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설 관련 구절 (81c-e)
ἅτε οὖν ἡ ψυχὴ ἀθάνατός τε οὖσα καὶ πολλάκις γεγονυῖα, καὶ ἑωρακυῖα καὶ τὰ ἐνθάδε καὶ τὰ ἐν Ἅιδου καὶ πάντα χρήματα, οὐκ ἔστιν ὅτι οὐ μεμάθηκεν: ὥστε οὐδὲν θαυμαστὸν καὶ περὶ ἀρετῆς καὶ περὶ ἄλλων οἷόν τ᾽ εἶναι αὐτὴν ἀναμνησθῆναι, ἅ γε καὶ πρότερον ἠπίστατο. ἅτε γὰρ τῆς φύσεως [81δ] ἁπάσης συγγενοῦς οὔσης, καὶ μεμαθηκυίας τῆς ψυχῆς ἅπαντα, οὐδὲν κωλύει ἓν μόνον ἀναμνησθέντα—ὃ δὴ μάθησιν καλοῦσιν ἄνθρωποι—τἆλλα πάντα αὐτὸν ἀνευρεῖν, ἐάν τις ἀνδρεῖος ᾖ καὶ μὴ ἀποκάμνῃ ζητῶν: τὸ γὰρ ζητεῖν ἄρα καὶ τὸ μανθάνειν ἀνάμνησις ὅλον ἐστίν. οὔκουν δεῖ πείθεσθαι τούτῳ τῷ ἐριστικῷ λόγῳ: οὗτος μὲν γὰρ ἂν ἡμᾶς ἀργοὺς ποιήσειεν καὶ ἔστιν τοῖς μαλακοῖς τῶν ἀνθρώπων ἡδὺς ἀκοῦσαι, ὅδε [81ε] δὲ ἐργατικούς τε καὶ ζητητικοὺς ποιεῖ: ᾧ ἐγὼ πιστεύων ἀληθεῖ εἶναι ἐθέλω μετὰ σοῦ ζητεῖν ἀρετὴ ὅτι ἐστίν.
그리하여, 영혼은 불멸할 뿐 아니라 여러 번 태어나고 여기 지상뿐 아니라 하데스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영혼이 배우지 않은 것은 없다네. 그래서 탁월함에 관해서든 다른 것들에 관해서든 영혼이 어쨌든 전에 인식한 것들을 상기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네. 왜냐하면 자연 전체가 같은 혈통이고 영혼은 모든 것들을 배웠기 때문에, 단 하나를 상기한 사람이 --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배움’으로 부르는 것이네 -- 그가 용감하고 탐구하는 데 지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지. 탐구와 배움은 결국 모두 상기니까 말일세. 그러니까 이런 논쟁적인 논변에 결코 설득돼서는 안 되네. 왜냐하면 이 논변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 것이고 유약한 인간들의 귀를 즐겁게는 하겠지만, 지금의 논변은 우리를 부지런하게 만들 뿐 아니라 탐구에 매진하게 만들기 때문이네. 나는 이 논변이 참이라고 믿기에 자네와 탁월함이 무엇인지를 함께 탐구하길 바라는 거네.
ἑωρακυῖα: ὁράω, part sg perf (완료 분사 -kws -kuia -kos) | ἀργός: idle, lazy | μαλακός: soft
[지난 묵상 후기(장자)]
- 어려움. 묵상 실험에 확신은 없는데, 조금만 더 해보기로. 묵상하기로 한 구절은 별 느낌 없더라도 아무튼 그냥 의식에 계속 띄워놓을 필요가 있는 듯.
[주저리]
- 상기설의 신화적인 요소는 소크라테스도 그대로 옹호하려는 건 아니고(86b),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는 전기가오리에게 쏘인 듯 마비된 메논에게 그 모르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탐구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강력한 이미지라는 측면이 있는 듯. 나도 메논과 사정이 비슷하겠기에, 탐구에로 격려되기 위해 그 이미지를 곱씹어보려고 이번 묵상으로 가져옴. 여기서 격려가 필요한 탐구는 검색하거나 수험서 펴서 얻을 수 있는 명제적 지식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덕이란 무엇인가 같은 탐구이고, 그런 게 우리를 마비시키고 게으르게 만드는 것. 나는 전적으로 모르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안다. 어떤 출발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로부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앎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안내에 따라 기하학적 앎을 "상기한" 노예가 그러했듯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알게 된 다음에는, 자신이 전에 몰랐던 것을 이제는 정말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 그리하여 '메논의 난관'이 해결된다는 의미에서.
cf. '작품 안내'의 상기설 해설
모르는 것을 우리가 전적으로 모른다면, 비록 그것을 발견해도 그것이 우리가 몰랐던 바로 그것임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탐구는 전적으로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모르는 것에 대한 앎은 탐구의 가능성을 위해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며, 이 논리적 요청을 소크라테스는 ‘전생의 배움’이라는 신화적 비유를 통해 표현한다. ... 상기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모르는 것을 ‘지금’ 어떤 의미에서는 알고 있어야 하며, 즉 그 모르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모르는 것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을 ‘지금’ 알고 있어야 하며, 모르는 것에 대한 배움은 ‘지금’ 알고 있는 그런 인식들로부터 방법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 배움과 탐구의 방법으로서 상기는 미리 동의된 전제들로부터 주어진 확신을 -- 그것과 모순되는 -- 특정한 결론을 이끌어 내어 비판하는 검토, 즉 ‘엘렝코스’의 추론법을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다.
플라톤의 상기를 해석하는 방식이 많이 있었지만,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해석이 일차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은 추론을 통한 합리적 배움과 탐구는 전적인 무지에서 지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의미의 지에서 지로 이행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171쪽)
- 수업용 리딩을 발췌한다면, 메논의 셋째 답변(덕이란 훌륭한 것들을 욕구하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부터 논박(나쁜 걸 욕구하는 사람도 있음? 획득하든 말든 정의롭고 절제 있게 하는 게 관건 아님?) 끝에 메논이 난관에 빠져 소크라테스가 전기가오리 같다고 투덜대는 부분까지 괜찮을 듯. 소크라테스적 논박을 즐길 수 있는 부분.
참고문헌
플라톤, 이상인 역 (2019). 『메논』 아카넷.
Pers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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