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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덕을 가르친다는 것인가?: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neon_eidos 2023. 6. 20. 11:28

강성훈, 『프로타고라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이제이북스, 2011.
 
# 대화편의 여러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 보면서, 이런 가설들이 훨씬 더 많은 검토와 정당화를 필요로 하고, 많은 논문을 읽어보고 나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생각해보는 별로 자신 없는 가설들이지만 시간 관계상 적당히 검토하다 말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하지만 학자가 아닌 우리는 결코 학자들이 연구하는 데까지 연구할 수 없고, 누구든지 자기가 최대한 검토해 본 수준에서 이렇게 부족한 가설들을 생각해 보고 언젠가 반박되기를 기약하는 식으로 대화편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검토하고 생각해본 만큼 대화편이 다루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이런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점차 플라톤을 읽더라도 플라톤을 읽는 활동이 학습자에게 어떻게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읽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대학원 세미나에서 학술적으로 흥미로운 주장을 할 수 있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고등학생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뀌게 되는 독서. 그런 독서를 나부터 많이 해야 학생들에게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연구를 위한 독서와 자기 변화를 위한 독서가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전자를 잘하는 것이 후자를 잘하기 위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자를 후자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잘 하고 어떻게 끊을 것인지, 후자는 어떻게 잘 할 것인지 더 고민하고 연습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텍스트에 대한 최대한 논증적, 드라마적, 맥락적 요소와 작품 전체의 통일성 등을 고려한 정합적인 해석을 검토해놓아야 하기도 하지만, 이제 그것은 결국 비연구자가 대화편을 어떻게 유익하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종속되어야 한다.  (둘 중 어느 것도 이번에 잘 하진 못했다.)
 

1. 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317e-328d)

  • 액자 밖 내용(309a-310a): 소크라테스가 동료를 만나,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방금 전 프로타고라스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함.
  • 액자 안 도입부(310a-317e): 프로타고라스의 학생이 되고 싶어 안달인 청년 히포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느는 사람이냐고 묻고, 잘 대답하지 못하자 잔소리를 폭포수같이 퍼부음: (너무 폭포수같아서 접은글로 전체 인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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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내가 말했지. “그럼 어떤가? 자네는 자네 영혼을 걸고 어떤 종류의 모험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나? 자네 몸이 쓸모 있게 될지 형편없게 될지를 걸고 모험을 하면서 자네 몸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했더라면, 자네는 맡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리저리 살펴보고서는, 친구들과 친척들을 불러서 조언도 구하면서 몇 날 며칠을 검토했을 거야. 그런데 자네가 몸보다 훨씬 더 중하게 여기고 있는 영혼을, 그게 쓸모 있게 되는지 형편없게 되는지에 따라 자네의 모든 일이 잘될지 못될지가 달려 있는데도, 갓 여기 온 이 외지 사람에게 자네의 영혼을 맡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것에 관해서 아버지와도 형과도 우리 동료들 가운데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서는, 자네가 그렇게 얘기했다시피, 그가 왔다는 얘기를 엊저녁에 듣고 새벽같이 여기 와 가지고는, 자네 자신을 그에게 맡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아무런 논의도 해보지 않고 조언도 구해 보지 않고서, 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프로타고라스님과 같이 지내야 한다고 이미 다 결정해 놓은 양, 자네 자신의 돈도 자네 친구들의 돈도 다 써 버릴 태세이네. 자네가 얘기했다시피, 그분을 자넨 알지도 못하고 대화를 해 본 적도 전혀 없으면서 말이야. 그리고 자네는 그분을 ‘소피스트’라고 부르는데, 자네 자신을 맡기려고 하고 있는 그 소피스트라는 게 도대체 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 명백하네.”(313a-c, 75쪽)
... "그리고, 여보게, 소피스트가 자기가 팔려고 내놓은 것들을 찬미하면서 우리를 속이지 않도록 해야 돼. 몸의 양식에 관한 무역상이나 행상이 그러듯이 말이야. 이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들이 갖고 다니는 물건들 중 어떤 것이 몸에 이로운지 해로운지 자신들도 알지 못하면서, 팔려고 내놓은 것들은 모두 찬미를 해 대지. 또 그들에게서 사려는 사람들도, 그들이 마침 체육 전문가나 의사가 아닌 경우는, 그걸 알지 못하고 말이야. 마찬가지로, 배울 거리를 이 나라 저 나라로 갖고 가서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팔려고 내놓아서 팔아 치우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팔려고 내놓은 것들 중 어떤 것이 영혼에 이로운지 해로운지 모르고 있을 거야. 그들에게서 사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사려는 사람 누군가가 이번에도 마침 영혼에 관한 의사가 아니라면 말이야. 그러니 자네가 마침 이것들 중 어떤 것이 이롭고 해로운지를 아는 자라면, 프로타고라스님에게서든 다른 누구에게서든 배울 거리를 사려고 하는 것이 자네에게 안전할 것이지만, 아니라면 말이야, 이 친구야,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해서 주사위를 던지는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하라고. 사실 먹을거리를 살 때보다 배울 거리를 살 때가 위험이 훨씬 더 크지.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는 행상이나 무역상에게서 사서 다른 그릇에 담아 가지고 올 수가 있고, 마시거나 먹음으로써 이들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집에 놔두었다가, 전문가를 불러서, 먹거나 마시거나 할지 말아야 할지, 또 얼마큼을 그래야 할지 또 언제 그래야 할지 조언을 구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따라서 이것들을 살 때 커다란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 이에 반해, 배울 거리는 다른 그릇에 담아 올 수가 없고, 값을 치르고 그 배울 거리를 영혼 자체 안에다 담아서 배운 채로 떠날 수밖에 없어. 피해를 입은 상태로든, 이득을 본 상태로든 말이지. ...”(313c-314b, 76-77쪽)

 
# 영혼이 이롭게 되는지 해를 입는지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젊은이들의 영혼을 아무 교육자에게 맡기고 있다. 이후로 소피스트들이 가르친다는 덕이 어떤 것인지 꼼꼼하게 검토하는 것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강렬한 대목.
 

  •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이 소피스트이며, 자신이 가르치는 것은 '잘 숙고하는 것 = 집안을 잘 경영하고 나랏일을 유능하게 하는 것 = 시민적/정치적 기술 = (시민적/정치적) 덕'이라고 함.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덕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하며, 이유를 두 가지 듬.
    • (1) 아테네 민회에서 건축이나 조선 등에 대해서는 관련 전문가의 조언만 받아들이지만, 나라의 경영에 관련해서는 누구나 발언권을 가진다. 이는 이러한 것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럴 것이다.
    • (2) 페리클레스처럼 가장 지혜롭고 뛰어난 이들도 자기 아들을 뛰어나게 만들지 못했다.
  • 프로타고라스는 긴 연설을 통해 반박함.
    • (1-1)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사람들은 기술적 지혜만 있고 시민적 덕이 없는 탓에, 나라를 이루어 살지 못하고 흩어져 살다가 짐승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를 본 제우스가 정의와 염치라는 시민적 덕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어서 나라를 이루어 살 수 있도록 했다. 요컨대, 시민적 덕은 모두가 갖지 않으면 나라가 있을 수 없다.
    • (1-2) 어떤 사람이 실제로 부정의하더라도,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신 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누구든 자신이 정의롭다고 주장해야 하고, 정의로운 체라도 해야 한다. 이로부터도 인간 무리에 속하려면 누구나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 (1-3) 천성적이거나 운에 달린 것에 대해서는 분노, 훈계, 징계하지 않지만 돌봄과 훈련과 가르침에 의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한다. 부정의와 불경에 대해서는 징벌하는데, 이 또한 시민적 덕이 가르쳐질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 (2)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 모두가 열심히 그들에게 덕을 가르치지만, 타고난 재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뛰어난 아버지의 자식이 못난 경우도 있다. 뛰어난 아울로스 연주자의 자식이 변변찮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소크라테스는 “작은 것 하나가 좀 걸리는 것만 빼고” 설득이 되었다고 함: 프로타고라스가 언급한 정의, 분별, 경건 등은 덕의 부분들인가, 아니면 동일한 것의 이름들인가?

 
[작품 안내 36-38쪽: 프로타고라스의 연설은 전통적으로 '위대한 연설'이라고 불려 옴. 여기서 플라톤은 테네 민주정에 대한 강한 옹호 논변을 제시함. 플라톤은 여러 대화편에서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데, 프로타고라스의 대답은 모든 인간이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어느 정도는 있다는 이유로 민주정을 옹호한 셈.]
 
[작품 안내 17-19쪽: 대화의 시점은 알키비아데스가 턱수염이 갓 난 나이라는 언급을 봤을 때 430년대 후반으로 설정되어 있음. 그 시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 민주정이 몰락하기 직전,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불리는 아테네 최전성기의 막바지임. 대화편의 등장인물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플라톤의 독자들은 곧 다가올 아테네 민주정의 몰락을 함께 보고 있는 것.]
 
# 이후에 다루는 덕의 교육가능성 문제, 덕의 단일성 문제, 쾌락주의와 지덕합일 문제가 모두 민주정 사회와 소피스트들이 추구한 덕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범속의 도덕과 다른 차원의 덕을 생각할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 대화편을 읽었다. 프로타고라스 같은 소피스트들은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범속의 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출중한 리더를 길러내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사실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근본적으로 범속의 차원과 동일선상에 있다. 그런 차원의 가치관, 그런 차원에서 덕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교육, 그리고 그런 차원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토론하고 정치적 결정을 하는 체제에 대한 의구심을 촉구하는 대화편이 아닌가 생각한다.
 
[Brown (2005: xv): The speech is a brilliant presentation of an essentially common-sense view that equates being good with socially instilled decent behaviour. ... But this kind of being good - possessing a basic ethical sense and minimally decent behaviour -- has little to do with what ambitious yonug men would pay Protagoras good money to learn from him ... Nor is it enough for Socrates, who aspires to something much more intellectually grounded and much less commonplace.]
 
#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한 조건인 도덕 사회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통해서는, 출중한 리더가 되기 위한 덕 교육이 가능하다거나 더 심층적인 차원의 덕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 그런데 도덕 교사는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필요로 할 것이다. 여기서 왜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 덕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강성훈(2013: 초록): "프로타고라스는 덕의 기준을 낮게 잡음으로써 덕이 가르쳐질 수 있다는 증명에 성공하였고, 소크라테스의 덕의 단일성 질문은 그러한 낮은 덕 기준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을 수 있다. ... 프로타고라스의 연설을 통해 드러나는 덕 개념은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있으나, 문명사회의 성원들 중 탁월한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가 전자로서의 덕이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고 해도 후자로서의 덕도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은 아니다. 후자로서의 덕 개념은 덕이 파편적이지 않은 단일한 것임을 필요로 하는데 비해, 전자로서의 덕은 한 부분을 가지면서 다른 부분을 가지지 않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파편적이다. 소크라테스가 주도하는 덕의 단일성 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덕은 그렇게 파편적일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된다."] 
 
# 소크라테스가 문명사회의 성원들 중에서도 탁월한 사람이 가진 “진정한 의미에서의 덕”만 단일하다고 본 것인가? 나는 나중에 소크라테스가 검토를 통해 보이는 것이 프로타고라스의 도덕관이 덕의 단일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라고 읽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소크라테스의 덕의 단일성 질문은 프로타고라스의 낮은 덕 기준만을 따를 경우 결국 모든 덕이 즐거움과 고통의 양을 측정하는 기술로 수렴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질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Taylor (1996: xxi): ‘덕의 단일성’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소크라테스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대중이나 프로타고라스의 견해가 그것을 함축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고 있을 뿐인지는 해석자들 간 논란이 됨.]
 

2. 여러 덕들은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동일한 것인가? (328d-334c)

  • 프로타고라스는 정의와 분별과 경건은 덕의 부분들인데, 금의 부분들처럼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 입과 코와 눈과 귀가 얼굴의 부분인 것처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대답함.
  •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경건하고, 경건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함. 프로타고라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음. 소크라테스는 논박을 진행함. (1) 정의는 정의로운 것이다. (2) 경건은 경건한 것이다. (3) 프로타고라스의 주장대로 덕의 부분들이 서로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면, (6) 경건은 정의로운 종류의 것이 아니고, 정의도 경건한 종류의 것이 아닌 것인가? (7) 따라서 경건은 부정의한 것이고, 정의는 불경한 것인가? [# '정의라는 것이 있다.' 류의 전제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여기서부터 계속 생략함.] (주: 이분법 전제)
  • 프로타고라스는 여전히 정의와 경건에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소크라테스가 원한다면 같다고 하자고 함.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식으로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과 프로타고라스를 검토하기를 원한다고 함.
그분이 말했지. “정의가 경건한 것이고 경건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동의할 만큼 그렇게 아주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소크라테스. 내가 보기엔 거기에 뭔가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그분이 말했어. “당신이 원한다면, 정의가 경건한 것이기도 하고 경건이 정의로운 것이기도 하다고 합시다.” - 내가 말했지. “아니, 그러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원한다면’이나 ‘당신이 보기에 그렇다면’ 따위를 검토하기를 원하는 게 전혀 아니라, 저와 선생님을 검토하기를 원하는 것이거든요. 제가 ‘저와 선생님을’이란 말을 하는 것은, 논변에서 ‘어떠어떠하다면’ 따위를 빼면 논변이 가장 잘 검토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입니다.” (331b-d, 102쪽)
  •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지혜와 분별의 동일성을 논증함. (1) 어리석음은 지혜와 반대되는 것이다. (2)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분별 있게 행동하는 것인 반면, 바르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은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다. (3) 따라서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은 분별 있게 행동하는 것과 반대되게 행해진 것이다. (4) 그런데 어리석게 행해진 것은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행해진 것이고, 분별 있게 행해진 것들은 분별로 인해서 행해진 것이다. (5) 반대되게 행해진 것들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다. (6) 따라서 어리석음과 분별은 반대다. (7) 그런데 하나의 것에는 반대되는 것이 하나만 있다. (8) 지혜도 어리석음의 반대이고, 분별도 어리석음의 반대이므로, 지혜와 분별은 같다.
  • 소크라테스는 나아가 정의와 분별의 동일성을 논증하고자 함. 부정의하게 처신하면서 바로 그 점에서 분별 있게 처신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이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대중은 그렇게 주장한다고 대답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대중의 주장에 대해 논박을 진행하기로 함. (1) 분별 있게 처신한다는 것은 생각을 잘한다는 것이다. (2) 생각을 잘한다는 것은 잘 숙고하는 것이다. (3)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들이 좋은 것이다.
  • 마지막 명제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갑자기 “격앙되어 경쟁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좋음이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음. 다양한 동식물에게 다양한 것이 이롭거나 해롭다는 예시를 나열함. 듣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잘했다고 야단법석임.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길게 이야기하면 자신이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를 잊어버리니 대답을 짧게 해달라고 요구함. 이를 프로타고라스가 수락하지 않자 소크라테스는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나겠다고 함. (그런데 대화편 첫머리의 액자 밖 이야기를 보았을 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별다른 볼일이 없었음.)
  •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머무르도록 설득하고, 중재를 시도함. 결국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가 질문을 하고 자신이 답한 다음에 입장을 바꾸자고 제안하여 받아들여짐. 프로타고라스는 시모니데스의 시에 대해 질문하고, 소크라테스는 시에 대한 해석을 제시함. [해당 부분(338e-348c)는 생략]
  • 시에 대해 소피스트적인 길고 궤변적인 해석을 마친 다음, 소크라테스는 시 해석을 그만하고 대화자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대화를 하자고 말함.
제가 보기에는 시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은 변변찮은 시정아치들의 향연과 가장 닮은 것 같습니다. 이들은 교양 부족으로 인하여 술자리에서 자신들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수단으로 자신들끼리만 서로 모임을 가질 수 없어서, 남의 소리인 아울로스 소리를 큰 보수를 치러서 사느라고 아울로스 부는 여인네들의 값을 비싸게 만들고는, 그 소리를 수단으로 서로 모임을 갖는 겁니다. 하지만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훌륭하고 좋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인 경우는, 아울로스 부는 여인네나 춤추는 여인네, 하프 켜는 여인네 등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들은 그러한 헛되고 유치한 것들 없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수단으로 충분히 교제할 수 있어서, 포도주를 아주 많이 마시고도 절도 있게 자기 순서를 지켜 이야기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요. 그래서 지금과 같은 모임도, 우리 중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모임이 벌어질 때는, 남의 소리나 시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시인들에게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물어볼 수 없는데, 대중들은 논의 중에 이들을 인용하면서 어떤 이는 그 시인이 생각하는 게 이거라고 주장하고 다른 이는 다른 거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검증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요. 하지만 저들은 이러한 모임은 집어치우고 그들 자신이 그들 스스로와 자기들끼리만 모임을 갖고, 자기 자신들의 논의 속에서 서로를 시험하고 서로에게 시험받지요. 제 생각으로는 저와 선생님이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모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인 자신들은 제쳐 놓고 우리 자신들끼리만 서로를 상대로 논의를 하면서, 진리와 우리 자신에 대한 시험을 하는 거지요. (347c-348a, 129쪽)

 
 # 소크라테스가 하고자 하는 대화의 목적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에게 대화의 목적은 대화자들 자신이 검토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타고라스가 진짜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으며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항의했고, 다음 번에는 수용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자신과 그가 검토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며, 프로타고라스가 대화 주제와 무관한 장황한 이야기를 하자 대화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매번 프로타고라스 자신이 검토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대화에 임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못마땅해한 것 같다. 
 
# 여러 사람들이 중재에 나서는 부분에서 작가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을 조롱한다. 프로디코스가 "공평하게...하지만 동등하게는 아니에요." "흐뭇해하게 될 것... 즐거워하게 될 것은 아니에요." 하며 계속 단어들을 마구 구분하는 데서 빵터짐... 이런 식으로 철학 관련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 있는 거 같다. '이 개념은 이렇게 규정해야 한다'고 우쭐하게 말하기를 즐기는, 철학적이지 못한 사람들.
 

3. 용기는 결국 지혜와 같은가? 즐거움에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348c-360e)

# 아래의 소제목들은 내가 (나의 자신없는 해석을 반영하여) 붙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용기와 대담함이 동일하고, 잘 사는 것이 즐겁게 사는 것과 동일하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질문하지만, 이런 입장들을 소크라테스 자신이 (프로타고라스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고 보았다.

3-1. 프로타고라스는 용기가 대담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348c-351b)

  • 다시 원래 논의로 돌아와서, 소크라테스는 여러 덕이 서로 동일한 것인지 서로 다른 종류인지 물음. 프로타고라스는 지혜, 분별, 용기, 정의, 경건은 덕의 부분들이고 그중 넷은 서로 상당히 유사하지만, 용기는 아주 다르다고 답함. 그 근거로 지극히 부정의하고 불경건하며 무분별하고 무지하지만 지극히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듬.
  • 소크라테스는 (1) 용기 있는 사람은 대담하다는 것과 (2) 덕은 훌륭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 프로타고라스의 동의를 받은 다음, (3) 잠수부가 우물에 대담하게 잠수해 들어가는 것은 잠수할 줄 알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 알기 때문에 대담하게 행동하며, 그것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대담하게 구는 사람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정신 나간 것이라는 데도 동의를 받음. 소크라테스는 이 대담한 사람들이 용기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음.
  •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반론함. (1) 용기 있는 사람은 대담하지만, 대담한 사람이 용기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담함은 기술(앎), 화, 광기로부터도 생기지만, 용기는 타고난 영혼의 상태와 좋은 양육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대담함이 용기에서 비롯할 수도 있지만, 기술, 화, 광기에서 비롯할 수도 있으며 이 여러 근원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2) 용기 있는 사람이 대담하고 또 아는 사람이 대담하다는 것을 근거로 용기와 지혜가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력 있는 사람이 능력 있고 또 아는 사람들이 능력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근력과 지혜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강성훈(2008: 77-78): 대화 논증은 대화 상대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종결하게 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의 지혜가 용기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서도 프로타고라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이후 논의에서 드러나는 바, 그는 용기가 좋음과 나쁨에 대한 앎이라는 의미에서, 혹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앎이라는 의미에서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앎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용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이후에 전개하는 것과 같은 긴 논의가 없이는 시도도 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잠수 기술과 같은 지식이 용기라고 생각할 리는 없지만, 이러한 지식의 예는,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용기 있는 사람이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무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이는 데에는 대단히 효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프로타고라스가 어떤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전적으로 무식할 수 있는지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은 마당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의 지혜와 용기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지의 문제를 깊이 고찰할 필요가 없었다. (주: <프로타고라스>에서의 쾌락주의와 관련된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필자의 해결책도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노선에 서 있다. 소크라테스는 쾌락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화의 맥락이 요구하는 엄밀성의 정도에 비추어 볼 때,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정확한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를 깊이 탐구할 필요가 없었다. ...) ... 어쨌거나 이제 프로타고라스의 반론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의미에서의 지혜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음을 드러내준다. 프로타고라스의 반론은 최소한 용기가 기술적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지혜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가 잠수 기술을 끌어들이는 맥락.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상대의 견해를 명료화하고 대화를 중요한 주제로 이끌어나가도록 돕는 내용을 논박에 활용하곤 한다.
 

3-2. 프로타고라스는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351b-358d)

  • 일견 갑작스럽게, 소크라테스는 즐거움과 좋음의 관계에 대해 질문함. 즐겁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고통스럽게 사는 게 잘 못 산 것이 아니냐고 물음. 프로타고라스는 훌륭한 것들에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라야 좋은 것이라고 답함. 소크라테스는 놀라면서, 즐겁지만 나쁜 것이 있고, 고통스럽지만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은 대중의 견해일 뿐이고, 즐거운 것은 즐거운 한에서 좋은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스러운 것인 한에서 나쁜 것이 아니냐고 물음(“뭐라고요, 프로타고라스님? 선생님도 대중들처럼 즐거운 어떤 것들을 나쁘다고 하고 고통스러운 어떤 것들을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 이를 검토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앎이 강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비롯한 감정들에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것이라는 대중들의 생각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모두 반대하며, 둘은 앎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확인함. 하지만 대중들은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데도,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져서 그것을 하지 않고 다른 것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들 함. 이처럼 사람들이 즐거움에 진다고 할 때 그들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득하고 가르쳐주자고 함. (프로타고라스가 대중의 믿음을 왜 검토해야 하냐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용기와 덕의 다른 부분의 관계를 발견하는 데 관련 있다고 함.) 
대중들은 앎에 대해서, 그게 강력하거나 주도하는 것이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그들은 그게 그런 것이 아니어서, 앎이 사람 안에 있는 경우에도 종종 앎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때로는 화, 때로는 즐거움, 때로는 괴로움, 어떨 때에는 사랑, 그리고 종종 두려움이 그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지요. 한마디로 그들은 앎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노예처럼 다른 모든 것들에 끌려다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앎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앎이 훌륭한 것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성격의 것이어서, 누군가가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을 알기만 하면 그는 그 어떤 것에도 굴복당하지 않고 앎이 지시하는 것 외의 다른 어떤 것을 행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현명함이 인간을 구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런데 대중들은 저와 선생님을 믿지 않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것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도대체 그런 이유가 뭐냐고 제가 물어보면 모두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져서, 혹은 제가 지금 막 이야기한 것들 중 하나에 굴복당해서 그렇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352c-e, 136-137쪽) 
  • (1) 대중들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 혹은 성적 쾌락이 즐거워서 해로운 줄 알면서 그것을 행한다고 하는데, 이때 그들이 생각하는 해로움이란 나중에 병과 가난 등 고통이 결과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 신체단련, 군복무, 치료 등이 고통스럽지만 좋다고 할 때, 그들은 나중에 건강, 나라의 안녕, 권력, 부 등의 쾌락이 생겨난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을 것이다. (2) 즉, 대중들은 즐거움과 괴로움 외에 좋음과 나쁨의 다른 어떤 궁극적 기준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움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 그들이 나쁜 줄 알면서 즐거움에 져서 그것을 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나쁜 줄 알면서 좋음에 졌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4) 이런 관점에서,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지 결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가져올 즐거움과 고통의 총량을 재서 비교하는 것이다. (5) 가까이 있는 것은 커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는데,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측정의 기술이 우리 삶의 구원 수단일 것이다. (6) 측정술은 기술이고 앎이다. (7) 대중이 즐거움에 진다고 할 때 그들이 겪은 것은 무지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무지를 치료해 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면 여러분은 즐거움과 괴로움 외에 다른 어떤 궁극적 기준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에 비추어 이것들을 좋은 것이라고 부르는 기준 말이에요. ... 그러니 당신들은 그것, 즉 괴로움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움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당신들이 즐거워함 자체도 나쁘다고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빼앗아 가거나 그것 안에 있는 즐거움들보다 더 큰 괴로움을 초래하는 바로 그런 때이니까요. 당신들이 다른 어떤 점에서, 그리고 다른 어떤 궁극적 기준에 비추어서 즐거워함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부른다면, 우리에게도 이야기해 줄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게 못 할 겁니다. (353d-354d)
  • 자리에 참석한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이야기가 “엄청나게 참되다고” 여기며 동의함. 그렇다면 그들은 즐거운 것이 좋은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이 나쁜 것이라는 데 동의하는 것임을 확인함.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다음의 내용에 동의를 얻음. (1) 괴로움 없이 즐겁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든 행동은 훌륭한 것이다. (2) 훌륭한 것은 좋고 이득이 되는 것이다. (3) 즐거운 것이 좋은 것이면, 더 좋은 것을 할 수 있는데 다른 것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작품안내 47쪽: "이 논의에서 소크라테스는 즐거움과 좋음이 같은 것이라는 쾌락주의 전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 자신이 이 쾌락주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독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 나의 가설: 쾌락주의 전제를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가 모두 받아들이고 있는데, 각각이 생각하는 쾌락의 내용이 다르다. 프로타고라스가 생각하는 좋음과 즐거움을 대중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반면,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좋음과 즐거움은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가 좋음과 즐거움이 같다고 하는 것에 대해 논박할 때는, 대중적 즐거움이 참된 좋음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려 하는 것이고, <국가>에서 말하는 이성적 부분의 즐거움이 참된 즐거움이자 참된 좋음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누구나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 그래서 좋은 것을 알면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 그리고 덕은 결국 앎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좋은 것에 대한 앎에 도달하려면 습관화와 감화 등의 품성적 교육 방식이 또한 필요할 수 있다는 것과 양립 가능하다(강성훈 어떤 논문에서 나온 건데 어딘지 기억 안 남).

 

# cf. 王請度之! (맹자 양혜왕 상 07장)
 
[(유혁, 2013: 322) 이러한 맥락에서 드러나듯이, “어느 누구도 (알면서) 자발적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위의 논제가 사람들이 쾌락이나 감정에 지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제는 그러한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하여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적인 견해와 다른 입장을 소크라테스가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 어떤 사람이 최선의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최선의 것들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 
(323) 그리고 다시 『프로타고라스』편의 논의 맥락을 상기해보면, 이 문제는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을 입증함으로써 덕을 앎으로 이해하는 것을 지지하기 위한 맥락에서 등장했으며, 누군가가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에 대한 앎을 지니고 있으면 어떤 다른 것에도 지지 않고 앎이 지시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행하지 않으며 그것만으로 좋은 것들을 행하기에 충분하다는 강한 주장을 개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주지주의(Intellectualism)라는 용어로 지칭하여 왔는데, 일부 학자들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설명하면서 이성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감정이나 욕구와 같은 인간 영혼의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과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인간 영혼의 비이성적 욕구를 인정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특히 위에 언급된 『프로타고라스』와 『국가』편의 해당 구절들이 어떻게 일관된 입장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이어져왔다.]
 
(# 사람들이 쾌락에 지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현상이 있다는 것이나,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의 측면도 있다는 것 같은 상식이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된다고 간주되곤 하는 것 같다.ㅠㅠ 대화편에서도 그런 통념이 상식이라는 것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고, 독자는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거기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
 
#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데 유튜브를 볼 때, 우리는 겉으로는 '유튜브 그만 보고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지만,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를 움직인 것은 '아니야, 유튜브가 좋아!'라는 마음이다. 자해나 일탈이나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고 인생을 망치는 행위들도, 일견 '좋은 것을 알면서 달리 행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순간 그에게는 어떤 이유로든 자해나 일탈이 가장 좋은 것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좋다고 여기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명료하지 않을 수 있기에 우리는 늘 검토해야 하고, 그러한 우리의 가치관이 올바른 것인지도 늘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뻔하게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어렴풋이 사회적으로 무엇이 좋다고 말해지는지 들어 안다는 것이지 내가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 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안 할 때, 그들은 대학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 다른 유혹에 빠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좋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을 뿐 사실은 그게 다른 좋은 것을 능가할 만큼 좋다는 데 설복되지 않은 것이고, 개중에 성취욕이 커서든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서든 진짜 대학 입학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 아이들은 열심히 하는 것이다. 이렇게 좋음을 다름아닌 우리가 추구하고, 이끌리고, 동력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음에 대한 도덕 이론 따로, 내 삶 따로' 살던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도덕관에 좋음에 대한 합리적 생각들을 적용해보도록 촉구한다. (아... 더 잘 설명하고 싶다...) 
 
# 나는 프로타고라스의 입장이 함축하는, 측정술에 다름없는 이러한 덕이 『파이돈』 68c~69c에서 말하는 “즐거움을 즐거움들로, 고통들을 고통들로, 두려움을 두려움들로, 마치 주화들처럼” 맞바꾸는 가짜 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이돈』의 해당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오직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만이 진정한 덕들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철학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 중에서 용기 있는 이들은 사실 더 큰 나쁜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용감한 것이고, 절제 있는 이들은 사실 다른 즐거움에 대한 욕망 때문에 즐거움을 자제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즐거움을 즐거움들로, 고통들을 고통들로, 두려움을 두려움들로, 마치 주화들처럼” 맞바꾸는 “올바르지 못한 교환”(69a)이며,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교환되어야 할 올바른 주화는 오직 현명함뿐”(69b)이라고 한다. 즉 두려움과 즐거움을 극복하는 것이 용기와 절제인데, 다른 두려움이나 즐거움의 힘이 아니라 현명함의 힘으로 극복해야만 참된 용기와 절제다. 이때의 현명함이 바로 쾌락주의를 넘어서는 좋음의 기준에 대한 앎이다. 
 

3-3.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 (358d-360e)

  • 이를 바탕으로 소크라테스는 지혜와 용기의 동일성을 최종적으로 논증함. (1) 누구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지 않는다. (2) 두려움은 나쁜 것의 예견이다. 즉, 무언가를 무서워하면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따라서 누구도 자기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지 않는다. (4) 그렇다면 용기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 수 없다. (5) 비겁함은 무서운 것과 무섭지 않은 것에 대한 무지고, 그 반대인 용기는 무서운 것과 무섭지 않은 것에 대한 지혜다. 

 
# 용기 있는 사람은 무서워하면서 그것으로 나아가는가? 쾌락주의라는 단일한 도덕 기준에만 터해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어떤 것을 나쁜 것이라고 여기면서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므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쾌락주의자라면 용기 있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반면 용기 있는 사람이 어떤 것을 무서워하면서 그것을 한다고 말하려면, 우리가 쾌락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기준에 의해서도 동시에 움직인다고 해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 영혼의 쾌락주의적 부분은 그것을 두려워하지만, 다른 부분은 그것을 좋다고 여긴다고 해야 한다. 또 한편, 소크라테스는 쾌락주의는 아니지만 또 다른 어떤 단일한 기준을 받아들이고 있고, 그래서 그에게도 용기 있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문제를 다루는 부분과도 비교해보면 좋겠다.)
 
[유혁(2013: 327-328): 덕의 단일성에 대한 해석들
- [설득력 없는 해석] 말 그대로 의미론적으로 동일하다는 해석
- [블라스토스의 해석] 한 가지 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나머지도 모두 지니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덕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
- [블라스토스와 비슷하지만 기술 방식이 좀 다른 대안적 해석] 다섯 이름들이 모두 동일한 지시체를 지니며 따라서 개별 덕들이 한 사물을 지시한다는 것. "이를테면, (덕이 영혼의 상태로 이해된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여) ‘용기’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들이 용감한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달리 말하면 ‘여러 사람들의 영혼 안에 있으면서 그들을 용감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면, 덕의 단일성 논제는 다음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을 용감하게 만들어주는 영혼의 경향성 또는 그런 행동을 이끌어내는 영혼의 추동력은 사람들을 정의롭게, 절제 있게, 경건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만들어주는 영혼의 경향성이나 추동력과 동일하다. 덕의 단일성을 이와 같이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덕을 구현하는 행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인간 영혼의 작동 방식을 언급하여)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는 또한 덕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는 지적인 앎(실천적인 판단력)으로 이해하는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현 도덕과 교육과정은 성실, 배려, 책임, 정의라는 네 가지 인성 요소를 함양하고자 한다. 네 가지가 별개이고, 그래서 지극히 성실하지만 지극히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불의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면, 그때의 성실은 사회화된 것  차원의 어떤 덕목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좋음을 알아서 성실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진정한 좋음을 알아서 성실한 사람은 다른 덕들도 다 가질 것이다. 한편 이런 앎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처음에는 성실, 배려, 책임, 정의를 따로따로 일단 어떻게든 가르치고 습관화시키는 소학 교육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교육을 통해 결국 '사람들을 성실하게도, 배려 있게도, 책임 있게도, 정의롭게도 만들어주는 영혼의 단일한 경향성이나 추동력'에 도달하고자 하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오늘의 소피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입시 강사나 자기계발서 등은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 참는 식의 성실, 나중의 보답과 평판을 위해 지금 베푸는 식의 배려 등 결국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는 통상적 즐거움들을 단지 더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기술로서의 덕들을 가르치는 반면, 국가 교육과정은 성실의 근거를 "인간다운 삶", "진정한 행복"에 둠으로써(교육부, 2015 개정 교육과정, p.7) 쾌락주의가 아닌 데 도덕의 기반을 두고 있다. 진정한 행복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로 자세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어떤 것이 있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주의를 환기하는 일은 가능하며,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대화편 속에서 계속해서 하는 일이다. 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앎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앎을 열망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이 자기에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김유석, 「제9장 소크라테스」, 『서양고대철학1』, 2013, 274쪽). 도덕과 교육에서도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 [작품안내 29]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361a-c).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덕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서는 나중에는 덕이 앎이라고 주장하는데, 덕이 앎이라면 당연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된다. 프로타고라스는 거꾸로 처음에 덕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서는 나중에는 덕이 앎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덕이 앎이 아니라면 당연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런 상황에 대한 나의 해석: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프로타고라스는 사회 존속이나 쾌락의 효과적 추구를 위한 낮은 수준의 덕은 가르칠 수 있지만, 출중한 지도자 수준의 덕은 가르칠 수 없다.  처음에는 프로타고라스가 후자의 덕을  가르친다고 공언하는 것을 보고 덕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고, 마지막에는 프로타고라스가 전자의 덕 차원에 터하고 있다는 것을 확립하면서 덕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강성훈, 『프로타고라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이제이북스, 2011.
Beresford, Adam (Trans.) & Brown, Lesley. (Intro.), Protagoras and Meno, Penguin Books, (2005).
Taylor, C. C. W., Protagoras,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강성훈, 소크라테스의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 논증과 프로타고라스의 반론: 『프로타고라스』 349e-351a , 『철학연구』 82, 2008, 61-80.
강성훈, 덕의 가르침 가능성과 덕의 단일성: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위대한 연설’과 그에 대한 반응, 『서양고전학연구』 50, 2013, 33-72.
유혁, 「제10장 플라톤의 윤리학」, 『서양고대철학1』, pp. 309-339, 도서출판 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