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Dewey (1916), Democracy and Education. Free Press.
예전에 대충 노트한 것을 공부인증차 인스타그램에 3회에 걸쳐 올렸던 것인데, 개인적으로 은근 계속 찾아보게 되어서 여기에 모아놓는다. 다시 봐도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나중에 다시 더 제대로 읽어야지.
국역본은 보지 않았고, 아래의 인용문들은 다 내가 번역한 것이다.
Ch.1-6
한 사회가 존속하는 것은 그 집단의 관심과 목적, 믿음과 성향 등을 공유하는 구성원을 끊임없이 길러냄으로써다. 이처럼 교육은 사회의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볼 때 교육을 학교교육에 제한시키는 좁은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도적, 의도적인 학교교육보다 더 근본적인 교육은 집단의 활동에 참가하면서 이루어지는 성향의 형성이다. 나는 어떤 나라, 어떤 가족, 어떤 학교, 어떤 모임에 속해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으로 길러진다. 사회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교육이다. 호전적인 부족이든, 음악적인 집안이든, 우리는 여러 집단들에 속해 공동의 삶에 참가하면서 그 집단의 생각과 행동 성향을 지니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집단에서 배제된다.
이처럼 생각과 성향 등을 형성하는 것은 물질을 부어넣듯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환경을 통해 개인에 이미 내재하는 경향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교육하지 않고, 환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육한다.”(19) “엄밀한 의미에서는 어떤 것도 강요하거나 주입할 수 없다. 사람이 협박을 받아 무슨 일을 강요당할 때에도, 그 협박은 그가 공포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효과를 낳는 것이다.”(25)
사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모여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계의 부품처럼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 일하더라도 각자가 그 목표를 인지하고, 그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삼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가 아니다. 사회란 구성원들이 같은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행동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사물을 같은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는 구성원들 속에서 일정한 믿음과 성향들을 불러일으키고 강화한다. 사회는 교육을 통해 존재하고,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교육한다.
교육은 어른이라는 종착점과 비교해 어린이가 결여하는 부분을 채워넣는 작업이 아니다. 교육은 매 단계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다. 삶은 성장이고 성장은 삶이다. 성장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Ch.7-14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교육이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이 통치자를 선출해야 하므로 잘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주인과 노예의 사회에서는, 누군가는 자신이 하는 일의 온전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남이 시키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또 누군가가 그 결실을 취하고 그들의 목표를 지배한다. 이때 어느 쪽도 인간적으로 발달하는 데 충분한 자극을 얻지 못한다. 반면 민주주의 사회란 모두가 관심을 갖고 함께 추구하는 목표들이 폭넓게 존재하고,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회다. 그 결과 모두가 자기 삶의 주인이고, 인간 잠재력이 온전하게 발달할 기회를 얻는다. “민주주의는 정부 유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우선적으로 사람들이 연합되어 살아가는 사회 형태이자, 경험이 공유되고 소통되는 사회 형태이다.”(87) 모두가 자신의 활동의 온전한 의미를 알고 인류 공통의 관심사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자,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의 의미이다. 이를 위해 경제적 불평등과 국민국가의 경계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교육이 할 일은 학생을 의미 있는 목표를 가진 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목표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경험에 기반해야 한다. 흔히 학교에서는 학생의 내적인 목표와 교육체제가 요구하는 목표가 충돌하고, 이것이 습관화되면서 이중적인 태도가 고착된다. 학교 지식은 으레 자기 삶과 무관한 죽은 지식이라 여기게 된다. 학생은 자기 안의 자연적 에너지를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기에, 당면한 내용에 몰두하지 못하고 주의력이 분산된다. 따라서 보상과 두려움을 이용하거나, 억지스러운 극기와 의지력을 닦달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주의를 끌어야 한다는 것은 교육내용이 그 자체로는 학생 안에서 실제 작동하는 관심과 동기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외부에서 강요된 목표는 사람을 기계화, 노예화한다. 어떤 활동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목표가 아니라 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일 때 그것은 고역이다. 농부가 자신이 키우는 동식물을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아니면 순전히 다른 결과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그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목표가 활동 자체에 있을 때 모든 과정이 가치가 있다.
자신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얻고, 관찰하고, 판단하고 실험하는 등의 과정이 바로 '생각'이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 계획적으로 일련의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는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충동적으로 하거나 기계적으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이 할 일의 전부다. 생각은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전달받은 사람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주어진 정보이지, 생각이 아니다.”(160) 생각을 촉진하는 경험의 조건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배우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실제 목표가 있는 활동을 하면 자연히 배운다. 정보가 어떤 실제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를 위한 정보, 시험지에 쏟아놓기 위한 축적의 대상이 되면 “생각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각에 방해가 된다. 잡다한 쓰레기가 널브러진 땅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158)
“한 사람의 능력이 다른 사람의 능력보다 나은지 못한지는 선생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업무와 무관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의미 있는 활동에 활용할 기회를 갖게 해주는 것이다.”(172)
“사실과 진리들, 즉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은 더 적게 가르치는 것이 훨씬 낫다. ... 교과내용이 지나치게 어렵고 분량이 많은 데서 비롯하는 가장 오래가는 나쁜 결과는 걱정과 스트레스와 피상적인 지식보다도 (그것들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어떤 것을 정말로 알고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게 만든다는 것이다.”(178)
Ch.15-26 [끝]
듀이는 앎과 함을 떼어놓는 철학 전통을 비판하며 프래그머티즘 지식 이론을 주장한다. 진정한 지식은 행위와 결부된 지식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만이 지식이다. 우리로 하여금 난로가 아닌 의자에 앉게 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기게 하는 류의 지식.
이러한 지식은 직접 전수될 수 없고, 스스로 어떤 과업(occupation)을 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과업이란 목표를 바라보고 생각을 하며 연속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활동을 말한다. 정보들과 기술들은 그런 활동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로서 자연히 습득할 것이고, 오직 그럴 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과업은 지식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자 그것을 붙들어놓는 접착제로 작용한다.”(310) 과업이 있는 것의 반대는 목적 없이, 충동적으로, 단발적으로, 수동적이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과업 중에서도 가치 있는 일은 개인에 내재하는 의욕과 역량을 실현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유익한 기여를 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목표를 추구하고, 자기 지성을 발휘하며, 자신의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가 주는 것을 누리는 삶. 노예나 기계처럼 자신이 하는 일의 온전한 의미를 모르고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꾸역꾸역 하는 삶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지성적이며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사는 삶. 이런 삶을 모두가 사는 사회가 듀이가 꿈꾸는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사회의 구성원은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는 것을 넘어 그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 사회가 추구할 목적을 형성하는 데 동참한다. 그런 사회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 변화는 본질적으로 정신적 태도의 변화, 즉 교육적 변화이기 때문이다.”(316) ♥
정직이나 인내 등 도덕적 가치들을 직접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이 학생의 태도에 영향을 미쳐 실제 학생 안에서 작용하는 가치와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 의미를 생생하게 와닿게 하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런 가르침은 그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정보, 또는 무엇을 말해야 올바른지에 대한 정보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문제의식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나온 진정한 지식이었겠지만, 그 결론들을 전문가의 입장에서 체계화한 형태로 접하는 학생에게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단편적 정보로 받아들였을 뿐 자신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서 습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진정으로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관심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지성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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