 감각적 쾌락과 고통에 한정되지 않는다. e.g. 셰익스피어나 모차르트를 감상할 때 느끼는 즐거움은 특정한 감각이 아님
- 만약 쾌락과 고통을 구체적인 감각과 동일시할 수 없다면, 에피쿠로스는 단지 쾌락을 우리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과 동일시하고 고통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모든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가 즐기는 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피하는 것을 피한다는 동어반복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고통과 쾌락에 대한 더 분명하고 구체적인 정의가 없다면 에피쿠로스주의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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