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서양윤리

서양윤리 (10) 칸트

neon_eidos 2023. 7. 29. 20:56
  • 김병찬(2022). 중등임용 시험대비 서양·동양·한국윤리. 에프엠.
  • Arrington, R. L. (1998). Western ethics: An historical introduction. Blackwell Publishers.
  • Pojman, L. P., & Fieser, J. (초판1990, 7판2012). Ethics: Discovering right and wrong. 7th Edition. Wadsworth Cengage Learning.
  • Sandel, M. J. (2009).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FSG.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1판 2005, 개정2판 2018). 윤리형이상학 정초. 아카넷.
  • 편상범. (2009). 윤리학: 행복은 도덕과 갈등하는가? 민음인.
  • 변순용 외. (2018).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천재교과서.
     

0. 참고: 윤리 이론의 유형

1) 행위 중심 윤리와 덕윤리

- 윤리 이론의 세 가지 큰 유형으로 의무론, 공리주의, 덕윤리가 있다. 의무론과 공리주의가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에 주목하는 행위 중심 윤리라면, 덕윤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주목한다. 즉, 행위 중심 윤리는 도덕적 평가의 기준행위의 옳고 그름에 두고, 덕윤리는 그것을 행위자의 성품에 둔다. 
 

2) 결과론과 의무론

- 도덕 이론은 행위의 옳고 그름이 행위의 결과에 의존한다고 보느냐, 결과와 무관하게 행위 자체의 성질로 평가된다고 보느냐에 따라 결과론(또는 목적론)과 의무론이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 한 백만장자가 죽음을 앞두고 당신에게 자신의 전재산을 한 프로야구팀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당신은 그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약속을 지켜야 할까? 약속을 지키는 것이 그 자체로 옳은 행위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는 반면, 죽은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는 기부를 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므로 옳은 행위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윤리적 관점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행위의 옳고 그름이 그 결과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와 무관하게 존중해야만 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입장이다.

- 결과론은 행위의 결과가 좋다면 동기와 상관없이 그 행위를 옳다고 보며, 대체로 행복을 좋은 결과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또한 결과론은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결과론으로 최대 행복을 낳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보는 입장인 공리주의가 있다.
- 반면 의무론에 따르면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할 도덕 법칙이나 의무가 있고, 이 의무를 따르는 행위가 옳은 행위이다. 즉 의무론은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할 때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 자체의 도덕적 성질을 고려한다.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결과론자는 거짓말을 해서 좋은 결과가 예상된다면 그것이 옳다고 보지만, 칸트는 거짓말은 그 자체로 언제나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본다. 의무론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칸트가 있다. 자연법 윤리도 의무론적 접근의 또 다른 예다. 
 

1. 선의지

1) 선의지의 무조건적인 가치

- 세상에서 무조건적으로 좋은 유일한 것은 선의지다. 지성이나 용기와 같은 재능과 기질들, 그리고 행복도 어떤 조건 하에서는 좋지만 악한 의지를 동반하면 가치 있지 못하다. 선의지란 행위를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실천하려는 의지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그 선함이 훼손되지 않는다.
- 선의지는 끝내 성공적인 행위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빛나는 보석처럼'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한 행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여전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행위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지성, 기지, 판단력, 그 밖에 정신의 재능들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들, 또는 용기[의기], 결단성, 초지일관성 같은 기질상의 성질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관점에서 선하고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만약 이런 천부의 자질들을 사용하는, 그 때문에 그것의 특유한 성질을 성격이라고 일컫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극히 악하고 해가 될 수도 있다. 행운의 천부와 관련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권력, 부, 명예, 심지어 건강도, 그리고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서의, 자기 상태에 대한 전적인 편안함과 만족도 의기를 불러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자주 사람을 오만방자하게 만든다. 이것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그와 함께 행위하는 전체 원리를 올바르게 하고, 보편적으로-합목적적이게끔 만들어주는 선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말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1절 IV393; 백종현 역 p. 123, 굵은글씨는 원문)

선의지는 그것이 생기게 하는 것이나 성취한 것으로 말미암아, 또 어떤 세워진 목적 달성에 쓸모 있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1절 IV394; 백종현 역 p. 124)

 

2) 의무

- 선의지에서 한 행위는 경향성이 아닌 의무에서 나온 행위이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경우, 보답을 바라서 구해주거나 호감을 느껴서 구해준 경우보다는 아무리 싫더라도 마땅히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구해준 경우에서 더 분명하게 선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동정심과 같은 감정 등 '경향성'에 따라 우연히 '의무에 맞는' 행위를 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오직 '의무이기 때문에' 행한 행위, 즉 선의지에 따르는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정직하게 장사를 하거나 자선을 베푸는 등의 행위를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장기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였거나 동정심 많은 성향에 따른 것이었다면 그것은 '의무에 들어맞는' 행위일 뿐 '의무에서 나온' 행위는 아니다.  
 

3) 동기주의

- 선의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칸트 윤리학의 동기주의적 성격을 보여줌. (동기주의: 도덕적 가치가 행위의 결과보다 의지 내지 동기에 달려 있다는 입장. 결과주의와 대조됨.)
- 칸트가 의지를 중시한 까닭 중 하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당위는 가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결과는 대개 수많은 변수와 우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결과는 도덕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정적 반응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도덕에 본질적일 수 없다. 도덕성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려면, 그것은 의지에 달려 있어야 한다. 이처럼 칸트는 옳고 그름이란 행위의 결과와 상관없이 오직 행위자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인 행위자의 의지로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에 선의지를 강조한다. 
 

2. 도덕 법칙

1) 도덕 법칙

- 선의지에 따른 행위는 곧 의무에서 나온 행위이고, 의무에서 나온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가 있다. 어떤 행위가 의무라는 것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 의해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선의지는 의무의 근거인 도덕 법칙을 따르려는 의지다.

  * 요컨대,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선의지에서 한 행위 = 의무에서 나온 행위 = 오직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한 행위 =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 의해 한 행위 (= 이성적 존재자가 스스로 세운 목적에 따른 행위 p. 189)

- 의무로부터의 행해졌다는 것은 어떤 의도 또는 구체적인 목표나 의지의 대상을 가진다는 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의욕의 원리에 근거하는 것임.

- 원리의 내용이 아닌 형식이 중요. 법칙을 따를 이유는 그 내용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법칙의 형식적 특성을 가진다는 것, 즉 보편성과 필연성을 띤다는 데서 나옴(애링턴 p. 267).

둘째 명제는 이렇다: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해야 할 의도에서 갖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그 행위가 결의되는 준칙에서 갖는 것으로, 그러므로 의무로부터의 행위는 행위 대상의 현실성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욕구능력의 모든 대상들과는 무관하게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원리에 순전히 의존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행위들에서 가질 수 있는 의도들과 그리고 의지의 목적들 및 동기들인 그 행위들의 작용들이 행위들에게 무조건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음은 앞서의 설명으로 명백하다. 그러므로 만약 이 가치가 기대하는 행위들의 작용결과와 관련한 의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러한 행위를 통해 결과할 수 있는 목적들과는 무관한, 의지의 원리 외에 어떤 다른 곳에도 있을 수 없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1절 IV399-400; 백종현 역 p. 132)

앞의 두 명제로부터의 귀결인 셋째 명제를 표현하자면 이렇게 되겠다: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말미암는 행위의 필연성이다.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한 필연적 행위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1절 IV400; 백종현 역 p. 133)

 

2) 실천이성과 자율

-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경향성, 즉 욕구와 감정을 가지고 자연법칙에 따르는 존재인 동시에, 또한 이성적 존재로서 경향성과 무관하게 실천이성이 스스로 수립하고 명령하는 자유의 법칙인 도덕법칙을 따를 수도 있다.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한다. 주어진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이 도덕의 본질이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 아니다.)

- 이렇게 도덕 법칙을 수립하고 명령하는 이성을 실천이성이라고 한다. (이성은 독자적인 동기, 즉 어떤 것이 법칙이기 때문에 행위하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기능을 함)
- 실천이성은 자연적 경향성이나 외부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수립한 법칙을 따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율적이다. 경향성이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이성은 자기 스스로 법칙을 만든다는 점에서 이성적인 존재는 곧 자율적인 존재이다. (자율의 반대는 타율, 즉 외부에서 주어진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자율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초코맛과 딸기맛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 먹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데, 그것을 원하는 나의 욕구는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코맛을 골랐다면, 나는 초코맛에 대한 끌림에 타율적으로 복종한 것이다. 이처럼 칸트의 자유 개념은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선택의 자유보다 훨씬 엄격하다.)

- 도덕 법칙은 우리 안의 실천 이성이 자율적으로 수립한 자유의 법칙이므로 자연법칙과 달리 오로지 이성적 존재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도덕 법칙은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도덕 법칙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요소인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나 자기 행복의 원리에 의해 수립되어서는 안 되고, 일체의 경향성을 배제한 채 수립되어야만 한다. (행복의 원리는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에 토대를 둔 질료적 실천 원리이기 때문에, 도덕의 원리가 될 수 없음)

- 인간은 자율적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만이 도덕적일 수 있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에 의해 움직일 뿐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고, 도덕도 없다. 도덕법칙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유롭다는 증거이고, 인간의 자유는 도덕법칙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다("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이고,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 근거").

- 경험적인 것이 아닌 순전히 이성에 기반한 선험적인 도덕: 칸트는 도덕이 인간의 우연적이고 변화하는 성질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도덕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선한 의지의 절대적 가치는 그것이 경험적 우연성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데 있다. 도덕성의 토대는 욕구가 아닌 이성적 의지다. 이성만으로 보편적 도덕법칙을 정립할 수 있다. 칸트는 합리주의자였다. 경향성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도덕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위험에 빠진 사람를 구해 준다면, 사랑을 느끼지 않는 순간 사람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제 사람들이 어떤 경향성을 갖는지에 대한 경험적 사실은 인류학과 심리학의 과제이지, 도덕과는 별개이다.

[정언명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증명하려고 할 때] 극히 중요한 것은, 이 원리의 실재성을 인간 자연본성의 특수한 속성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의무는 행위의 실천적-무조건적 필연성[실천적-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행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무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 -- 도대체가 명령이라는 것은 이러한 존재자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 에게 타당해야 하고, 오로지 이 때문에 모든 인간 의지에 대해 법칙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성의 특수한 자연소질`로부터, 어떤 감정이나 성벽으로부터, 심지어는 가능한 경우, 인간 이성에 고유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하지는 못한 특수한 성향으로부터 도출된 것, 그것은 우리에게 준칙은 제공할 수 있어도, 그러나 법칙은 제공할 수 없다. 즉 성벽과 경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에 따라 행위하는 주관적 원리는 제공할 수 있어도, 그러나 설령 우리의 모든 성벽과 경향성, 자연적 성향이 반대하더라도, 그에 따라 우리가 행위해야만 하도록 지정된 객관적 원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더욱이 객관적 원리란 그에 찬동하는 주관적 원인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또 그에 반대하는 주관적 원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의무에서의 지시명령의 숭고함과 내적 존엄성을 증명하는 것이며, 주관적 원인들이 그에 반대한다 해서 법칙에 의한 강요를 단지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고, 그것의 타당성에서 아무런 것도 빼앗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우리는 여기서 철학이 실제로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매달리고 의지할 곳이 없으면서도, 확고해야만 하는 미묘한 입장에 놓여 있음을 본다. 여기서 철학은 천성적 감각[주: 곧, 이른바 도덕 감정(moral sentiment) 이론가들이 말하는 도덕감(moral sense)]이나 누구도 알지 못하는 후견자적인 자연본성[주: 곧, 이른바 성선설의 이론가들이 말하는 착한 본성]이 그에게 속삭이는 것들의 전령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법칙들의 자주적 수호자로서 자기의 순정성을 증명해야 한다. 저런 것들은 전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결코 이성이 명하는 원칙들을 제공할 수 없다. 이 원칙들은 철두철미 그것들의 원천을 온전히 선험적으로 가져야만 하고, 이와 함께 동시에 지시 명령하는 권위를 가져야만 한다. 이런 권위는 인간의 경향성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법칙의 최고 권력과 법칙에 대한 당연한 존경에서 기대하며,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게 자기경멸과 내적 혐오를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인 모든 것은, 윤리성의 원리의 첨가물로서, 그에 대해 전적으로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윤리의 순정성 자체에도 최고로 불리한 것이기도 하다. 윤리에 있어 단적으로 선한 의지의 고유한, 모든 가격을 뛰어넘는 가치는, 행위의 원리가 오직 경험이 제공할 수 있는 우연적인 근거들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 있다. 경험적인 동인들과 법칙들 가운데서 원리를 찾아내려는 이런 태만 내지는 매우 비천한 사고방식에 대해 우리가 아무리 많이, 그리고 아무리 자주 경고를 해도 그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성은 지친 나머지 기꺼이 이 베개 위에서 쉬려 하고, 달콤한 현혹들 -- 이것들이 이성으로 하여금 유노[Juno] 대신에 한 아름 구름을 껴안게 한다 -- 에 꿈꾸면서, 윤리에다 전혀 다른 혈통의 지체들로 묶어 만든 잡종을 슬쩍 집어넣는다. 이 잡종은 사람들이 무엇이건 보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한 번이라도 덕을 참모습에서 본 적이 있는 이에게는 덕과 비슷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25-426; 백종현 역 pp. 171-173)

만약 의지가 그의 준칙들이 그 자신의 보편적 법칙수립에 적합하다는 점 외의 다른 어디에서, 그러니까 만약 의지가 자기 자신을 넘어 나가서 그의 객관들 중 어느 하나의 성질에서 자기를 규정하는 법칙을 구한다면, 언제나 타율이 나타난다. 그때에는 의지가 자기 자신에게 법칙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이 의지와의 관계를 통해 이 의지에게 법칙을 준다. 이 관계는, 그것이 경향성에 의거하든, 이성의 표상에 의거하든 간에, 오로지 가언적인 명령들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즉 나는 다른 무엇인가를 의욕하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도덕적인 그러니까 정언적 명령은, 내가 비록 다른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러그러하게 행위해야 함을 말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41; 백종현 역 pp. 193-194)

경험적 원리들은 그 위에 도덕법칙들을 정초하는 데는 도무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도덕법칙들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차별 없이 타당할 보편성이, 즉 그로 인해 도덕법칙들에게 부과되는 무조건적인 실천적 필연성이, 만약 그것들의 기초가 인간의 자연본성의 특수한 설비나 인간의 자연본성이 처해 있는 우연적인 상황에서 얻어진다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 [자신의] 행복의 원리는 가장 배척되어야 할 것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42; 백종현 역 p. 195)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가 자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 말고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이다'는 명제는 단지, 자기 자신을 또한 보편적 법칙으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 외의 다른 어떤 준칙에 따라서도 행위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표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정언명령의 정식이자 윤리성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와 윤리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한가지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3절 IV447; 백종현 역 p. 202)

# 나는 여전히 '인간의 자연본성'에서만 당위가 도출될 수 있을 것 같고... 욕구나 경향성에 복종하는 걸 넘어서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그 대안은 더 깊은 욕구나 반성된 경향성이지 어떻게 순수한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을 하 수 있는지 모르겠고... 공정성이라는 유인원적 직관이라도 밑바탕에서 작용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칸트가 어떻게 당위를 확립한 건지 이해를 못했다... 칸트 공부 하나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 

 

- cf. <계몽이란 무엇인가?> 도덕은 우리가 성숙해질 것, 자신을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음.

Enlightenment is man's emergence from his self-imposed nonage. Nonage is the inability to use one's own understanding without another's guidance. This nonage is self-imposed if its cause lies not in lack of understanding but in indecision and lack of courage to use one's own mind without another's guidance. Dare to know! (Sapere aude.) "Have the courage to use your own understanding," is therefore the motto of the enlightenment.
   Laziness and cowardice are the reasons why such a large part of mankind gladly remain minors all their lives, long after nature has freed them from external guidance. They are the reasons why it is so easy for others to set themselves up as guardians. It is so comfortable to be a minor. If I have a book that thinks for me, a pastor who acts as my conscience, a physician who prescribes my diet, and so on--then I have no need to exert myself. I have no need to think, if only I can pay; others will take care of that disagreeable business for me. Those guardians who have kindly taken supervision upon themselves see to i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mankind--among them the entire fair sex--should consider the step to maturity, not only as hard, but as extremely dangerous. 

 

3. 정언명령

1) 도덕 법칙은 명령, 그것도 정언명령의 형태를 띰

- 자연법칙은 필연적인 법칙으로, 명령할 필요가 없이 모든 자연현상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반면 도덕법칙이성의 명령이다. 도덕 법칙이 인간에게 의무이자 명령의 형태로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이 이성과 경향성을 함께 지닌 이중적 존재이기에 항상 도덕 법칙에 일치하게 의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의 의지와 도덕 법칙은 일치하므로, 신에게는 도덕 법칙이 의무로 부여되지 않는다.)
- 도덕 법칙은 명령 중에서도 다른 어떤 목적을 전제하지 않는 무조건적 명령,정언 명령의 형태를 띤다. 정언 명령의 반대는 가언 명령, 즉 “네가 x를 원한다면, 너는 y를 해야 한다(예: 돈을 잘 벌고 싶으면,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을 규정하는 명령이다. 도덕은 어떤 다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정언 명령만이 도덕 법칙이 될 수 있다.
 

2) 미정적 및 확정적 가언명령과 정언명령

- 가언명령은 ① 미정적 가언명령(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의 명령)과  확정적 가언명령(모두가 실제로 확실하게 갖는 목적인 행복을 위한 수단의 명령)으로 구분된다. 
- 세 가지 원리들은 다음과 같이도 부를 수 있다.
   ① 미정적 가언명령 = 숙련의 규칙들 = 기술적(기술에 속하는) 명령
   ② 확정적 가언명령 = 영리함의 충고들 = 실용적(복지를 위한) 명령 (행복의 내용은 규정되기 어렵고,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확정적 가언명령은 엄격한 규칙이 아닌 '충고'에 머무름)
   ③ 정언명령= 윤리성의 지시명령들(법칙들) = 도덕적(자유로운 처신 일반에, 다시 말해 윤리에 속하는) 명령
- 숙련의 명령과 영리함의 명령의 가능성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만(내가 그 목적을 의욕한다면, 나는 또한 그 수단도 의욕한다는 것은 분석적으로 참임), ③윤리성의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문제가 됨. 

그러므로 가언명령은 단지, 행위가 여느 가능한 또는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다[선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전자의 경우에 가언명령은 미정적-실천 원리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확정적-실천 원리이다. 행위를 어떤 의도와도 관계없이, 다시 말해, 또한 어떤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단언하는 정언명령은 명증적 (실천) 원리로 간주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15; 백종현 역 pp. 155-156)

① 미정적 가언명령: 모든 학문은 어떤 실천적인 부문을 가지고 있는바, 이 부문은 어떤 목적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과제들과, 그 목적이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의 명령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명령들은 일반적으로 숙련[성]의 명령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는 과연 목적이 이성적[합리적]이며 선한 것이냐는 전혀 문제가 아니고, 오로지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만이 문제이다. 자기 환자를 근본적으로 건강하게 하기 위한 의사의 처방과 대상자를 확실하게 살해하기 위한 독살자의 처방은, 각기 자기의 의도를 완전하게 실현하는 데 쓰이는 그런 한에서는,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15; 백종현 역 p. 156)

② 확정적 가언명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서 (명령들이 이들에게, 곧 의존적인 존재자들인 이들에게, 걸맞은 한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전제될 수 있는 하나의 목적, 그러므로 그들이 한낱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자연필연성에 따라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확실하게 전제할 수 있는 하나의 의도가 있다. 그것은 행복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행복을 촉진[장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행위를 반드시 실천해야 함]을 표상하는 가언명령은 확정적이다. 사람들은 이 가언적 명령을 단지 어떤 불확실한, 한낱 가능한 의도에 대해서만 필연적인 것으로 개진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확실하게 선험적으로 모든 인간에게서 전제할 수 있는 의도에 대해서 필연적인 것으로 개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의도는 인간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최대의 안녕을 위한 수단 선택에서 숙련을 좁은 의미에서 영리[현명][함]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의 선택에 관련하는 명령, 다시 말해, '영리[현명]하라'는 훈계 또한 언제나 가언적이다. 그 행위는 단적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다른 어떤 의도를 위한 수단으로만 지시명령되는 것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15-416; 백종현 역 pp. 157-158)

③ 정언명령: 마지막으로, 어떤 처신에 의해 도달해야 할 여느 다른 의도를 조건으로서 근저에 두지 않고, 이 처신을 직접적으로 지시명령하는 명령이 있다. 이 명령은 정언적이다. 이 명령은 행위의 질료 및 그 행위로부터 결과할 것에 상관하지 않고, 형식 및 그로부터 행위 자신이 나오는 원리에 상관한다. 행위의 본질적으로-선함은, 그 행위로부터 나오는 결과가 무엇이든, 마음씨에 있다. 이 명령은 윤리[성]의 명령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16; 백종현 역 p. 158)

무릇 법칙만이 무조건적인, 그것도 객관적인,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타당한 필연성의 개념을 동반하며, 지시명령이란 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시 말해 경향성에 반하여서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16; 백종현 역 p. 158)

- 정언명법은 근본적으로 하나이지만 몇 가지 정식으로 표현된다("동일한 원칙의 세 가지 정식일 따름이다" - p. 187).
 

3) 보편화 정식과 자연법칙 정식

- 첫 번째 정식은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로,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이라고 불린다.
- 준칙행동의 바탕에 있는, 의지의 원칙이다.

- 자연법칙 정식: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 어떤 행위가 도덕적이려면, 그 바탕에 있는 준칙이 유사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어야 한다. 보편화 원칙은 자신을 예외로 취급하지 말고, 불편부당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준칙에 따라 모든 사람이 행위할 것을 일관되게 의욕할 수 없다면, 그런 준칙은 자멸적이므로 거부되어야 한다.

(동기주의: 이처럼 도덕적 가치는 행위가 성취하려고 하는 목적이 아니라 행위의 바탕에 있는 준칙, 즉 동기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길에서 다친 사람을 도와줬을 때 그것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가능한 한 도와주어야 한다.”는 준칙에 따른 행위였을 수도 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서 보답을 얻을 것 같으면, 도와줘야 한다” 또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불쌍한 감정이 들면, 도와줘야 한다”는 준칙에 따른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 중에서 보편화 가능한 준칙에 따르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이다.)
- 예: 돈을 빌리기 위해 돈을 갚겠다고 거짓으로 약속하는 경우, 이 행위의 준칙은 '내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거짓 약속을 하고 돈을 빌려야 한다.'이다. 이를 보편화하면 '누구든지 돈이 필요할 때마다, 거짓 약속을 하고 돈을 빌려야 한다.'이다. 그러나 이런 법칙이 존재하면 누구도 약속을 믿지 않을 것이고, 어떤 약속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준칙은 자멸적이다. 

내가 가언명령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나에게 조건이 주어질 때까지 나는 그 명령이 무엇을 함유할 것인가를 미리 알지 못하다. 그러나 내가 정언명령을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을 함유하는가를 즉각 안다. 무릇 명령은 법칙 외에 단지, 이 법칙에 적합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함유하지만, 법칙은 그것이 제한받았던 아무런 조건도 함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남는 것은 오로지, 행위의 준칙이 그에 적합해야 할, 이 법칙 일반의 보편성뿐이며, 이 적합성만이 명령을 본래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그러므로 정언명령은 오로지 유일한즉, 그것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제 의무의 모든 명령들이 그것들의 원리로서의 이 유일한 명령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면, 비록 우리가 사람들이 의무라고 부르는 것이 도대체 공허한 개념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미결로 남겨둔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그 개념으로써 무엇을 생각하고, 이 개념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는 제시할 수 있다.
  그에 따라 결과들이 일어나는 법칙의 보편성이 본래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즉 형식의 면에서) 자연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이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 사물들의 현존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형성하므로, 의무의 보편적 명령도,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20-421; 백종현 역 pp. 164-165)

# 내가 무슨 준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거 지당하고 유익한 통찰이다. 행동 자체나 결과보다도 의도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의도만이 자유와 책임과 도덕의 영역이다. 공리주의에도 충분히 수용될 수 있고 수용돼야 하고 이미 수용됐다. (어떤 이론에서든 동기가 중요하다는 포이만의 지적이 맞는 듯.) 실제 결과가 어떻게 됐든 행위자가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근거로 행동했는지가 중요하다. 행위자를 평가할 때는. 행위자가 아니라 사태를 평가하는 건 또 다른 문제고.  

 

4) 완전한·불완전한 의무

- 완전한(엄격한) 의무: 사유에서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에 결코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생각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의욕될 수도 없는 것
- 불완전한 의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과 모순되기 때문에 의욕될 수 없음. (애링턴 272: 불완전한 의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행할지가 재량에 맡겨지고, 예외를 허용함[?])
- ⓛ 자살: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 위반. 자기애에 근거해 자살을 요구하는 준칙은 자연법칙이 생명을 촉진하는 법칙이자 동시에 생명을 파괴하는 법칙이라는 모순을 인정해야만 성립하 수 있다. 모순은 자연 세계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 준칙은 보편적 자연법칙의 정식을 위반한 것이다. 

이제 그는, 그의 행위의 준칙이 실로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한다. 그런데 그의 준칙은, '나는, 만약 생이 연장되는 기간에 쾌적함을 약속하기보다는 오히려 해악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면, 자기사랑에서 차라리 생을 단축하는 것을 나의 원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 그때 사람들이 이내 알게 되는 바는, 그것의 사명이 생의 촉진을 추동하는 것인 바로 그 감각이 생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러므로 자연으로 존립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니까 저 준칙이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생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모든 의무의 최상 원리와 전적으로 상충한다는 사실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22; 백종현 역 p. 166)

 
- ② 거짓 약속: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 위반. 모든 사람이 거짓 약속의 준칙에 따라 행동하면, 어떤 약속도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 준칙은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없다.
- ③ 자기 개발 포기: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 위반. 사람들이 재능을 개발하지 않고 자신이 생을 향락에 바치는 사태는 자연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준칙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는 없다.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능력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의욕하기 때문이다.
- ④ 타인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 타인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 위반. 곤경에 처한 사람에 대한 자선 거부의 준칙이 보편적 자연법칙처럼 지배하는 세계는 가능한 세계이다. 하지만 그런 준칙이 어디서나 타당하기를 의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5) 목적 정식

- 두 번째 정식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우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로, 목적의 원리라고 불린다.
- 인간이성적이고, 도덕법칙을 세우는 자율적 주체이기 때문에 목적 자체.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29; 백종현 역 p. 176-177)

- 이 명령을 앞의 예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각 행위가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성의 이념과 양립할 수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기) 
   ⓛ 자살: "만약 그가, 힘겨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는 그의 인격을, 생이 끝날 때까지 견딜 만한 상태로 보존하기 위한,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p. 177)
  ② 거짓 약속: 타인을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는 것. "왜냐하면 내가 그러한 약속에 의해 나의 의도를 위해 대하고자 하는 그 사람은 그에 대한 나의 처신 방식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 자신 이 행위의 목적을 함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p. 178)
   ③ 자기 개발 포기: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성의 보존과는 양립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이 목적의 촉진과는 양립할 수 없을 터이다."
   ④ 타인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 타인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각자가 자기의 힘이 닿는 한, 타인의 목적들을 촉진시키고자 진력하지 않는다면, 목적 그 자체인 인간(성)에 단지 소극적으로 합치할 뿐, 적극적으로 합치하느 것이 아니다. 만약 저 표상이 우리에게 모든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나의 목적들이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의 모든 준칙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법칙수립하는 자로 간주되어야 하는바, 그것은 이 관점에서 그 자신과 그의 행위들을 판정하기 위해 그러하거니와, 이성적 존재자의 이런 개념은 이 개념에 부속해 있는 매우 생산적인 개념, 곧 목적의 나라라는 개념에 이른다. 
   나는 '나라'라는 말이 공동의 법칙들에 의한 서로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법칙들은 그것들의 보편적 타당성에 따라 목적들을 규정하기 때문에, 이성적 존재자들의 개성적인 차이와 함께 그것들의 사적인 목적들의 일체 내용을 도외시한다면, 체계적으로 연결된 (목적 그 자체인 이성적 존재자들의, 그리고 각각의 이성적존재자가 스스로 세울 수있는 고유한 목적들의) 모든 목적들의 전체가 생각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원리들에 따라서 가능한, 목적들의 나라가 생각될 수있다.
   무릇, 이성적 존재자들은 모두, 그들 각자가 자기 자신 및 다른 모든 이들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취급[대]해야만 한다는 법칙 아래에 종속해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공동의 객관적인 법칙들에 의한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이 생긴다. 다시 말해, 이 법칙들은 바로, 목적이자 수단인 이 존재자들 상호 간의 관계를 의도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목적들의 나라 -- 물론 하나의 이상일 뿐이지만 -- 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하나의 나라가 생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33; 백종현 역 p. 183)

 

6) 존엄성

-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엄성을 가진다. 이성적 존재가 존엄성을 갖는 근거는 자율성, 즉 자기 스스로 도덕 법칙을 수립한다는 데 있다.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그 자신에게 (...) 법칙인 그런 의지의 성질이다." p. 193)

목적들의 나라에서 모든 것은 가격을 갖거나 존엄성을 갖는다. 가격을 갖는 것은 같은 가격을 갖는 다른 것으로도 대치될 수가 있다. 이에 반해 모든 가격을 뛰어넘는, 그러니까 같은 가격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존엄성을 갖는다.
   보편적인 인간의 경향성 및 필요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시장가격을 갖는다. 필요와 상관없이, 어떤 취미나 순전히 무목적적인 유희에서 우리 마음 능력의 흡족함에 따르는 것은 애호가격을 갖는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이루는 것은 한낱 상대적 가치, 다시 말해 가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적 가치, 다시 말해 존엄성을 갖는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34-5; 백종현 역 p. 185)

그러나 모든 가치를 규정하는 법칙수립 자신은 바로 그 때문에 존엄성을, 다시 말해 무조건적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가져야만 하고, 존경이라는 낱말만이 이에 대해 이성적 존재자가 행해야 할 평가에 유일하게 알맞은 표현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자율은 인간과 모든 이성적 자연존재자의 존엄성의 근거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36; 백종현 역 p. 187)

 

7) 목적의 나라의 정식

- 목적의 나라의 정식: "각 이성적 존재자는, 마치 그가 그의 준칙들을 통해 항상 목적들의 보편적인 나라에서 법칙수립적 성원인 것처럼 그렇게 행위해야 한다"

각 이성적 존재자는, 마치 그가 그의 준칙들을 통해 항상 목적들의 보편적인 나라에서 법칙수립적 성원인 것처럼 그렇게 행위해야 한다. 이 준칙들의 형식적 원리는, '마치 너의 준칙이 동시에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의) 보편적 법칙으로 쓰여야 할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 IV438; 백종현 역 p. 190)

- 각자는 목적의 나라의 준법적 시민인 동시에 자율적으로 입법하는 수장으로 생각되어야 함. (애링턴 280-281: 민주주의의 철학적 토대.)

 

정언명령의 정식들(https://de.wikipedia.org/wiki/Kategorischer_Imperativ)

 

4. 자유와 자율

- 정언명령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감성세계에 속하는 동시에 예지 세계에도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구와 경향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현상계 또는 감성세계의 일부인 동시에, 순수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따르는 오성세계의 일부다. 자유필연은 모순되지 않는다.

- 자연의 관점과 자유의 관점 모두 불가피하다. 설명과 이해를 위해서는 자연의 관점을 취하고, 행위를 위해서는 자유의 관점을 취한다. 우리는 자유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자유는 경험 개념이 아닌 이성의 이념이다(IV455, p. 215). 동시에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를 자유의 이념 아래서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을 자연과 자유 둘 다로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 이념에서 본래 도덕법칙을, 곧 의지의 자율의 원리 자체를 단지 전제할 뿐이고, 이 원리의 실재성 및 객관적 필연성은 그 자체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3절 IV449; 백종현 역 p. 205)

그 때문에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예지자로서 (그러므로 그의 하위 능력들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는 두 가지 입장을 가지는바, 그는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그의 힘들을 사용하는 법칙들, 따라서 그의 모든 행위들의 법칙들을 인식할 수 있다. 즉 그는 일단은 감성세계에 속해 있는 한에서 자연의 법칙들(타율) 아래에 있고, 둘째로는, 예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독립적으로, 경험적이지 않고, 순전히 이성에 기초하고 있는 법칙들 아래에 있는 것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3절 IV452; 백종현 역 p. 210)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오성세계의 성원으로 놓고, 의지의 자율을, 그 자율의 결과인 도덕성과 함께 인식하되, 그러나 우리가 [윤리 법칙 준수에] 의무 지어져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또한 동시에 오성세계에도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3절 IV453; 백종현 역 p. 211)

그러므로 철학은 실로, 동일한 인간 행위들에서 자유와 자연필연성 사이에는 아무런 진정한 모순이 만나지지 않는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3절 IV456; 백종현 역 p. 215)

 
- 우리가 도덕 법칙 아래에 있다는 것과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동일한 말이고, 그래서 하나를 다른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순환론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칸트는...(뭐라 설명한 건지는...)
-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이고,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 근거"

 

5. 도덕과 행복의 관계: 최고선

1) 도덕과 행복

- 칸트는 행복이 도덕 원리로 기능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지, 행복이 도덕과 대립해야 한다거나 행복을 추구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님. 나아가 모든 이성적 존재는 행복을 욕구함.

- 또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간접적인 의무가 있다. 행복은 의무의 이행을 위한 수단을 포함하며, 불행은 의무를 어기려는 유혹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도덕에 도움이 되는 수단이다. 

- 칸트에 의하면, 최고선이란 완성된 도덕성과 행복의 종합, 즉 덕에 상응하여 주어진 행복임(행복이 의지의 규정 근거인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에 근거해 규정된 도덕적 의지가 그 도덕성에 입각해 행복을 바라고 지향함). 완성된 도덕성을 소유하는 것은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는 것을 의미함. "the highest created good is the most perfect world, that is, a world in which all rational beings are happy and are worthy of happiness."(Lectures on Ethics, 6; 애링턴 290 재인용)
- "도덕은 본래,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관한 교설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는 행복을 누릴 만한 품격(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설이다."(?) 도덕의 원리와 행복의 원리는 구분되는 것이다.
 

2) 순수실천이성의 두 가지 요청

- 인간의 유한성('인간의 근본악'): (1) 의지의 허약성: 스스로 결단한 바를 고수하지 못함, (2) 의지의 비순수성: 겉으로는 도덕적 의도를 내세워도 속으로는 여러 잡다한 동기가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음, (3) 마음의 도치성: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현상에 의해 규정되는 부자유한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성향을 가짐
- 이처럼 짧은 한 생애에서 최상의 선을 성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의지는 최고선을 갈망하고, 최고선의 필수조건으로서 도덕성의 완성을 요구한다. 도덕성의 완성의 요구는 그것이 가능함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그것은 가능한가?
- 첫 번째 요청: 영혼불멸. (실천이성비판, 128-9, 122; 애링턴 291-2)
- 두 번째 요청: 신의 존재. 덕과 행복의 결합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고 신을 필요로 함. (실천이성비판, 130-1, 124; 애링턴 292)
 
#??
 

6. 비판 및 현대 의무론

1) 의의

- [천재교과서] 칸트의 의무론은 보편주의 정신과 인격주의 정신을 제시한다. 보편주의 정신은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적용할 수 있는 도덕 법칙을 수립해야 한다는 관점이고, 인격주의 정신은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칸트의 의무론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초석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도덕적 지침을 제시한다는 장점이 있다. 
 

2) 한계

- [천재교과서] 칸트의 의무론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우리의 실제 삶에 필요한 구체적인 행위 규칙을 제공해 줄 수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무고한 사람을 구하고자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 '무고한 사람을 죽게 하지 말라.'라는 의무와 '거짓말하지 말라.'라는 의무가 서로 상충한다. 그런데 칸트의 의무론에 따르면, 이 두 가지의 의무는 모두 보편화 가능하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의무가 더 우선하는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포이만]
- 결과를 무시. 의도는 좋았지만 무능하여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에도 과연 칸트의 주장대로 결과가 도덕적 가치와 무관한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됨.
- 칸트는 연민과 같은 감정들을 도덕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 감정이 도덕의 핵심적인 측면 중 하나라고 주장함
- 칸트는 엄밀하게 말하면 정언 명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여기서 다른 모든 특수한 도덕 의무들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언 명법이 도덕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우선 어떤 준칙이든 보편화될 수 있기만 하면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신발끈을 맬 때 왼쪽부터 매라'와 같은 사소한 준칙들이나, '들키지 않는다면 표절하라', '모든 미국인을 죽여라'와 같은 비도덕적 준칙들도 모순 없이 보편화 가능해 보인다. 한편 보편화 불가능한 준칙이라고 해서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아침 여덟 시에 화장실 물을 내려라'라는 준칙을 모든 사람이 따른다면 하수 체계가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목적의 원리(두 번째 정식)가 자연법칙의 원리(첫 번째 정식)과 실질적으로 일치한다는 칸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원리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자연법칙의 원리에 내용을 첨가한다. 도덕원리는 보편화 가능성 검사를 통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목적 검사도 통과해야 한다. 그러면 이기주의나 미국인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원리는 제외될 것이다.
- 목적의 원리에 관해서 제기되는 비판으로, 이성만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있다. 이성 이외에 다른 가치나 존재의 상태들도 도덕적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지만, 고통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동물에게 불필요한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이성이 본래적 가치라면, 이성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보다 더 존엄하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비판이 있다. 사람들은 이성적 능력에 비례하여 대우받아야 한다. 아기보다 고릴라를 더욱 목적 자체로 대우해야 한다.
- 칸트의 정언명법은 절대적이고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규칙을 낳는다고 일반적으로 해석된다. 칸트는 살인마가 내 집에 숨은 친구를 쫓아와 그의 행방을 물을 때조차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 대부분의 직관에 어긋난다. 그래서 현대의 칸트주의자인 로스는 조건부 의무 접근법을 제시한다. 
 

3) 로스의 조건부 의무론

- 칸트 윤리학을 재해석하여 발전적으로 계승한 현대 칸트주의를 대표하는 로스(Ross, W. D., 1877~1971)는 칸트 의무론의 한계인 도덕적 의무끼리 충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대적인 도덕적 의무보다 느슨한 조건부(prima facie) 의무를 제시한다.
- 로스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약속 준수, 해악 금지 등 여러 가지 의무가 있다. 이러한 의무들은 조건부 또는 직견적 의무로, 다른 의무와 충돌하지 않는 한 실제적 의무가 되어 우리를 잠정적으로 구속한다. 그러나 만약 두 가지 조건부 의무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면, 그중 더 우선하는 의무는 실제적 의무로 드러나게 되고 다른 의무는 유보된다. 각 상황에서 어떤 의무가 우선하는지는 직관이 결정해야 한다.
- 예를 들어 친구를 만나러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물에 빠진 아이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약속 이행의 의무보다 선행의 의무를 더 우선하는 의무로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생명 구조가 약속 지키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로스는 각 상황에서 어떤 의무가 우선하는지 결정하는 역할을 도덕적 직관이 수행한다고 봤지만, 칸트의 경우 정언명법의 두 번째 정식인 목적의 원리가 기여할 수 있다. 자신의 실제적 의무를 결정할 때, 행위자는 어떤 의무가 최대한으로 인격을 목적으로 대우하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칸트 이론의 성격을 절대주의에서 온건한 객관주의로 변형시킨다. 의무들은 객관적이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초판(A판)이 출판된 1785년에 작곡된 음악)
(132) Mozart - Piano concerto n°20 K.466 - Pollini / Vienna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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