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서양윤리

서양윤리 (3) 아리스토텔레스

neon_eidos 2023. 7. 9. 13:47

Arrington, R. L. (1998). Western ethics: An historical introduction. Blackwell Publishers. 

아리스토텔레스,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역(2011). 니코마코스 윤리학. 길. 

김병찬(2022). 중등임용 시험대비 서양·동양·한국윤리. 에프엠.

묵상거리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하는 게 그런 사람처럼 행위하는 것인가? 나 자신에게 이것이 분명하지 않다.
  “바람(boulēsis)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에[wishes are invisible] 실제로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자 했다고 변명한다.”(10권 8장 1178a30-32)

 

1. 최고선과 행복(1권)

1) 목적론적 세계관

- 목적론적 세계관: 세계와 인간 행위 일체가 목적을 추구한다고 봄 (물리적 인과로 이해하는 기계론적 입장과 대비)

- “모든 기예와 탐구,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1권 1장 1094a)

 

2) 목적의 위계와 최고선의 존재

- 도구적 목적과 본래적 목적의 구별: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들 또는 선들 중 어떤 것들은 상위의 다른 어떤 선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e.g. 수술), 어떤 것들은 본래적 가치를 지니는 것, 즉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다(e.g. 건강).

- 궁극 목적(최고선):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하여 추구하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추구하지는 않는 목적, 더 나아가 우리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목적들을 추구하는 그러한 목적

- 궁극 목적이 없다면, 목적의 무한 퇴행이 발생하여 모든 욕구가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 됨: “우리가 모든 것을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무한히 나아갈 것이며, 그 결과 우리의 욕구는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1권 2장 1094a20, 강상진 외 역)

- 궁극 목적 즉 최고선이 행복이라는 것, 그리고 행복은 '잘 사는 것'과 '잘 행위하는 것'과 같다는 데는 모든 사람이 동의함(1권 4장 1095a18-19).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을 인간 번영, 행복, 인간 본성의 실현의 문제로 보며, 이는 칸트적 도덕과 대비) 그런데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림.

 

3) 행복에 대한 다양한 의견

-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이고 이런 삶을 선택하는 것은 노예적이라고 봄

- 교양 있는 사람들은 명예를 선택한다. 하지만 (1) "명예는 우리가 추구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인 것 같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사람보다 수여하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좋음은 고유한 어떤 것으로서 쉽게 우리에게서 떼어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1권 5장 1095b25-27) (2) "게다가 사람들이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이다. ... 따라서 적어도 이들에게는 탁월성이 명예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1권 5장 1095b28-31) 

- 또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돈을 버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이다." "돈은 다른 것을 위해서 유용할 따름"이며(1권 5장 1096a5-7) 이는 돈보다 더 높은 목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행복이 최고선의 조건을 충족하는지 검토하기

- 완전성: 행복은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는 "단적으로 완전한 것"(1권 7장 1097a32-1097b1)

- 자족성: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1권 7장 109718). 행복은 단지 좋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다른 어떤 것을 더해서 행복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만일 행복을 좋음들 가운데 하나로 센다면, 좋음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행복에 덧붙일 경우 행복은 더 선택할 만한 것이 될 게 분명하다."(1권 7장 1097b17-18)

-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두 조건 모두를 만족시킨다고 보고, 행복을 인간의 최고선으로 받아들임

 

5) 행복이 무엇인지: 기능 논변

- 목적론적 자연관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모든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며, 이 기능이 그것의 '좋음'이 무엇인지 결정한다고 봄

- 예술가나 장인들의 좋음과 목표가 그들의 기능에 달려 있듯이, 그리고 인체의 여러 부분들이 각기 기능을 가지듯이, 인간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있다. 영양 섭취와 성장이나 감각적 지각은 다른 생물도 공유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인간의 기능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하지만 행복이 최상의 좋음[=최고선]이라는 주장은 아마 일반적으로 동의될 것으로 보이긴 해도, 보다 분명하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인간의 기능(ergon)이 무엇인지 파악된다면, 아마 이것이 이루어질 것 같다. 피리 연주자와 조각가, 그리고 모든 기술자에 대해서, 또 일반적으로 어떤 기능과 해야 할 행위가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것의 좋음과 ‘잘함’은 기능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처럼 인간의 경우에도 인간의 기능이 있는 한, 좋음과 ‘잘함’은 인간의 기능 안에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니 목수와 제화공은 어떤 기능과 행위들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은 아무런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본래 아무 할 일도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눈이나 손, 발, 그리고 일반적으로 각각의 부분들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그렇게 인간에게도 이 모든 기능들 외에 어떤 기능이 있다고 상정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므로 아님] (...) 감각을 동반하는 삶[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되므로 아님] (...)
   그렇다면 이제 남게 되는 것은 이성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이다. (...) 인간의 기능을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ψυχῆς ἐνέργεια κατὰ λόγον) 혹은 이성이 없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자나 그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자나 종류상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타라 연주자와 훌륭한 기타라 연주자의 경우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일 것이다. 또 만약 탁월성이 여럿이라면 그중 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1권 7장 1097b22-1098a18) 

 

6) 행복에 대한 추가 설명

- 행복은 삶 전체에 걸쳐 성취되는 것임. “한 마리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좋은 날]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행복한]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1권 7장 1098a15-20)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은 순간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삶 전체 그리고 죽은 후까지 포함하는 객관적인 것임)

- 최고선은 인간의 기능을 단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하는 것이다. 즉 행복은 품성상태가 아니라 활동에서 성립한다.(1권 8장 1098b33-1099a6)

- 탁월성에 따라 행위하는 삶은 그 자체로 즐겁다. (1권 8장 1099a7-21)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정의로운 일이 즐거운 것이며 일반적으로 탁월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탁월성에 따른 것들이 즐거운 것이다. (...) 고귀한 것의 애호가에게는 본성적으로 즐거운 것들이 즐겁다. 탁월성에 따른 행위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어서, 고귀한 것의 애호가들에게도 즐겁고 그 자체로도 즐거운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삶은 즐거움을 어떤 장식처럼 추가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을 삶 자체 속에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했던 이유 외에도 고귀한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며, ‘자유인다운’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자유인다운 사람’(eleutherios)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다른 탁월성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권 8장 1099a11-21)

- 행복은 친구, 부, 정치적 힘, 좋은 태생, 훌륭한 자식, 준수한 용모 등 외적인 좋음도 필요로 함(1권 8장 1099a33-b8). 행복의 본질은 덕 있는 행위이지만.

 

7) 영혼의 부분

- 행복이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기 때문에, 영혼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인간의 영혼을 ‘이성이 없는 부분과 ‘이성을 가진 부분’으로 구분한다(1권 13장 1102a28). 그리고 그는 전자를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데 (1) 영양과 성장의 원인이 되는 식물적인 부분과 (2) 이성에 복종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부분인 욕구적인 부분이다. 이처럼 욕구하는 부분은 이성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 또한 두 부분일 것이다. 그 한 부분은 일차적인 의미에서 이성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한 부분은 아버지의 말을 듣듯 그렇게 이성을 듣고 따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1권 13장 1103a2-3) 

- 일차적인 의미의 이성적인 부분의 탁월성은 지적 탁월성이고(예: 지혜, 이해력, 실천적 지혜), 이성을 따를 수 있는 부분인 욕구적인 부분의 탁월성은 성격적 탁월성(예: 온화, 절제, 자유인다움)이다. 

 

2. 성격적 탁월성

1) 획득 방법: 습관화(2권 1장)

- 지적 탁월성은 주로 가르침을 통해 생겨나고,성격적 탁월성습관의 결과로 생겨남(2권 1장 1103a15-18) 

- 덕은 본성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본성에 반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돌을 만 번 위로 던져도 위로 움직이도록 습관을 들일 수는 없는 것처럼, 어떤 것도 그 본성과 다르게 습관을 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본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습관을 통해 우리는 탁월성(덕)에 있어 완성된다.”(2권 1장 1103a19-26) # = 성선설 성악설 논쟁에 대한 답...

- 덕은 습관화, 즉 동일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계발됨.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2권 1장 1103b1-3)

동일한 것들로부터 또 동일한 것들을 통해 모든 탁월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 ... 사람들과 상관하는 거래에 관련된 일들을 행하면서 어떤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부정의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또 무서운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습관을 들이거나 대담한 마음을 갖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거나 비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품성상태(hexis)들은 [그 품성상태들과] 유사한 활동들로부터 생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활동들이 어떤 성질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 활동들의 차이에 따라 품성상태들의 차이가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죽 이렇게 습관을 들였는지, 혹은 저렇게 습관을 들였는지는 결코 사소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큰 차이, 아니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2권 1장 1103b8-25)

 

2) 중용(2권 2장, 6장)

- 성격적 덕들은 “모자람이나 지나침으로 말미암아 파괴”(2권 2장 1104a11)된다. 감정과 행위와 관련하여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2권 6장 1106b21-23) 감정을 갖고 행위를 하는 것이 탁월한 것.

- 중용은 산술적 평균이 아닌 각각의 개별적 경우에 적절한 것, 즉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이다.”(2권 6장 1106b7)

- 모든 행위나 감정에 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2권 6장 1107a9). 심술, 파렴치, 시기와 같은 감정들, 그리고 간통, 절도, 살인과 같은 행위들은 그 자체로 항상 그른 것이다.

- 중간이 모자람과 더 많이 대립할 수도 있고, 지나침과 더 많이 대립할 수도 있음. 이런 일은 두 가지 이유로 발생함: (1) 사태 자체의 측면에서 양극단 중 하나가 중간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2) 우리가 본성상 더 끌리게 마련인 것들에 중간이 더 대립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음(2권 8장).

- 중용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지침: (1) 중간에 더 대립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라. (2) 쉽게 기울어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라. 특히 즐거움을 경계하라. (2권 9장)

 

3) 동기와 쾌락

- 올바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야 진정한 덕의 발휘임: 진정한 용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기 때문에, 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3권 7장 1116a11) 굳건히 맞서기를 선택하는 것.

우리는 정의로운 것들을 행하는 어떤 사람들이 아직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령 법에 의해 규정된 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거나 무지로 말미암아 하거나,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할 뿐 그것들 자체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 특정한 방식의 품성상태를 가지고 행위해야, 다시 말하자면 합리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행위들 자체 때문에 각각의 것들을 행위해야 좋은 사람일 것이다. (6권 12장 1144a13-19, cf. 2권 4장 1105a32, 5권 6장 1134a20, 5권 8장 1135b35)

- 덕 있는 사람은 덕 있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함. 이는 품성이 습관화를 통해 올바르게 형성되었을 때 가능. 그리고 이는 진정으로 덕을 갖춘 사람과 단지 자제력 있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해줌.

- 칸트 윤리학과의 대비: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이 있는 사람보다는 자제력 있는 사람을 더 선호할 것인데, 왜냐하면 후자는 의무가 자기 욕구과 반대됨에도 의무를 다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감각적 본성을 극복하고 자율적인 도덕적 주체로서 행위할 능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덕 있는 행위자의 경우 그가 의무이기 때문에 행위했는지 즐거움 때문에 행위했는지 구분할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독창성: (1) 우리의 욕구와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계발될 필요가 있다고 봄. (2) 이성과 정념을 본질적 대립 관계가 아닌 협력하는 것으로 봄.

 

4) 자발성(3권 1~5장)

- 덕은 감정과 행위에 관련하는데, 이것들이 자발적인 경우에만 칭찬과 비난이 주어짐

- 행위를 비자발적으로 만드는 두 가지 조건: 강제무지.

 

[이하는 22-1 윤리학연습 발제문 발췌 편집]

 

(가)자발성과 비자발성(hekousion(hekōn)/akousion(akōn))

강제된 것이란?(§3, 12): 강제적인 것이란 그 단초archē가 행위자 바깥에 있고 행위자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한 사례: 바람에 떠밀리거나 누군가가 물리력으로 끌고 가는 경우.) 그런데 “보다 큰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어떤 고귀한 것 때문에 행하는” 것들은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논란이 된다.

▲'혼합된' 행위(§4~5): 예를 들어, (1) 참주가 내 가족의 목숨을 볼모로 부끄러운 짓을 하라고 협박하는 경우나 (2) 폭풍우 속에서 자신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뱃짐을 버리는 경우, 그런 행위들은 그 자체로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겠지만, 행위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선택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발성과 비자발성이 '혼합된' 행위다.  
▲혼합 행위는 자발적인 것에 더 가깝다. (§6, 11):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왜냐하면 그런 행위들은 행위를 하는 그 당시에는 선택할 만한 것이고, 행위의 목적은 때와 상황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kata ton kairon estin. 그렇다면 자발적인 것이든 비자발적인 것이든, 행해지는 때와 관련해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1110a12-15) [전제: 선택할 만한 행위는 자발적이다. & 목적이 관련하는 영역이 자발성이 관련하는 영역이다(?).] (2) 그런 행위를 할 때 자신의 사지를 움직이는 단초는 자신 안에 있고, 따라서 그 행위를 할지 말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런 이유로 혼합 행위는 단적으로는 비자발적이지만, 해당 상황에서는 자발적인 것이다. 
▲혼합 행위 중 칭찬, 비난, 용서가 주어지는 경우(§7~8): (1) 크고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 부끄럽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참아내는 경우에는 칭찬을 받는다. (2) 반대로, 고귀하지도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심히 부끄러운 일을 견디는 경우에는 비난을 받는다. (3) 한편, “인간적인 본성을 뛰어넘으며 누구도 견딜 수 없을 것들”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경우, 칭찬은 주어지지 않지만 용서를 받을 수는 있다. (4) 하지만 아무리 강제되었더라도 해서는 안 되고, 차라리 그 끔찍한 일들을 겪고 죽는 게 나은 경우도 있다. 어머니를 살해하라고 협박받은 극중 인물 알크마이온의 경우가 그렇다. (5) 그런데 이런 강제의 상황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견뎌낼지 잘 선택하고 이를 끝까지 실행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것이 강제된 사들이나 강제되지 않은 사람들과 관련해서(?) 칭찬과 비난이 주어지는 까닭이다.” 
▲즐거운 것과 고귀한 것들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11):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강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가 즐겁고 고귀한 것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강제에 의해, 즉 비자발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행하는 것과 달리, 즐거움과 고귀함 때문에 행하는 사람들은 즐겁게 행한다. (3) 그런 것에 쉽게 굴복하는 자신을 탓하지 않고 바깥의 것을 탓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며, (4) 고귀한 행위는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부끄러운 행위는 즐거움 탓으로 돌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나) 무지

- 무지 중에서도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모르거나 보편적인 것을 몰라서가 아닌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무지로 인해 행위했을 때, 그리고 그것에 대해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경우만 비자발적인 것이다.

- '무지로 인한' 행위, 즉 무지가 행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발생한 행위만이 비자발적인 행위다. 이와 달리 '무지 속에서' 한 것, 예컨대 술 취한 사람은 무지로 인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술취함으로 인해 행하는 것이고, 그런 행위의 원인은 술 취한 상태 때문이지 무지 때문이 아니다.

 

(다) 분노와 욕망

분노나 욕망으로 인한 것은 비자발적인 것이 아니다.(§21~27): (1) 만약 그렇다면 동물이나 아이들의 어떤 행위도 자발적이지 않은 것이 된다. [전제: 동물이나 아이들은 분노와 욕망에 의해서만 행위한다. & 그들도 자발적으로 행위한다] (2) 욕망이나 분노로 인한 행위 중 고귀한 것은 자발적이라고 하면서, 부끄러운 것은 비자발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일관적이다(“원인이 하나인데 이것은 우습지 않은가?”). (3) 마땅히 화내야 하거나 욕구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이처럼 마땅히 욕구해야 할 것을 비자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하다. [전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자발적이다.] (4) 비자발적인 것은 고통스러운 반면, 욕망에 따르는 것은 즐겁다. (5) 이성적 계산에 따른 잘못이나 분노에 따른 잘못이나 똑같이 회피해야 하는 것이므로, 비자발성 여부에 있어서 아무 차이도 없다. [전제: 회피해야 할 것은 자발적이다.] (6) 분노와 욕망도 이성적 계산 못지 않게 인간적이므로, 분노와 욕망에서 나온 행위도 인간적이며, 따라서 그런 것들을 비자발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전제: 인간적인 것은 자발적이다(?)] 

 

(라) 2~3장 합리적 선택과 숙고

합리적 선택자신에게 달린 것에 관련한다. 그래서 불가능한 것, 다른 사람에게 달린 것, 영원한 것, 늘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 자연의 변덕이나 우연에 달린 것 등에 대해서는 합리적 선택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 즉 그 단초가 우리 안에 있는 것에 관해 숙고한다. 이는 인간이 행위의 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은 목적에 관련하고, 합리적 선택과 숙고는 목적이 아닌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들에 관계한다. 의사는 병을 치료해야 할지 숙고하지 않고, 연설가는 설득을 해야 할지 숙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건강이나 행복을 바라지, 건강하거나 행복하기를 '합리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이는 합리적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설정된 목적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숙고하며, 이 탐구는 행위의 궁극 원리인 자신에 도달했을 때 멈춘다.

▲의견과 달리 합리적 선택은 실천적인 것이다. 그래서 합리적 선택은 좋고 나쁨으로 나뉘지 참과 거짓으로 나뉘지 않으며, 무엇을 취하거나 회피할지에 관련하지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에 유익한지에 관련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합리적 선택을 통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지, 의견을 가짐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좋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좋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마) 제4장 바람

바람의 대상: 우리는 좋은 것을 바라는가, 좋아 보이는 것을 바라는가?

▲좋음이 바람의 대상이라는 플라톤주의적 주장의 문제(§2):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올바르지 않게 선택할 경우 그 사람이 바란 것은 바람의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전제: 잘못된 바람도 여전히 바람이다.]

▲외견상의 좋음이 바람의 대상이라는 주장의 문제(§3): 그러면 ”본성적인 바람의 대상”[본래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고 각자에게 좋게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게 된다. 사람마다 상이한 것들, 나아가 상반되는 것들을 좋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전제: 좋음에 대한 이런 상대주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포리아 해결(§4~6): “단적으로는, 또 진리에 따라서는 바람의 대상이 좋음이지만, 각자에게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바람의 대상”이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은 진실로 좋은 것을 바라고, 나쁜 사람은 아무거나 되는 대로 바란다. 이는 마치 몸 상태가 좋은 사람에게는 실제로 건강한 것들이 건강을 증진시키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다른 것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쓴 것, 단 것, 뜨거운 것, 무거운 것 등 여러 모든 경우에, 신실한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실제로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신실한 사람이 진실대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중생들은 즐거움에 속아서, 즐거운 것이 좋은 것이 아닐 때에도 좋다고 생각해 선택한다. [인간만물척도설 대신, 권위자만물척도설. cf. 5장 §17.]

 

(바) 제5장 책임의 문제

탁월성도 악덕도 자기 책임(§1~7): (1) 합리적 선택에 따라 고귀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는데, (2) 바로 이것이 탁월성의 활동이며 좋거나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3) 좋거나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이 행위의 원리이고 그런 행위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자발적이라면 말이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행위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강제나 무지로 인해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닌 한 꾸짖고 처벌하는 반면, 고귀한 것들을 한 사람들은 명예로써 기린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상과 벌은 각각 격려와 억제를 위한 것인데,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격려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지도 어떤 경우에는 자기 책임(§8~9): 무지마저도 만일 행위자가 그 무지의 원인이라면 처벌을 받는다. 취중에 잘못을 범한 경우,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하고 어렵지도 않은 법률 규정을 모르는 경우에, 모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 부주의로 말미암아 무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도록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품성도 자기 책임(§10~16): 그러나 어쩌면 그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그런 종류의 사람이이어서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된 것도 자기 탓이다. 품성상태는 각각의 활동을 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다. 부주의하게 살아서 부주의한 사람이 된 것, 나쁜 짓을 하고 살아서 부정의한 사람이 된 것, 방탕하게 살아서 무절제한 사람이 된 것 모두 원인이 자신 안에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런 사람이 된 후에는 돌이키기 어렵다. “마치 돌을 버리고 난 후에는 다시 그것을 잡을 수 없듯이.” 이처럼 영혼의 악덕이 자발적이고 따라서 비난받는 것은 마치 신체의 경우에도 선천적으로 볼품없거나 눈이 먼 사람은 비난하지 않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서 또는 무절제로 인해 그렇게 된 사람은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달린 것들은 비난받고,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가치관도 자기 책임(§17~20):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외견상의 좋음)을 추구하는데, 그 인상을 자신이 통제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각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목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대답은 역시 각자가 자신의 품성상태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런 인상에 대해서도 자기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악행이나 탁월성도 자발적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모두 자기가 본성상 타고난 관점에 따라 최선의 것처럼 보이는 것을 추구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 애링턴은 강박증 환자에서처럼 내적 강제의 경우 행위의 근원이 행위자 내부에 있음에도 행위가 비자발적일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명확히 생리학적인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내적 강제’ 개념은 거부할 것 같고, 품성을 제대로 형성하지 않은 책임을 씌울 것 같다. 물론 그 경계를 분명하게 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지적 탁월성

1)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구분(6권 1장)

-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구분하고, 이성적인 부분을 다시 둘로 구분함.

   (1) 학문적 인식의 부분(epistēmonikon): ‘그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존재자들’을 성찰하는 부분 -> 학문적 인식, 직관적 지혜, 철학적 지혜

   (2)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부분'(logistikon): 다르게도 있을 수 있는 존재자들’을 성찰하는 부분.-> 기예, 실천적 지혜

 

2) 학문적 인식의 부분의 탁월성

- 학문적 인식(epistēmē): 다르게 있을 수 없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들원리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품성상태 (6권 3장)

- 직관적 지성(nous): 증명될 수 없는 원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6권 6장)

- (철학적) 지혜(sophia): "직관적 지성과 학문적 인식이 합쳐진 것”(1141a18)으로서, 최고의 학문적 인식 (6권 7장)

 

3)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부분의 탁월성

(가) 기예(technē) (6권 4장)

- 참된 이성을 동반해서 무엇인가를 제작할 수 있는 품성상태

-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의 원리가 제작자에게 있으며 제작되는 것에 있지는 않는 것들 중 무엇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은 자신들 안에 그 원리를 가지고 있음)

 

(나) 실천적 지혜(phronēsis) (6권 2, 5, 7~13장)

- 자신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들과 관련해서 잘 숙고하되, 건강이나 체력과 같은 부분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과 관련해서 무엇이 좋고 유익한지 잘 숙고하는 것. (6권 5장)

- 숙고는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좋음에 관련하기 때문에 학문적 인식과 다름. 행위는 개별적인 것들이자 최종적인 것들에 관련하며,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것들을 알아야 함.

- 숙고는 제작과도 다름: (1) 제작은 제작과는 다른 목적을 갖지만, 행위의 목적은 바로 잘 행위한다는 것 자체라는 점, 그리고 (2) 기예와 달리 실천적 지혜는 올바르지 못한 목적을 위해 발휘되는 경우가 없다는 점에서.

- 실천 혹은 행위는 개별적인 것들에 관련하기 때문에,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것도 알아야 함. ("나이가 젊더라도 기하학자나 수학자가 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일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 그 까닭은 실천적 지혜가 개별적인 것들에도 관련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경험으로부터 알려지고, 젊은이에게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6권 8장 1142a12-16])

- 실천적 지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의 선택에 관련함. (숙고는 어떤 목표(덕 있는 행위 또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을 파악하는 것으로, 때로 실천적 삼단논법의 형태를 취한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전형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을 좋은 것으로 규정하는 대전제, 이러한 좋음에 도달하는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하는 소전제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결론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실천적 추론이 옳은 것이 위해서는 첫째, 진정으로 좋은 것을 목표로 설정해야 하고, 둘째,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중간 단계를 확인해 주어야 한다. 또한 추론의 과정이 타당해야 한다. “따라서 만일 잘 숙고했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숙고를 잘한다는 것은 목적을 성취하는 데 유용한 것을 따르는 올바름일 것이고, 이에 대한 참된 파악이 바로 실천적 지혜이다.”(1142b32-34) 즉, 우리가 어떤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참된 생각에 도달했고,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최선의 수단을 확인했다면 우리는 잘 숙고했다는 것이다.)

- 합리적 선택사유와 품성이 모두 관여하는 "숙고적 욕구"로서, 합리적 선택이 신실한 것이려면 동일한 것을 이성은 긍정하고 욕구는 추구해야 함(6권 2장). “사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지만 목적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사유는 그렇지 않다.”(6권 2장 1139a35) 

- 실천적 지혜는 (1) 성품적 탁월성이 제공하는 좋은 목표와 (2)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능력인 영리함이 결합되어야 성립함 (영리함이 나쁜 목표와 결합되면 교활함이 됨[6권 12장]; 자연적 덕에 지성이 더해지지 않으면 엄밀한 의미의 덕이 아님[6권 13장])

- 소크라테스는 모든 탁월성들이 실천적 지혜라고 주장한 점에서는 잘못을 범했지만, 그것들이 실천적 지혜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옳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탁월성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던 반면(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탁월성이 앎이었으니까), 우리는 탁월성이 이성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6권 13장 1144b28-29)

- 실천적 지혜와 성격적 덕은 불가분함

 “실천적 지혜(...)는 탁월성이 없다면 영혼의 이 눈에 생기지 않는다. 실천적인 것들에 관련한 추론은 출발점, 즉 ‘목적이자 최고선은 이런 것이므로’ 라는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최고선은 좋은 사람에게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못됨이 우리의 마음을 비틀고 실천적인 출발점들에 관한 그릇된 견해에 빠지게 한다. 따라서 좋은 사람이지 않고서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6권 12장 1144a29-36)

“따라서 지금까지 논의한 것으로부터 실천적 지혜 없이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또 성격적 탁월성(덕) 없이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6권 13장 1144b30-31) 

“또한 실천적 지혜나 탁월성 없이는 합리적 선택이 올바르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탁월성은 목적telos을 성취하도록, 실천적 지혜는 그 목적에 이바지 하는 것들을 성취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6권 13장 1145a5-6)

 

# 나의 기말보고서의 주장: 성품이 목적을 결정하지만, 그럼에도 성품은 X에 부합하는 행동과 감정을 아직 습관화하기 이전에도 X라는 목표를 지향할 수 있기에, 현재 성품과 다른 성품으로의 개변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하다. 


4. 자제력 없음(7권 1~10장)

(가) 자제력 없음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 앎의 소유와 활용을 구분: “우리는 안다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 앎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사람과 앎을 사용하는 사람 모두 알고 있다고 이야기되니까”(7권 3장 1146b32) 앎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사람 중 자고 있는 사람, 미친 사람, 취한 사람과 같은 상태가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상태이다. 그런 사람들이 논변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진정으로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의 배우듯이 말하듯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7권 3장 1147a24).

- 자제력 없음의 정의: “감정 때문에 올바른 이치를 거슬러 [곧잘] 벗어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올바른 이치에 따라 행위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에 지배당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을 마땅히 무한정 추구해야 한다고 설득될 정도까지는 지배당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사람이 자제력 없는 사람이고, 무절제한 사람보다 낫고 단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최선의 것, 즉 원리적 출발점이 그에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7권 8장 1151a20-26)

 

(나) 자제력 없음의 종류들

- 단적인 자제력 없음무엇과 관련된 자제력 없음(7권 4장): 식욕과 성욕처럼 육체적이고 필수적인 것들에 관련하는 자제력 없음은 단적으로 자제력 없다고 하고, 승리, 명예, 부 등에 관련한 것은 ‘~에 관련된 자제력 없음’이라고 한정하는 조건을 부가해서 부른다. 

-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욕망에 대한 자제력 없음(7권 6장): 전자가 후자보다 덜 창피하다. 분노는 어느 정도 이성에 귀를 기울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듣고 성급하게 돌진할 때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발생한다. 반면 욕망은 어떤 의미에서도 이성을 따르지 않는다.

 

(다) 자제력 없음과 성품

- 무절제라는 성품적 악덕을 가진 사람은 “즐거운 것들을 과도하게 추구하되 [합리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추구하는 사람”(7권 7장 1150a19-20)이고, 후회할 줄 모르는 사람이며, 그렇기에 고칠 수 없는 사람이다. 반면 자제력 없는 사람과도한 쾌락을 추구하되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설득되어 합리적으로 선택하여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후회할 줄 아는 사람이고, 고칠 수 있다. 그에게는 원리적 출발점이 보존되어 있다

-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품성이 탁월한 사람이고, 아는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동시에 자제력 없는 사람일 수 없다.

 

5.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들 155

- 매킨타이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은 형이상학적인 생물학에 기초해 있다고 비판하며, 생물학보다는 사회적 관행들에 기초해 인간의 목적을 설명하고자 함.
- 과연 인간은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는가? 이성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을 묶는 것은 단지 모호한 유사성뿐인 것은 아닌가? 이성적 존재라는 집합에 무엇이 속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의 분류 체계는 임의적인 것이 아닌가? 어떤 자연적 류의 존재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줄 수 있는가?

- 만일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왜 그것은 이성이어야 하는가? 생존 본능 같은 다른 것이면 안 되는가?

-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면 행복한가? 어쩌면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은 삶의 덧없음을 파악하여 좌절하게 되지는 않는가?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과연 보편적으로 타당한가? 단지 자신의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 덕을 중용으로 설명했는데, 적절한 정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이에 대해 덕 있는 사람이 판단하는 바가 올바르다고 대답한다면, 덕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어떻게 아는가? 독립적인 기준이 필요하지 않은가?

 

# 현재 생각: 본질론은 사실이라기보다 요청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정 사회를 넘어선 보편성을 지향한다. 중용의 내용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사태 자체가 그러한 것이다. - 더 생각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