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서양윤리

서양윤리 (6) 중세 a. 아우구스티누스

neon_eidos 2023. 7. 15. 21:14

Arrington, R. L. (1998). Western ethics: An historical introduction. Blackwell Publishers.
김병찬(2022). 『중등임용 시험대비 서양·동양·한국윤리』. 에프엠.

 

* 아벨라르두스, 둔스 스코투스, 오컴은 애링턴에 있지만 김병찬에는 없어서 생략.

아벨라르두스 : 행위 자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며, 죄는 행위의 의도로부터 생겨난다. 더 구체적으로, 죄는 잘못된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의지 또는 욕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승인에서 성립한다. 자발적인 행위는 우리의 이차의지에 부합하는 행위다.

 

# 애링턴 읽다 보니 정든다. 근엄하고 올드한 느낌의 개론서. 분명 괜찮은 책이긴 한데, 입문용으로 추천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전공자에게 추천하고 싶지도 않고... 빨리 한바퀴 끝내고 다른 더 싱싱한(?) 개론서들로 보충하고 싶다.

 

1. 최고선과 사랑의 질서

1) 인간의 최고선과 행복

- 모든 인간은 행복목적으로 지향함. 행복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또한 소유하는 것임.

- 행복은 최고선을 향유하는 것임. 인간의 최고선은 인간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 우월한 것이어야 함. 영원하고 불변하는 선인 이 인간의 최고선임. 따라서 참된 행복은 인간의 최고선인 신을 사랑하고 또한 소유하는 것. 신을 온 마음, 온 영혼, 온 정신을 다해 사랑해야 함.

- "플라톤이 완전한 실재로 상정했던 선의 이데아를 신으로 대체하였다. 그에게 신은 완전한 실재성을 지닌 영원불변하는 존재로, 최고의 선이다."(비상)

- 행복은 오직 신앙으로 가능함: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자유 의지만으로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데 한계가 있다. 인간은 원죄와 같은 타락한 본성을 일부 지니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선한 의지를 완전하게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 신의 사랑과 은총이 깃들 때에 비로소 원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 신과의 실존적 만남을 통해 신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신에 귀의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비상)

 

(from 지문라이브러리: 인간의 행복은 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 신의 향유, 그리고 신과의 합일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 우리는 신의 은총을 통해 지상의 나라에서 벗어나 신의 나라로 갈 수 있다.)

만일 신이 인간의 최고선이라 한다면, 그 최고선을 구하는 것이 잘 사는 일이므로, 잘 산다는 것은 분명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신을 사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습속과 마니교의 습속』) (?)

여기에 자연 철학이 있다. 왜냐하면 만물의 모든 원인은 창조자인 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윤리학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인 신과 이웃을 타당한 방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선하고 올바른 삶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편지 주해』) (?) 

나는 플라톤 학파의 책을 읽고 무형의 진리를 탐구하였고, 신이 만든 눈에 보이는 만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영혼의 어둠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을 가까스로 느끼고 알게 되었다. 신이 참으로 실재하며 항상 동일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고백록』) (?)

행복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갖지 못한 사람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해를 입는 사람 또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그것이 완전하게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붙여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마니교와 도나투스파에 대한 반박) (in  애링턴)

행복이 더는 선할 수 없는, 가장 선한 것으로 구성된다면 우리는 이를 최고선이라고 부르는데, 최고선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지닌 모든 선한 것들의 완전함, 그리고 우리의 완전한 선은 바로 신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들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추구해야만 할 것이며, 이것에 맞추어 우리의 모든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한다. (『마니교와 도나투스파에 대한 반박』) (?)

 

2) 존재의 위계와 사랑의 질서

- 이란 좋은 사랑, 즉 잘 질서 지워진 사랑 또는 존재의 위계 질서에 따르는 사랑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으며, 이를 구현할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의 4주덕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재해석하면서, 사랑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이요, 모든 덕의 원천이라고 설명하였다."(비상)

- 존재의 위계: 존재하는 것들은 실재성과 완벽성에 따라 위계가 나뉨: (1) 은 완벽한 실재성을 가짐. 영원 불변하기 때문에 가장 우월한 존재임. (2) 물질적 세계는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가장 덜한 실재성을 가지며, 끊임없이 생성, 소멸 변화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열등함. (3)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물질성과 영성을 모두 가지고 있음. 소멸하는 육체와 불사하는 영혼을 갖기 때문에 존재의 척도에서 중간 위치를 차지함.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은 열등한 물질적인 것들을 사랑하며, 영혼으로서 인간은 더 높은 것들과 완전한 존재인 신을 사랑할 수 있음.

- "신을 향하는 선한 의지는 물질보다 인간을, 인간의 육체보다는 영혼을, 인간의 영혼보다는 신을 사랑하는 의지이다. 반면에 악한 의지는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보다 열등한 것을 사랑하는 의지이다. 그는 인간이 물질과 육체에 탐닉하면서 도덕적 악이 발생하고, 그 대가로 인간의 영혼은 좌절과 고통을 겪게 된다고 보았다."(비상)

- 영원한 것을 사랑해야 항상 만족할 수 있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을 사랑하면 항상 불만족할 것임. 따라서 육체보다는 영혼을, 물질적인 것들보다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 합리적임. 불변하고 안정적인 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도 안정성을 얻을 수 있음.

- 사랑의 질서의 왜곡: 그러나 우리는 정신적 삶보다 물질적 대상을 사랑하고, 신보다 자신을 사랑함. 이러한 사랑의 질서의 왜곡이 바로 죄. 죄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더 완벽한 대상으로부터 더 열등한 대상으로 돌리는 것이고, 이것이 세상의 악의 근원임.

- 향유할 대상과 사용할 대상을 구분해야 함: 향유대상을 그 자체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사용다른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사랑하는 것.

- 사랑이 핵심적...

물은 위로, 돌은 아래로 향한다. 저마다 자기의 무게로 움직이고, 제자리를 향한다. 물속에 부은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부은 물은 기름 밑으로 가라앉는다. 모든 것은 자기의 무게로 인해 제자리를 향한다. 질서를 벗어나면 불안정해지고, 질서가 고요하게 한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다. 나는 그것에 의해 어디서나 그것이 가는 곳으로 옮겨간다(고백록 13권 9장).
   (ponderibus suis aguntur, loca sua petunt. minus ordinata inquieta sunt: ordinantur et quiescunt. pondus meum amor meus; eo feror, quocumque feror. dono tuo accendimur et susrum ferimur; inardescimus et imus.)
   (... They are acted on by their respective densities, they seek restless. Once they are in their ordered position, they are at rest. My weight is my love. Wherever I am carried, my love is carrying me. By your gift we are set on fire and carried upwards: we grow red hot and ascend. - trans. Chadwick, 1991.)
# 이 구절 좋아서 출처 및 원문 찾아봄(김병찬 교재에는 인용문 출처가 없고, 심지어 원문에 없는 말을 마음대로 추가해놓아서 어디까지가 원문인지 알 수 없음). 고백록 읽고 싶다... 사랑에 이끌려 마치 필연처럼 끈질기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제자리를 찾았을 때 비로소 안식을 찾는 것이 잘 시각화된 듯.

그대의 사랑을 정화시키십시오. 세상을 향해 지녀온 그대의 사랑을 세상의 창조주를 향하여 돌리십시오. 만일 그대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풀 죽고 생명력을 잃어 진절머리 나는 비참한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그대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조심하십시오. 신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 곧 이 세속을 사랑하는 것을 탐욕이라 합니다. 탐욕은 누르고 사랑은 일깨우십시오.
# 이건 어디 있는지 못 찾음 ㅜㅜ

그 누구도 진정한 경건 없이는, 즉 진정한 신에 대한 참된 경배 없이는 진정한 덕을 지닐 수 없다. (신국론) (?)

 

플라톤주의자들의 명성과 영예는 다른 철학자들보다 더 찬양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어떠한 형체도 신(神)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을 추구할 때 모든 물질적인 대상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가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최고신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최고신을 추구할 때 모든 가변적인 영혼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 그 자신은 창조되지 않았으나 만물을 창조한 신 안에 만물의 근원[idea]이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신국론』) (?) 

 

- 덕의 종류  (from 지문라이브러리:  용기, 지혜, 절제, 정의와 같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덕은 최고의 덕인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덕의 다른 측면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신에 도달하게 되고 결국 행복에 이르게 된다.) 

절제는 신을 위해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랑이며, 용기는 모든 것을 신을 위해 쉽게 인내하는 사랑이며, 정의는 오직 신만을 섬기며 이것 때문에 인간에게 복속된 다른 모든 것을 잘 다스리는 사랑이며, 지혜는 신께 도움이되는 것과 방해가 될 수 있는 것을 잘 분간하는 사랑이다. (『가톨릭교회의 관습과 마니교도의 관습』) (?)

절제란 온전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게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는 사랑이다. 용기란 사랑해야 할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참아 내는 사랑이다. 정의는 사랑받아야 할 존재만을 사랑함으로써 바른 다스림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랑이다. 지혜란 온전한 사랑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것과 도움이 되는 것을 지혜롭게 분별해 내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을 받을 존재는 최고선이며 최고의 지혜이며 완전함 그 자체인 신뿐이다.(『가톨릭 교회의 도덕에 관하여』) (?)
 =? 절제란 자신을 완전히 신에게 바치는 사랑이고, 용기란 신을 위해 모든 고통을 참아내는 사랑이며, 지혜란 신을 지향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랑이고, 정의란 오직 신만을 섬기며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것들을 잘 통치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로 하여금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것이 덕이라면, 나는 이 모든 덕들이 신에 대한 가장 고귀한 사랑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주덕이라는 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에 따라 이름 붙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의 도덕에 관하여』 15:25)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지혜, 용기, 절제의 덕도 진정으로 지닐 수 없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3) 평화

-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함. 평화를 깨는 사람도 더 나은 평화를 바라는 것이고, 사악한 사람들도 자신들 사이에서는 평화롭기를 원함.

- 평화란 질서가 세워짐으로써 달성됨. 사악한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을 지배함으로써 만들어낸 평화는 우주의 자연적 질서를 왜곡하는 부정의한 평화이고, 신의 정의로운 평화는 자연적 질서에 따르는 것임. 진정으로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평화는 신이 창조한 질서가 보존될 때 실현됨. 이러한 평화는 우리의 사랑이 대상의 위계에 맞게 질서 지워져 있을 때 생겨남. 신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물질적 대상은 영혼보다 덜 사랑해야 함. 이렇게 우리의 사랑을 질서 지움으로써 우리는 개인의 영혼 안에서, 인간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신과의 관계에서 조화를 실현하고, 이러한 조화가 완벽한 평정이며 진정한 행복임.

육체의 평화는 각 부분들이 적절한 비율에 맞게 배열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비이성적인 영혼의 평화는 욕구들이 조화롭게 평정을 이룸으로써 얻어지고 이성적인 영혼의 평화는 지식과 행위의 조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육체와 영혼의 평화는 살아있는 존재인 인간의 잘 질서 잡힌, 조화로운 삶과 건강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평화는 영원법에 대한 신앙에 대한 잘 질서 잡힌 충실함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는 잘 질서 잡힌 화합이다. ... 천상의 나라에서의 평화는 신에 대한, 그리고 신 안에서 서로에 대한 완벽한 조화와 질서를 갖춘 향유이다. (City of God, ed. Oates, Book XIX, chapter 1311i, 488면; 애링턴, 김성호 역, 212) 

 

4) 두 나라

- 사랑의 대상에 따라 두 나라가 형성됨: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지상의 국가'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천상의 국가'

두 종류의 사랑에 의해서 두 종류의 국가가 형성된다. 지상의 국가는 자신을 사랑하고 심지어 신을 경멸함으로써, 천상의 국가는 신을 사랑하고 심지어 자신조차도 경멸함으로써 형성된다. 전자는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찾으며 후자는 신으로부터 영광을 찾는데, 후자가 훨씬 더 위대한 영광이라는 점은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는 바이다. (신국론 14권 28장)

신을 열망하는 것은 최고의 행복(至福)을 바라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지상의 국가는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형성되지만, 천상의 국가는 신을 사랑함으로써 형성된다. (?) 

 

- 이 생에서 인간들은 두 나라에 모두 속해 있음. 두 국가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타락에 맞서 싸워야 함. 역사 속에서 두 나라는 대결하고 구성원을 끌어들이려 노력함. 심판의 날에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에 따라 지옥이나 천국에 가게 됨.  (인간 삶의 모든 역사는 신의 국가의 승리로 귀결됨.(?))

 

2. 도덕 법칙

- 신의 법영원법(lex aeterna)과 인간들이 자신들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세속법(lex temporalis)을 구분함.

- 모든 인간은 이성적 영혼을 가지기 때문에 영원법을 알 수 있고, 이것이 도덕 법칙임. 영원법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임. 이성적 영혼을 통해 도덕 법칙을 인지하는 것은 바로 양심을 통해 그것을 인지하는 것임.

- 도덕 법칙들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함.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우리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음. “법칙은 은총을 찾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고, 은총은 법칙이 완수될 수 있도록 주어졌다.” 신이 우리 정신에 빛을 비춰주고, 양심에 도덕법칙의 내용을 새겨줌. (조명설: 인간 정신은 불완전하므로 자신으로부터 완전한 진리를 이끌어낼 수 없음. 진리에 대한 인식은 '신의 빛' 내지 은총을 통해 얻어짐.) 

- 도덕 법칙첫 번째로 신을 사랑할 것을 규정함. 또한 사랑의 질서, 즉 사물의 자연적 질서 속에서 각 대상의 위치에 알맞는 순서와 정도에 따라 대상들을 사랑할 것을 규정함. 올바르게 질서 지워진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고, 행복함.

-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흔히 열등한 대상들에 대한 사랑에 현혹되어 도덕 법칙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월한 것 대신 열등한 것들을 사랑하며 악덕의 삶을 삼. “올바른 의지는 올바른 것을 향한 사랑이며, 그릇된 의지는 잘못된 것을 향한 사랑이다.”(신국론 14권 27장). 이러한 의지의 왜곡의 근원임. 의지의 왜곡은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의 변절을 통해 세상에 악을 발생시키고,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 악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의 악한 행위에 대한 신의 처벌은 정당하다.

 

3. 악의 문제와 자유의지

1)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

- 악의 문제: 전지·전능·전선한 신이 창조한 세계에 어떻게 악이 있을 수 있는가?

-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 악은 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 단지 완전한 실재성의 결여. 비유하자면 신은 빛이고, 피조물은 어둠이다. 어둠은 단지 빛의 결여다. 악은 신이 창조한 인간 본성의 적극적인 특성이 아니라, 인간이 무로부터 창조된 불완전한 피조물이라는 데서 기인하는 결여다. (애링턴 131: 예컨대 신이 인간을 본성적으로 폭력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면, 이런 속성에서 나오는 악은 신의 책임이었을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완전한 신과 비교하여 불완전한 존재이다. ... 이러한 존재의 불완전성에서 선의 결핍으로서의 자연적 악이 생겨난다"(비상)

- "자연적 악과 달리 도덕적 악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남용한 결과로 생겨난다"(비상): 인간은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며, 악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신은 인간에게 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고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기 선택에 의해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고, 그리하여 죄와 악이 생겨난다. 도덕적 악의 근원은 악한 의지, 즉 인간의 의지가 존재와 사랑의 질서에 반하여 저급한 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데 있다.

 

2) 자유의지에 근거한 변신론에 대한 비판

- 이처럼 인간의 자유의지에 호소함으로써 악의 문제에 대응하는 논변은 많은 비판을 받음: (1) 자연재해를 비롯한 이 세상의 많은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 세상에 악이 어느정도 있는 것이 불가피하더라도, 왜 이렇게나 많이 있어야 하는가? 신은 인간이 좀더 선한 성향을 갖도록 창조할 수 없었는가? 

 

3)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 옹호

- 아우구스티누스가 씨름한 문제: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미래에 인간이 할 모든 행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와 양립 가능한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들의 본성과 이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행위는 신의 책임이 아닌가? 그리고 신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인간은 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행위할 수 있을 뿐이며 달리 행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 신은 인간을 창조했지만,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창조했다. 그리고 신은 인간이 죄를 저지르리라는 것을 포함하여 앞으로 할 모든 행위를 알고 있지만, 자유롭게 그렇게 할 것을 알고 있다.

 

4. 지혜

- 진리를 소유하는 것신을 소유하는 것이고, 신을 향유하는 것임.

-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상한 감각 세계에 대한 앎지식(scientia)를 얻는 이성을 열등한 이성으로, 영원한 예지 세계를 대상으로 관조함으로써 지혜(sapientia)를 얻는 이성을 우월한 이성으로 봄. 신에 대한 앎은 지혜임.

-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 신을 사랑할 때 인간의 이성은 우월한 이성으로 전환되고 진리를 인식하고 지혜를 소유하게 된다. 이처럼 지혜를 가지려면 우선 의지가 신을 향해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우리는 이성으로 진리를 발견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서의 권위가 필요하므로, 당신은 모든 곳에서 그러한 탁월한 권위를 성서에 주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통해 당신을 믿고 찾도록 한다고 나는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을 뜨겁게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신을 알게 된다. - 『삼위일체론』" (?) 

영원한 사물에 대한 정신적 인식은 지혜에 속하며, 무상한 사물에 대한 합리적 인식은 지식에 속한다. 그리고 전자가 후자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에 관한 것들에 대한 인식은 지혜라 부르고, 사람에 관한 것들에 대한 인식은 지식이라고 부른다. (『삼위일체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