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ington, R. L. (1998). Western ethics: An historical introduction. Blackwell Publishers.
박종현 역주. (2005). 플라톤의 국가·政體(개정 증보판). 서광사.
김병찬 2022 임용 윤리 교재
2024 수능 대비 수능특강
1. 동굴의 비유
1) 비유
- (<국가> 514a 이하) 우리의 처지는 마치 동굴의 벽만을 볼 수 있도록 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와 같다. 죄수들 뒤의 담 위로 사람과 동물 등의 상이 지나가고 그 뒤에는 불이 있어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죄수들은 그림자가 진짜 사람과 동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다 몇몇 죄수들이 고개를 돌려 불과 상들을 직접 보도록 강제되면, 죄수들은 담 뒤로 지나가는 여러 상들이 그림자보다 더 큰 실재성을 지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아가 죄수들이 동굴 밖으로 나오도록 강제한다면, 그들은 동굴 밖의 사람과 동물들이 진짜이며 동굴 안에서 본 상과 그림자들은 실재의 모사나 반영일 뿐임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실재성의 정도와 지식의 정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그들은 동굴 안으로 돌아와 동료 죄수들을 깨우치도록 강제되어야 할 것이다. 동굴 속 죄수들은 그들을 불신하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도 사슬에서 풀려나 실재를 본 다음에야 앞서 나갔다 온 이들의 이야기를 믿게 될 것이다.
2) 해설
- 동굴 속은 현상계이고, 동굴 바깥은 이데아계를 가리킴. 동굴 바깥의 사물들은 여러 가지 이데아들이고,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를 상징함.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임. 동굴 바깥으로 나가 실제 사물들과 태양을 본 사람은 철학자를 상징함. 또한 철학자의 견해는 아직 동굴에만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부당할 것이라는 것이 표현됨.
- 이 비유는 철학적 반성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표현함. 일상적인 도덕적 사고는 단지 벽에 비친 그림자에 대한 모호한 상상들과 같고, 힘든 과정을 통해 이러한 제한된 시야를 벗어나야 진정한 실재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가능함.
- 이러한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거나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영혼을 전환시킴으로써 무지를 자각하고 스스로 진리를 파악하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태가 자연스레 진행된다면,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그가 엉터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에 좀은 더 가까이 와 있고 또한 한결 더한 실상을 향하여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더군다나 지나가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가리켜 보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서는 대답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는 당혹해 하며, 앞서 보게 된 것들을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더 참된 것들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국가> 515c-d, 박종현 역)
“그러면, 여보게나 글라우콘! 이 전체 비유를 앞서 언급된 것들에다 적용시켜야만 하네. 시각을 통해서 드러나는 곳을 감옥의 거처에다 비유하는 한편으로, 감옥 속의 불빛을 태양의 힘에다 비유함으로써 말일세. 그리고 위로 ‘오름’과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의 구경을 자네가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으로 향한 혼의 등정으로 간주한다면, 자네는 내 기대에 적중한 셈이 될 걸세. 자네는 이걸 듣고 싶어하니 말일세. 그렇지만 그게 진실인지 어쩐지는 아마도 신이나 알 걸세.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 같으이. 즉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이네. 그러나 일단 이를 본 다음에는, 이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아름다운 것의 원인이라고, 또한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는 빛과 이 빛의 주인을 낳고,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에서도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또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 하는 자는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네.” 내가 말했네. (<국가> 517a-c, 박종현 역)
# 좋음의 이데아: 어렵다.
# 플라톤은 동굴 밖으로의 등정이 정말 어려운 과정임을 강조한다. 죄수가 실물을 처음 봤을 때는 그것보다 원래 보던 그림자가 진짜라고 고집한다든지, 사물을 보는 데는 익숙해짐이 필요하다든지, 계속 억지로 끌고 올라가야 한다든지, 바깥 세상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동료 죄수들이 결코 믿어주지 않는다든지...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불신과 고통을 거쳐 도달되어야 하는 지식인가? 이데아 도대체 무엇인가...?
2. 플라톤의 극복 대상
1) 케팔로스와 폴레마르코스: 정의에 대한 통속적 견해들
- 나이 많고 부유한 상인 케팔로스에게 소크라테스가 노년과 부에 대해 질문하자, 케팔로스는 노년이 성욕을 벗어나 대화라는 더 고상한 쾌락을 즐기게 해주어서 좋으며, 부의 장점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점과 빚을 갚고 신들에게 바쳐야 할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부는 정의를 가능하게 하고 마음의 평안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진실을 말하는 것과 남에서 빌린 바를 갚는 것이라고 무조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런 일을 행하는 것도 때로는 옳지만 때로는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331b-c) 라고 묻는다. 무기를 맡겼던 친구가 미친 상태로 돌아와서 무기를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 주면 안 되고, 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는 것도 정의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는 것과 빌린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정의의 의미는 아니다”(331c-d) 요컨대 케팔로스는 도덕적 삶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 즉 도덕적 삶은 남들을 속이지 않고 “진실을 말하라” 거나 “빚을 갚으라”는 등의 단순한 규칙을 따르는 문제라는 관점을 표현하며,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항상 옳지는 않다고 한다.
- 폴레마르코스는 정의에 대한 또 다른 전통적인 개념에 따라, 정의란 친구에게 선을 행하고 적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에게든 해를 끼치는 것이 올바른 사람이 할 일인가?”(335b)라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 개든 말이든 인간이든 - 그것을 덜 탁월하게 만드는 것, 그것의 고유한 덕을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그 사람을 인간의 덕이라는 측면에서 더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덕은 정의이므로, 어떤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그 사람을 정의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은 적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를 통해서 사람들을 부정의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차게 만드는 것은 열의 기능이 아니라 열과 반대되는 차가움의 기능이듯이, 어떤 것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선의 기능이 아니라 선과 반대되는 기능이다. 해를 입히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의 기능이 아니라 부정의한 사람의 기능이다(343c-d). 적들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그들을 부정의하게 만드는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일 수는 없다.
# 우리가 해를 입었다, 안 됐다,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덜 좋은 사람, 덜 정의로운 사람이 되었을 때뿐이라는 소크라테스의 관점 늘 좋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겪고 느끼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임.
2) 트라시마코스: 비도덕주의
-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더 강한 자들의 이익”(338c)이라고 주장했다가, 일련의 논박 과정(앞 게시물 참조) 후 최종적으로 “정의란 사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 즉 더욱 강한 자 그리고 통치자들의 이익이며 복종하고 섬기는 자들 자신에게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은 이와는 반대로 참으로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조종하며,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저 강한 자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행하여,] ...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지극히 순진한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즉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에 비하여 항상 조금밖에 얻을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343c-d)라고 주장한다. 즉, 트라시마코스의 숙고된 견해는 도덕은 자신이 아닌 강한 자에게, 즉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행하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의 구별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습적 수단이며, 현실적으로 행복은 붙잡히지 않을 수 있는 한 비도덕적으로 행위함으로써 가장 잘 성취된다. 행복은 부도덕을 통해 얻어진다. 완벽하게 악덕한 사람은 붙잡히지 않고 가장 큰 성공과 보상을 얻는다.
- <국가>는 부분적으로 트라시마코스의 이러한 비도덕주의와 자신이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행위에 대해 현실적이라는 주장을 공격하고자 함. 정의가 정말 이익이라는 것, 정의로운 사람의 삶은 부정의한 사람의 삶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부정의한 사람의 삶은 사실 비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임.
- <국가>는 또한 인습주의conventionalism, 즉 도덕적 구별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며 그것이 본성상의 진정한 구별을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견해에 대한 공격이기도 함. 인습주의자들은 인습적 도덕 규칙을 따르는 것은 기껏해야 자신을 보호하거나 인정과 명예를 가져다주는 한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라고 주장함. 인습적인 도덕 규칙을 정당화해주는 더 이상의 심층적인 근거는 없다고 봄. <국가>2권에서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를 통해 소크라테스와 도덕적 삶에 반대하는 인습주의적 주장을 최대한 강하게 제시함.
3)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도전: 인습주의
(가) 귀게스의 반지
- 평범하고 선량한 양치기 귀게스가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반지를 갖게 되자 궁전으로 가서 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유혹하여 왕관을 차지했다는 이야기. 우리도 투명반지를 갖게 되어 귀게스가 한 것과 같은 일들을 하고도 붙잡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정의롭게 행위하는 것은 처벌의 두려움 때문일 뿐이며,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그 자체로 어떤 본래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
(나) 세 종류의 좋음
- 좋은 것을 (1) 오직 그 자체로 좋은 것, (2) 그 자체로도 좋고 그 결과도 좋은 것, (3) 그 자체로는 부담스럽지만 그 결과는 좋은 것으로 나눌 때, 많은 사람들은 정의가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함.
(다) 플라톤의 기획
- 플라톤은 트라시마코스의 비도덕주의와 이러한 인습주의와 같은 도덕에 대한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관점의 매력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그럼에도 도덕적 삶이 비도덕적 삶이나 자기 이익 또는 사회적 관습에의 순응을 도모하는 삶보다 좋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함.
- 플라톤의 윤리 이론은 상대주의와 인습주의의 반대편에서 정의의 타당성을 인간 본성과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에 기초하고자 한다. 즉, 그는 도덕의 근거를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을 통해 확보한다. 도덕적 기준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임의적인 관습이 아니라 자연적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본성을 갖기 떄문에, 도덕은 보편적이다. 상대주의와 인습주의는 인간 본성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진정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가 일단 파악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도덕적인 삶이 누구에게나 가장 큰 보상이 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78) 결국 플라톤은 자신이 도덕에 대해 더 “현실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 본성에 대한 트라시마코스나 프로타고라스의 이론은 일면적이고 불완전하다.
# 애링턴의 설명 좋다.
3. 국가의 정의와 영혼의 정의
1) 이상 국가
- 국가와 개인은 유비 관계(국가는 개인을 큰 글자로 쓴 것과 같음)이므로, 국가의 정의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 영혼에서의 정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됨.
- 국가의 기원: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분업이 이루어지고, 세 계급이 등장한다. (1) 통치자, (2) 방위자, (3) 생산자[수특의 번역어. 통치자와 방위자를 아울러 수호자라고 함.]
- 각 계층에 필요한 덕: (1) 통치자: 지혜. 국가 전체의 좋음을 파악해야 함. (2) 방위자: 용기. 통치자의 지혜를 흔들림 없이 따르는 것. (3) 생산자: 절제. 욕망을 조절하는 것.
- 그런데 절제는 생산자뿐 아니라 모든 계층에 필요함. 통치자가 지배하고 나머지는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수용하고, 쾌락과 관련하여 자기를 조절하며, 자기 지위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의 절제. “하위에 놓여 있는 다수가 상위에 있는 소수의 지혜와 욕구에 의해서 조절될 경우에”(431c-d) 절제가 실현.
- 이상 국가는 세 계층의 사람들이 각각 다른 계층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상태임
-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 지혜의 덕을 갖추고 인격과 실무적 경험을 갖춘 철학자가 통치하지 않는 한, 악은 사라지지 않음
- 국가의 정의는 각자가 각자의 역할을 하고 각자의 몫을 받는 것, 그래서 국가의 구성요소 간 조화와 균형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럴 때 전체가 행복할 것이다.
-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 예술 교육과 육체적 훈련을 통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추한 것을 혐오하도록 가르쳐서, 선에 마음이 이끌리고 악을 피하도록 만들어야 함. 육체적 훈련을 통해서는 또한 절제와 용기 같은 덕 함양. 또한 통치자가 되기에 적절하다고 평가되어 선발된 젊은이들은 수학을 중심으로 한 더욱 지적인 과목들을 배움. 이성을 계발하고, 그리하여 인간 본성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며, 자기 욕구와 감정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교육. 이들이 철인왕이 됨.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자가 되기 이전에는 국가는 결코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473d). 모든 시민들을 교육함에 있어 주된 목표 중 하나는 각각의 계층이 각자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회가 이성적이고 바람직한 것을 인지하도록 하고 자신의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 지배자[통치자]들의 가족 생활과 사적 소유 금지. 부와 가족생활은 공동의 이익과 충돌할 수 있는 사적 이익의 시발점이다. 이 둘은 공동체 정신을 약화시킨다. (시르베크·길리에, 서양철학사 1, p. 117)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2) 덕 있는 영혼
(가) 영혼 삼분설
- 개인의 구조는 국가의 구조와 상응함. 이상 국가에서 각 계층이 자신에게 적합한 바를 잘 행하고 그 결과로서 사회 전체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영혼도 그것을 구성하는 각 부분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그 결과로서 영혼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정의의 덕에 도달함.
- [수특] 영혼은 이성, 기개, 욕구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 이성은 배우고 헤아리는 부분, 기개는 격정을 느끼는 부부, 욕구는 육체적 만족이나 쾌락과 관련된 탐하는 부분임.
- 플라톤의 근본적 통찰: 인간의 인격은 복합적이며, 인격의 다양한 측면은 각각의 필요와 욕구를 지닌다는 것. 쾌락이나 명예 혹은 권력의 추구를 옹호하는 윤리 이론들은 인간 본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우리의 다양한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필요가 있음. # 애링턴 설명 굳.
- 우리는 서로 다른 비율로 욕망과 기개와 이성을 혼합하여 가지고 있어서, 각기 서로 다른 부분이 우세함. 이에 기반해 세 계층이 정해짐. 플라톤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정해진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계층 간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이 메시지를 ‘금속 신화’라는 ‘고상한 거짓말’을 통해 전함: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들은 모두 형제인데, 신이 그중 일부에게는 금을, 일부에게는 은을, 일부에게는 철과 청동을 섞었다. 대부분은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낳지만, 자신과 다른 성분/계층의 자손을 낳는 경우도 있다.
(나) 영혼에서의 정의
- [수특] 영혼의 각 부분에 해당하는 덕은 지혜, 용기, 절제임.
지혜란 각 부분뿐만 아니라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를 위해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 아는 덕임.
용기란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끝까지 보전하는 덕임.
절제는 지배하는 부분과 지배받는 두 부분 사이에 반목하지 않는 덕임[kbc: 영혼의 어떤 쪽이 지배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일치] -> 영혼의 세 부분이 모두 갖추어야 할 덕임.
- 개인의 영혼 중 이성적 부분은 지혜, 기개적 부분은 용기, 욕망적 부분은 절제의 덕을 갖추어야 하며, 세 부분 모두 절제를 갖추어 과도함을 피하고 이성의 주도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일치, 즉 한 국가에 있어서나 한 개인에 있어서나 보다 나은 쪽과 보다 못한 쪽 사이에 어느 쪽이 지배를 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절제”(432a).
- 영혼의 정의란 영혼의 각 부분이 각자의 덕을 갖추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상태임.[kbc: 각자가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것. 정의로운 사람은 이성에 의해 지도되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고, 이런 삶이 인간에게 가장 훌륭하고 가장 좋은 삶이며, 가장 행복한 삶임.]
- 사회적 정의가 각 계층이 각자에게 알맞은 일을 하는 것이듯, 영혼의 정의도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 정의로운 영혼을 건강한 영혼과 동일시함으로써 플라톤은 덕 있는 삶이 결과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좋은 것임을 보인다. 건강은 누구에게나 그 자체로 확실하게 가치 있는 것인 동시에, 다른 많은 가치들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그렇듯이 건강한 영혼으로서의 정의로운 영혼은 그 자체로도 좋고 그 결과도 좋은 것이다. [덕복일치설]
- 부정의한 사람의 삶은 부정의하다는 이유만으로 비참한 것이다. 부정의한 영혼은 내분과 혼란, 부조화, 불균형, 병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다.
- 플라톤은 정의를 행위의 유형이 아니라 영혼의나 품성의 상태로 정의함.
“그리고, 글라우콘! 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것도 나라가 올바르게 된 것과 똑같은 방식에 의해서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걸로 나는 생각하네.” ... “그런데 적어도 이 점은, 즉 실상 이 나라가 올발랐던 것이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함’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않고 있을 게 확실하이.” ... “따라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우리 각자의 경우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의 각각이 제 일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될 것이라는 점일세.” ... “그러니까 지혜로우며 혼 전체를 위한 선견지명을 지니고 있는 헤아리는 부분으로서는 지배하는 것이 적합하겠지만, 격정적인 부분으로서는 이에 복종하며 협력자로 되는 게 적합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앞서 우리가 말했듯, 시가와 체육의 혼화가 이 둘을 조화되게 만들지 않겠는가? 헤아리는 부분은 훌륭한 말과 학문으로 조장하며 키워주되, 격정적인 부분은 달래는 말로 이완시키며 화성과 리듬으로 순화시킴으로써 말일세.” ... “그래서 바로 이 두 부분이 이처럼 양육되어 참으로 제 할 일들을 배우고 교육받게 되면, 이것들은 욕구적인 부분을 지도하게 될 걸세. ...”또한 우리가 개개인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 부르는 것도 이 부분에 의해서, 즉 그의 격정적인 부분이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으로서 이성이 지시하여 준 것을 고통과 쾌락을 통해서도 끝끝내 보전하게 될 때라고 나는 생각하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그 작은 부분, 즉 각자 안에서 지배를 하며 이것들을 지시한 그런 부분에 의해서이니, 이 부분은 그 나름으로 이들 세 부분의 각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들 셋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유익한 것에 대한 앎을 그 자신 속에 지니고 있네.” .. “그러면 다음은 어떤가? 절제 있는 사람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이들 같은 세 부분 간의 우의와 화합에 의해서, 즉 지배하는 쪽과 그 두 지배받는 쪽 사이에 헤아리는 부분이 지배를 해야 된다는 데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고서, 이 부분에 대해 나머지 두 부분이 반목하지 않을 때에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
“그렇다면 이와는 달리 올바르지 못함은 이들 세 부분간의 일종의 내분이며, 참견과 간섭, 그리고 혼 전체에 대한 어떤 일부의 모반임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자기가 지배함에는 적합하지 아니하되, 오히려 지배할 부류의 것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 그 성향상 어울릴, 그러한 것이 혼에 있어서 지배하려 드는 모반 말일세. 이런 등속의 것들이, 그리고 이들 세 부분의 혼란과 방황이 올바르지 못함이며 무절제요, 비겁이며 무지라고, 요컨대 일체의 나쁨이라고 우리가 주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국가>, 441d-444b, 박종현 역)
"...혼의 상을 말로써 형상화[...]하세나.” ... “그러면 다채롭고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형태의 짐승을 형상화하되, 일부는 유순한 짐승들의 머리를 갖고 일부는 사나운 짐승들의 머리를 가진 걸로, 그리고 그 자체에서 이들 모두를 자라게도 바뀌게도 할 수 있는 걸로 형상화하게나.” ... “더 나아가 다른 하나는 사자의 형태를,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의 형태를 형상화하게. 그러나 첫째 것은 월등하게 제일 큰 것으로, 그리고 둘째 것은 둘째로 큰 것으로 하게나.” ... “그러면 셋인 이것들을 하나로 합쳐서, 어떻게든 서로 합쳐서 함께 자라도록 하게나.” ... “이것들의 바깥쪽에 하나의 상을, 즉 인간의 상을 삥 둘로 형상화하게나. 그래서 안쪽 것들은 볼 수 없고 다만 외피만을 볼 뿐인 자에게는 하나의 동물, 즉 인간으로 보이게 되도록 말일세. ...
“그러면 이 인간으로서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 이로우나 올바른 것들을 행하는 것은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해 주도록 하세나.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런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즉 이 인간으로서는 온갖 형상을 한 짐승과 사자 그리고 사자와 관련된 것들이 실컷 잘 먹도록 하여 강하게 만들되, 사람은 굶주려서 쇠약하게 만들어서는, 이게 아무 데고 그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이 이끄는 대로 끌리어 가게 되어, 서로 익숙해지거나 친해지도록 하는 일은 없이, 이것들이 내부적으로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다가 서로 잡아 먹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말일세.” ...
“반면에 올바른 것들이 이롭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겠는가? 행하고 말해야 할 것들은, 이로써 내부의 인간이 이 인간을 최대한 장악하게 되며, 많은 머리를 가진 짐승을, 마치 농부처럼, 유순한 머리들은 키우고 길들이되, 사나운 것들은 자라지 못하게 막아가며 보살피게 되는 한편으로, 사자의 성향을 협력자로 만들어서, 공동으로 모두를 돌보며, 서로들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화목하도록 만드는 그런 방향으로 조장하는 것들이어야 한다고 말일세.” ... (<국가> 588b-589b, 박종현 역)
# 9권에 나오는 짐승-사자-인간 이미지 참 강렬하고 좋다.
# 애링턴은 건강 비유가 실패한다고 비판하며, 특히 건강은 객관적인 반면 정의는 논쟁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정의가 사실 건강처럼 객관적이지 않느냐는 것이 정확히 플라톤이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닌가? 엄밀한 논증이 아닌 환기적인 방식을 통해서 말했을지 어땠을지 몰라도, 여전히 설득력 있게 말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중에 <국가> 읽고 생각하자.
# 또 애링턴은 이성이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개인을 불행하게 할 수 있다는 점, 철인왕 이외의 다수의 사람들에게 개인적 자유를 너무 부정한다는 것, 우리의 본질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될 수 있고 달리 계발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 등을 든다. 이 모든 비판들이, 우리의 통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플라톤을 그냥 우리의 통념에 기초해서 재단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나중에 <국가> 읽고 생각해보자.
(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점
-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덕이 지식이며, 따라서 무엇이 좋은지 알면 좋은 것을 추구할 것임.
- 플라톤: 이런 주지주의자가 아님. (1) 그는 모든 시민들이 무엇이 정의롭고 좋은지 파악하는 데 필요한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의 지성은 보다 현실적인 욕구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수호자들의 명령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고 생각함. (2) 모든 시민들이 기개 즉 감정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함. 악을 혐오하고 참된 지식을 사랑하도록 하는 감수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함. 진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음.
# 감정 교육을 통해 덕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앎에 도달하는 거 아닌가? 소위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플라톤의 입장을 꼭 단절적으로 볼 필요 없을 듯. 나중에 더 생각해볼 것.
#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는 시민 모두가 철인왕이 되어 지배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 같다... 더 생각해볼 것.
4. 이데아
[수특: 이데아계는 완전한 세계이며 오직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반면, 현상계는 이데아계를 모방한 불완전한 세계이며 감각적 경험으로 파악됨. 이데아란 사물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원형임. 이데아 중에서 최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임.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은 이상적인 삶을 위해 필요함.]
- 진정한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여야 한다. 이상은 어떤 시공간적 사실만큼이나 현실적이다. 이상은 (1) 우리의 행위를 추동하는 목표이며 (2) 현실적인 것들을 측정하는 기준이 됨으로써 인간의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상은 현실적인 것보다도 더 큰 실재성을 지닌다. 이상은 영원 불변하는 것인 반면 현실적인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정의라는 이상은 항상 동일하지만, 정의를 추구하면서 항상 그에 못 미치는 제도들은 일시적이다. 이런 이상을 플라톤은 형상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현실의 시공간에 속하는 특수한 것들과는 분리된 불변하는 영역에 존재한다.
- 형상들은 감각 경험이 아니라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 인식된다. 형상들은 사물의 본질이며, 완전하고 완벽한 실재성을 지닌다. 현실에는 이상적인 삼각형이 존재하지 않고, 완벽한 개인이나 국가도 현실에는 없다. 우리가 감각계에서 발견하는 모든 현실적인 삼각형, 사람, 국가의 실재성은 그 본질의 실재성에 비해 불완전하고 열등하다. 그 본질이 우리의 이상이 된다. [이데아는 현상 세계의 존재자들을 그러한 것으로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이고, 그것들의 영원불변하는 본질이다. 현상계의 존재자들의 ‘원형’ 혹은 ‘본’이고, 현상계의 존재자들은 이데아의 모방물이다. 지성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참된 인식의 대상으로서, 그것에 대한 앎은 보편적인 진리의 성격을 지닌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의견(doxa)와 구분하여 지식(episteme)이라고 부른다. 정치가가 통치할 때 따라야 할 모범이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규범의 근원이다.]
-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 그 자체 또는 좋음의 형상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세계의 실재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507b이하). 우리가 세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과 좋음 자체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의 도덕적 측면을 파악할 때이다.
# 애링턴이 가미한 해설들 좋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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