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윤리 및 윤리 임용고시 기출의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은 인용문 모음 자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보았는데, 효율적인 방법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서 고민이다.
천재교과서 인용문 ("-" 없는 단락들은 교과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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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 상대주의]
- “인간(또는 개인)이 만물의 척도이다.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있다는 것에 대한 척도이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있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한 척도이다.”(플라톤 <테아이테토스>)
-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의미한 바는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각자에게 나타난 것이 또한 그에게는 사실상 그렇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같은 것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나쁜 동시에 좋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모든 같은 것에 대해서도 정반대되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고르기아스 회의주의]
- “아무것도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알 수 가 없다. 만약 있고 알 수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고르기아스 <무에 관하여>)
[트라시마코스 정의관]
- “각각의 정체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한다. 법을 제정하고 나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피치자에게 정의롭다고 선언하고, 법을 어긴 자를 처벌한다. 그러므로 수립된 정체의 이익이 곧 정의이다.”
[칼리클레스 쾌락주의]
- 참되게 살려는 자는 욕구를 억제해서는 안 된다. 용기와 지혜로써 이를 최대한 충족시켜야 한다.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절제를 부끄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며 절제와 정의를 칭송한다. 사치, 무절제, 자유가 덕이자 행복이다.
소크라테스
[무지의 지]
- “지혜롭다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군.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자기가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나는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아.’”(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 “자신이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인간이 가진 무지 중에서 가장 큰 무지입니다. 내가 대다수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 나는 아테네 시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신체나 재산이 아니라 각자의 영혼을 최상의 상태로 가꾸라고 설득할 것입니다.”(플라톤, <변명>)
[이성적 숙고]
- “영혼이 몸을 이용하여 감각을 통해 탐구하는 것은 수시로 변하지. 그래서 영혼은 마치 술에 취한 듯, 헤매고 혼란스러워진다네. 하지만 영혼이 감각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탐구하면 순수하고, 항상 그대로 있고, 불사하는 것을 붙잡기 때문에 헤매지 않게 되지. 영혼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실천적 지혜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플라톤, <파이돈>)
[주지주의]
- 참되게 살려는 자는 덕이 참된 지혜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모든 성질들은 지혜를 동반하느냐 무지를 동반하느냐에 따라 유익하게도 해롭게도 되기 때문이다. 덕은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일종이어야 한다.
- 덕은 곧 지식이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거나 나쁜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자제력 없는 사람’은 있을 수도 없고,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다. 정의든 절제든 용기든 모두 다 지식이다.
-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것을 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런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모두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못 이겨서 그렇다고 합니다. 즐거움에 져서 어떤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어떤 나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즐거움에 진 것이 아닙니다. 그 나쁜 일이 당장은 즐거움을 주지만 더 큰 고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좋은 일이 당장은 즐거움을 주지만 더 큰 고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즐거움에 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 지는 것입니다. ... 다른 행동이 지금 자신의 행동보다 더 좋고, 또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래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지는 것은 무지와 다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은 지혜입니다.”(플라톤, <프로타고라스>
- “덕이 영혼 속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고 필연적으로 유익하다면 그것은 지식이어야 하네. 왜냐하면 영혼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는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지만, 지식이 더해지느냐 무지가 더해지느냐에 따라 유익하게도 유해하게도 되기 때문이네.”(플라톤, <메논>)
- 존재하는 것에 대해 보편적인 정의를 내려 무지를 자각하고 본질을 알아야 한다. 경건한 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닌 것처럼 말이다.
- 여러분은 나를 법정에 고소했지만, 내가 한 일이란 여러분에게 육체나 재산을 우선하여 고려하지 말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영혼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설득한 것이었습니다. ...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사람은 옳은 일을 행하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른 일을 행하지요. 그러므로 덕은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지식)입니다
덕을 실천하려면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용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고, 절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절제가 좋다는 것을 모르면 절제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자신에게 나쁜 것을 피하고 좋은 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덕이 좋다는 것만 알면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주지주의를 내세우며 덕 있는 삶을 살려면 덕에 대한 보편적이고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 철학적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보편주의]
-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부모를 화장하는 관습을 따르는 그리스인을 불러, 돈을 얼마나 주면 부모의 시신을 먹을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다음에 다리우스왕은 부모의 시신을 먹는 칼라티아족을 그리스인 앞에 불러 놓고 돈을 얼마나 주면 부모의 시신을 화장하도록 허락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런 불경한 말씀은 제발 삼가 달라고 말하였다. 관습의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던 그리스의 시인 핀다로스는 “관습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다.”라고 말하였다.”(헤로도토스, <역사>)
[영혼의 수련]
- 선에 대한 지식은 무지의 자각과 영혼의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이를 행함으로써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플라톤
[철인통치]
- 실무나 학식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하였던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들어 영혼의 눈으로 모든 것에 빛을 주는 좋음 자체를 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번갈아 가며 나라와 개인과 자신을 다스리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여생의 대부분을 철학으로 소일하지만, 차례가 오면 나랏일도 수고하며 저마다 나라를 위해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교육하여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남긴 다음, 축복받은 자들의 섬으로 가서 살게 해야 합니다. 내가 말한 것은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해당합니다. 여자라도 충분한 자질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그도 철학자와 통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국가>) [-->계속]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 즉 철학자들이 한 나라에서 최고 지배자들이 되어 세속적인 명예들을 저속하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 생각하는 한편, 올바른 것을 가장 중대하고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고, 이를 받들고 증대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질서 잡히게 할 때만이 올바름(정의)이 가능하네. (<국가>)
- 국가는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다스려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현재 국가를 다스리는 자, 즉 최고 권력자가 진실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지혜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게 나쁜 것들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이와 같이 정치 권력과 지혜에 대한 사랑은 한데 합쳐져야만 한다.
- 참주는 남을 다스리려고 하지만 아첨과 굴종을 하며 산다는 점에서 진짜 노예이며,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실로 가난한 자다. 그의 영혼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병들어 있다. 철인왕은 그와 반대되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래서 철인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최선의 이상 국가로 볼 수 있다.
[이데아, 비유]
-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태어날 때부터 온몸이 묶인 채로 살아가는 죄수들을 상상해 보게. 이들은 이곳에서 앞만 볼 수 있고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사람들 사이에는 담이 세워져 있고 담 위로 사람들과 여러 동물상이 지나가면, 죄수들은 벽면의 그림자 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하게 되네. 이처럼 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림자가 비치게 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죄수들은 벽면의 그림자가 진정한 사람이나 동물이라고 믿을 걸세. ...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된 사람은 동굴 밖에는 실제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으며,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은 그것들을 본떠서 만든 인형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걸세. 그리고 모든 것의 원인이 태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걸세. (<국가>)
- 이 전체 비유에서 ‘동굴에서 벗어나 위로 오르는 것’, 그리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을 구경하는 것’을 ‘영혼이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 의도에 딱 맞는 것일세.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종적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좋음의 이데아이네. 이것이 옳고 아름다운 모든 것의 원인이지.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동하려는 사람은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 한다네. (<국가>)
- [2009] (Rep. 7)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조각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래도 저마다 아름답죠. 그런데 이것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사물일지는 모르지만 어느 것도 아름다움 자체는 아닙니다. 그는 아름다움 자체는 따로 있으며, 아름다움 자체를 ‘미의 (이데아)’라고 했습니다. (그림: 동굴비유)
- ‘태양’은 보이는 것들에게 보임의 힘을 주고 그것들을 성장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좋음’은 인식되는 것들에게 인식됨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영혼삼분설, 삼계급설, 조화로서의 정의]
- 나라 안에 세 부분이 있듯이 모든 개인의 영혼 안에도 세 부분이 있다. 인간이 올바르게 되는 것은 나라가 올바르게 되는 방식과 같다.
- 정의로운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다른 부분의 일을 하지 않게 하고, 영혼의 부분들 -- 이성, 기개, 욕구 -- 이 서로에 관해 참견하지 않도록 하며, 진정으로 자기에게 고유한 일들을 잘 정하고,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고 질서 지우며 자신과 친구가 된다네. 또 영혼의 세 부분을 저음과 중간음 그리고 고음과 같이 화음을 이루는 절대적인 세 음처럼 조화시키고, 혹여 이들 사이에서 어떤 다른 것이 생겨나면 그 모든 것을 함께 연결해서 여럿에서 하나가 되도록 절제 있고 조화된 상태로 만드는데, 그가 재물의 획득이나 몸을 돌보는 일이나 정치 및 개인적인 계약과 관련된 어떤 것을 행한다면, 저런 상태로 만들고 나서야 그는 행동하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상태를 보존시키고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모든 것들을 정의롭고 훌륭한 행동이라고, 또 이러한 행동을 담당하는 지식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부르네. 반면 이 상태를 무너뜨리는 것을 부정의한 행동이라고, 또 이런 행동을 담당하는 의견을 무지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부르네. (플라톤 <국가>)
- 정의는 각자가 자기의 성향에 맞는 일 한 가지에 종사하며 타인에게 참견하지 않는 것이네. 이렇게 해야 지혜, 용기, 절제가 국가 안에 생기고 이것들이 잘 보전될 수 있기 때문이라네. 정의는 곧 제 것을 소유하고 제 일을 하는 것이네. 만약 성향상 장인이거나 상인이 전사 계층으로 옮기려 하거나 전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자격도 없으면서 통치자 계층으로 옮기려 해서 사람들이 서로 도구나 직분을 교환하거나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고 한다면 국가는 파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네. (<국가>)
- 영혼은 앎을 사랑하는 이성적인 부분, 승리를 사랑하는 기개적인 부분, 돈을 사랑하는 욕구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각 부분의 탁월한 상태가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다.
- 영혼의 세 부분인 이성, 기개, 욕구가 전체적으로 조화된 상태가 정의이며, 어떤 부분이 전체에 어긋나는 것은 부정의이다.
-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이성의 지시를 언제나 간직한다. 이성이 기개를 지배하고, 기개는 이성에 복종하며 협력해야 한다.
- 한 나라가 용기 있는 것은 이 나라의 한 계층에 의해서이다. 이 계층은 두려워할 것들에 대한 의견을 보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용기는 법에 의한 교육을 통해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에 대한 의견을 끝까지 보전하는 것이다.
- 절제란 쾌락과 욕망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또한 절제는 지혜나 용기와 달리 나라 전체에 요구되는 것으로서,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 선의 이데아에 근거를 둔 절제와 정의는 아름답지만 얻기 힘든 것이다. 반면, 무절제와 불의는 달콤하고 얻기 쉽지만 수치스러운 것이다.
- [2012] (Rep. IV) 시민들은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한 가지 일에 개개인이 배치되어야 한다. 이는 각자가 자신의 한 가지 일에 종사함으로써 각자가 여럿 아닌 한 사람으로 되도록 하고, 또한 바로 이런 식으로 해서 나라 전체가 자연적으로 여럿 아닌 한 나라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이 점은, 즉 실상 이 나라가 정의로운 것이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자신의 일을 함에 의해서였음은 확실하다.
- (Phdr.) 인간의 영혼은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망적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 이런 인간의 상황을 두 마리의 말을 모는 마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는 선하기 때문에 채찍질할 필요 없이 몇 마디의 경고만으로 몰 수 있지만, 다른 한 마리는 건방지고 뻔뻔스러워 채찍질을 가해야 합니다. 마부는 이 두 말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 나라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부분들이 한 사람의 영혼 안에도 있고, 그 수도 같다는 데에 우리는 뜻을 같이 했다. 한 나라를 지혜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한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이성적인 부분이 있고, 한 나라를 용기 있게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한 사람에게도 용기 있게 하는 기개의 부분이 있으며, 욕망의 부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against 좋음 자체, 보편적인 좋음의 이데아]
- 좋음은 존재가 이야기되는 방식만큼이나 많은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좋다고 말할 때는, 신과 지성이 좋다고 말할 때처럼 무엇임에서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덕이 좋다고 말할 때처럼 성질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적당량이 좋다고 말할 때처럼 양에서도 좋다고 말하고, 무엇에 유용하다고 말할 때처럼 관계에서도 좋다고 말하고, 시간과 장소, 그 밖에 다른 점에서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좋음이 어떤 공통적이고 단일한 보편자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인간 자체’에 있어서나 ‘인간’에 있어서나 하나의 같은 설명, 즉 인간에 대한 설명이 적용되는 한, ‘무엇 자체’를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나 ‘인간’ 모두 인간인 한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좋음 자체’나 ‘좋음’ 역시 좋음인 한에서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모든 선에 공통되는 하나의 선 자체란 있을 수 없다. 건축가가 선 자체를 안다고 자신의 기술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실현 가능한 선이 중요하다.
[2021] 갑: 좋음은 서로 다른 행위나 기술에 있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의술에서는 건강이고, 군사학에서는 승리이며, 건축에서는 집이며, 다른 경우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모든 행위와 선택에서 그 (목적)이 좋음이다. 사람들은 모두 (목적)을 위해서 나머지 일들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이 실현되어야 할 좋음이다.
인간의 어떤 기능도 유덕한 활동들만큼 영속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유덕한 활동들 가운데 가장 존경스러운 것은 더 오래 지속된다. 더없이 행복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런 활동에 계속 전념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덕한 활동은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으며, 행복한 사람은 평생토록 행복할 것이다.
[행복]
-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 중 최상의 것이 무엇인지 논의해 보자.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한다. 대중과 교양 있는 사람 모두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잘 행동하는 것'과 '잘사는 것'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덕에 따르는 정신의 활동을 행복이라고 한다.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것이며, 인간 본성에 따라 나오는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 행복이 덕에 따르는 활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최고의 덕을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지성이 최고이며, 지성이 상대하는 대상 또한 앎의 대상들 중 최고이므로 인간의 고유한 덕에 따르는 최고의 활동은 곧 관조적 활동이다. 관조적 활동으로부터는 관조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으므로 관조적 활동은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좋음을 추구한다. 인간에게 있어 좋음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고, 여러 탁월성 중에서 최상의 탁월성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행동이나 기술에는 목적이 있는데, 인간은 궁극적으로 좋은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좋음이 무엇인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의술은 병을 치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병의 치료는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데,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도 그보다 더 높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좋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장 높고 가장 좋은 목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엇을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는다.”라는 대답만을 내놓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명예를 누리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안락하게 살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고유한 덕을 따르며 살아야지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능]
- 피리 연주자 같은 기술자의 좋음은 그가 행하는 기능에 있다. 손, 발, 눈 같은 자연적 기관들의 좋음도, 동식물 같은 자연적 존재들의 좋음도 각각의 기능에 있다. 한 사물이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해 주는 탁월성을 갖추는 것, 그리고 실제로 잘 수행하는 것이 그 사물의 목적이다. 각 기술적 행위나 자연적 기관들에 목적이 있듯, 인간이든 국가든 각각의 존재에는 고유한 목적이 깃들어 있다.
- 행복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여러 선 중에서 최고의 선이다. 따라서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이며, 모든 행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행복인지를 알려면 인간의 기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만이 지닌 특별한 기능은 정신의 이성적 활동 능력이다. 인간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은 바로 이성적 활동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어떠한 활동이 잘 수행되는 것은 그것에 알맞은 덕을 가지고 수행될 때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덕에 따르는 정신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영혼의 두 부분, 덕의 두 종류, 획득 방식]
- “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품성적 덕과 지성적 덕이다.”(<에우데모스 윤리학>)
- 영혼은 이성적 부분, 이성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부분, 이성적인 것이 없는 부분으로 나뉜다. 이성적 부분의 덕은 지성적 덕이고, 이성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부분의 덕은 품성적 덕이다.
- 덕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성적 덕이며, 다른 하나는 품성적 덕이다. 지성적 덕은 그 기원과 성장을 주로 교육에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품성적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 품성적 덕은 어떤 것도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본성적으로 생기는 것이라면, 본성과 다르게 습관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돌은 본성적으로 아래로 움직이게 되어 있으므로 위로 움직일 수 있도록 습관을 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품성적 덕은 본성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본성에 반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품성적 덕을 본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습관을 통해 완성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2014] (NE1) 행복은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어떤 활동이다. 영혼은 이성이 없는 부분과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으로 나뉜다. 이성이 없는 부분은 다시 식물적인 것과 (ㄱ)욕구적인 것으로 나뉜다. 이 중 후자는 이성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설복될 수 있는 한에서는 이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 또한 다시 둘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듯 그렇게 이성을 듣고 따를 수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ㄴ)일차적인 의미에서 이성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탁월성 또한 이러한 차이에 따라 나뉜다.
-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품성적 덕에는 절제, 용기 등이 있는데, 이는 반복적인 훈련과 습관을 통해 생긴다. 반면 지성적 덕에는 철학적 지혜, 이해력, 실천적 지혜 등이 있는데, 이는 교육과 탐구를 통해 생긴다. 이 두 가지 덕을 이성에 따라 조화롭게 발휘하면 인간은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중용]
- 품성적 덕은 감정과 행동에 관계하고, 이 감정과 행동 속에 과도와 부족 및 중용이 있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대담함, 분노나 연민,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일을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할 수 있는데, 양쪽 모두 잘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이것들을 마땅할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 마땅한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적을 위해, 그리고 마땅한 방식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중용이자 최선이고, 이것이 덕의 특징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두려움과 대담함에 관해서는 용기가 중용이다.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도 지나친 사람이고, 무모한 사람도 대담함이 지나친 사람이다. 반면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대담함이 모자란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니윤)
- 두려워하는 일이나 화를 내는 일은 너무 많이 할 수도 있고 너무 적게 할 수도 있지만, 둘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용입니다.
- 사물에 있어서의 중간은 각각의 끝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10과 2의 산술적 중간은 6이다. 그러나 인간과 관련해서는 산술적 방식으로 중간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인간과 관련해서의 중간은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것이다. 하루에 6므나의 식사는 성인 운동선수에게는 적겠지만 어린 선수에게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 무슨 일이든 두려워하며 어떤 자리도 지켜 내지 못하는 사람은 비겁하며, 반대로 무슨 일이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뛰어드는 사람은 무모하다. 용기라는 덕은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에 의해 보존된다.
- 절제란 쾌락의 과도함과 모자람, 즉 방탕과 무감각이라는 두 악덕 사이의 중용입니다. 또한 절제는 본성에 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며, 습관에 의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 용기 있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에 비해 무모하고, 무모한 사람에 비해 비겁해 보인다. 양극단의 두 성향은 대립적이며, 중간의 성향은 양극단의 두 성향과 대립적이다.
- [2009] (NE2) 연속적이고 분할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더 많은 양을, 혹은 더 적은 양을, 혹은 동등한 양을 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때의 더 많고 적음이나 동등함이 대상 자체에 따라 이야기될 수도 있고,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이야기될 수도 있다. 이때 동등함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어떤 중간이다. ... 그래서 모든 전문가들은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며, 중간을 추구하고 이것을 선택하는데, 이때의 중간은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중간이다.
- 덕은 인간 본성의 목적이 되는 행복을 성취하게 해 준다. 덕은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하는 방식에 의해 중용을 목표로 삼는다. 덕을 소유한 사람은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고 마땅히 괴로워해야 할 것에 고통을 느낀다.
품성적 덕은 행위와 감정에서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고 마땅히 가져야 할 중간을 겨냥하는 중용으로 나타난다. 방종과 둔감 사이에 절제가 있고, 낭비와 인색 사이에 후함이 있다. 포부가 큰 사람은 지나치게 허영심이 강한 사람과 소심한 사람 사이에서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상태를 아는 현명함을 실천적 지혜라고 한다. 이는 선택과 숙고가 필요한 구체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고 좋은 의견을 구성하는 지성적 덕이다. 이처럼 품성적 덕과 지성적 덕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실천적 지혜]
- [2019] (NE2) 탁월성에서 비롯된 행위는 행위자가 첫째로 알아야 하고, 둘째로 합리적 (선택)에 의거해서 행위하되 그 행위 자체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하며, 셋째로 확고하고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이나 절제있는 사람은 단순히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절제 있는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이다. ... 따라서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상태로,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ㄱ)중용에 의존한다. 이 중용은 이성에 의해, 즉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하는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다.
- [2008] (실천적 지혜)는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되며, 인간적인 선에 관해서 참된 이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 [2015] (NE6) 의견을 갖는 영혼의 부분에는 영리함deinotēs과 (실천적 지혜), 두 종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품성적 부분에도 자연적 탁월성과 엄밀한 의미의 탁월성, 두 종류가 있다. 이들 중 [엄밀한 의미의 탁월성]은 (실천적 지혜)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탁월성이 (실천적 지혜)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 역시 한편으로는 옳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 [2011] (NE6)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에서 분명한 것은, 지혜란 본성상 가장 영예로운 것들에 관해, 학문적 인식과 직관적 지성이 합쳐진 것이라는 점이다. ... 반면에 (실천적 지혜)는 인간적인 좋음에 관련하며, 숙고가 가능한 것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잘 숙고한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일 터인데, 아무도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나 또 목적 -- 그것도 행동에 의하여 실현시킬 수 있는 어떤 선 -- 이 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잘 숙고하는 사람이란 행동에 의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서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에 생각이 미치는 사람이다. ... 덕은 올바른 이치를 따른 상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올바른 이치를 머금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대한 올바른 이치가 다름 아닌 (실천적 지혜)다. ... 또 선택은 덕이 없으면 올바를 수 없지만 또한 이에 못지않게 (실천적 지혜)가 없어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덕은 목적을 결정하고, (실천적 지혜)는 목적을 실현시켜 주는 것들을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는 것이니까.
[자발성]
- [2010] (NE3) 탁월성은 감정과 행위에 관련하고, 이것들이 자발적인 경우에는 칭찬과 비난이 가해지지만 비자발적인 경우에는 용서가, 경우에 따라서는 연민까지 생겨난다. (힘)에 의해, 혹은 (무지)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은 비자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바람이 불어서 어디론가 움직이게 한다거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어디론가 데려가는 경우이다. ... 그런데 (무지)로 말미암은 모든 것은 ‘내켜서 자발적으로 하지는 않은 것’이지만, 고통을 동반하고 후회를 일으킨다면 ‘마지못해 비자발적으로 한 것’이다. ... (분노나 욕망)으로 말미암은 것들이 비자발적이라는 주장은 아마 옳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만약 그렇다면 다른 동물들 중 어떤 것도 자발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되며 아이들조차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아크라시아]
- [2017] (NE 1,7) 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사유의 덕이라 부르고, 다른 어떤 것들은 품성의 덕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지혜, 이해력은 사유의 덕이라 부르고, 너그러움과 용기는 품성의 덕이라고 부른다. ...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 어떻게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제대로 판단하더라도 (자제력 없음)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철학자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 속에 지식이 자리 잡고 있는데 무엇인가가 지식을 지배하여 지식을 마치 노예처럼 끌고 다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철학자에 따르면 (자제력 없음)이라는 것은 없다. 즉 최선의 것을 파악하면서 최선의 것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만약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그러나 나는 그 철학자의 견해가 관찰된 사실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그 이유’ 예시답안: ‘무엇이 최선의 것인지에 대한 무지’
- 자제력 없는 행위를 하는 사람(akratēs)도 그러한 감정 상태에 빠지기 전에는 자신이 최선이라고 파악한 것에 어긋나게 행위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명백하다. 앎보다 강한 것이 없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에 어긋나게 행위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vs. Soc: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다른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을 멈추고 더 좋은 것을 행하려 할 것이다. 좋은 것들 대신에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향해 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성향에서 찾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은 지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비록 선을 알고 있다 하여도 인간이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이유는 덕 있는 행위를 습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덕이 무엇인지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알고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모르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사람’은 후회할 줄도 모르는 사람인 반면, 알고도 행하지 못하는 ‘자제력 없는 사람’은 후회할 줄은 아는 사람이다.
[기타]
- 모든 공동체는 선을 추구하는데, 모든 공동체 중에서도 최고이며 다른 모든 공동체를 포괄하면서 최고선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다름 아닌 국가 또는 정치 공동체이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용감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치 건강함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건강하기를 바라고, 좋은 체력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체력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에우데모스 윤리학>)
[현대 덕윤리: 매킨타이어]
- 목적론적 인간관을 거부하고 도덕의 합리적 정당화만을 시도했던 모든 기획이 실패하여 우리는 덕이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덕의 전통, 즉 목적론적 인간관에서 출발하여 덕에 주목하는 고전적 전통으로 돌아가 그것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통의 담지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통 속에 내재된 ‘실천’에 참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삶의 서사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는 인생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실천’이란 혼자 축구공을 열심히 차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경기하는 축구 경기 자체이다. 단순히 혼자 공을 차는 것에는 축구 경기의 전통과 역사를 통해 축적된 내재적인 선이 없다. 이러한 실천이 덕의 척도와 규칙이 된다. 덕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공동체에 내재된 선의 성취를 통해서 얻어진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에 참여할 때 유덕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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