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 서브노트/동양윤리

동양윤리 (6) 이황

neon_eidos 2024. 5. 11. 14:40

기출은 읽기만(김병찬 기출집 ▶교과서5종(천재, 비상, 미래엔, 교학사, 씨마스)▶현자의돌 제시문모음(교과서)▶김병찬

(연계교재 지문, 원전, 기본서, 서브노트들은 나중에 보완할 것)

한국사상연구소 편(2009).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예문서원. 

김영두 역(2003).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H샘 조언(감사합니다)
- 네? 임용 여름부터요? 지금부터 해야죠! 논문이요? 통과될 정도만 해요! 제 생각에 지금 샘은 임용 준비에 더 집중해야 돼요. 집 가지 말고 남아서 공부해요!

 

1. 주리론

  • 주희의 리기이원론을 계승하되, 상대적으로 리기불상잡을 더 강조하고 리의 우위를 주장함. 기에 대한 리의 주재성을 강조. 리는 기의 주재자로서 기를 명령할 뿐 기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하며 기보다 이가 귀함[리귀기천]을 강조한다[천재].
  • 이는 장수이고, 기는 병졸[리수기졸]이라고 하면서, 이와 기를 가치나 역할에 있어서 구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비상]. 순선한 도덕의 근원인 이의 중요성을 부각하고자 함[비상].
  • 리는 사물에 명령하기만 하고 명령을 받지 않는다[2010 기출].
천지간에 이(理)도 있고 기(氣)도 있으니, 이가 있게 되면 곧 기가 생기고, 기가 있으면 이가 따른다. 이는 기의 장수가 되고 기는 이의 졸개가 되어 천지의 공을 이룩한다. (『천명도설 도여서』) (?) 

무릇 이(理)는 기(氣)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재료이다. 이 두 가지는 본래 분별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사물에 있어서는 혼합되어 나눌 수가 없을 뿐이다. (?) 

이(理)는 본래 존귀하여 대립물이 없어 사물에 명령하지만 사물의 명령을 받지 않으니 기(氣)가 이길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가 형체를 이룬 후에는 오히려 기는 이의 토대 또는 재질이 됩니다. 그래서 이가 작용하여 응대할 때는 대개 기가 작용합니다. 기가 이를 따를 때, 이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은 기가 약해서가 아니라 순조롭게 따르는 것입니다. 기가 만약 이에 대항하면 이는 반대로 숨는데 이것은 이가 약한 것이 아니라 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왕은 본래 존귀하여 대항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포한 신하가 기세를 부리면서 오히려 왕과 대항하는 것은 신하의 죄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가 학문을 할 때는 기질이 치우친 것을 바로잡으며, 물욕을 막고 덕성을 높여서 크게 중정(中正)한 도리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 (from 김병찬)

 

  • 리의 작용을 인정한다[2010 기출]. 이황은 이의 능동적 작용을 인정하여 주렴계의 ‘태극동이생양(太極動而生陽)’을 ‘이
    동이기생(理動而氣生)’으로 해석하였다. 즉, 이생기(理生氣)와 이선기후(理先氣後)를 실제적인 사태로 본 것이다(KBC). 
주자가 ‘이(理)는 감정과 의지가 없고 창조 능력도 없다.’고 말한 것은 이의 본연의 체(體)를 말한 것이며, ‘그것이 때에 따라 발현하고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고 말한 것은 이의 지극히 신묘한 생성 작용[用]을 말한 것이다. 본체의 무위(無爲)만을 보고 생성 작용이 드러나는 운행을 알지 못하여 이를 죽은 물건으로 인정한다면 이것은 도리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이치[理]에 감정과 의지, 그리고 조작이 없다는 것은 그 본체가 그렇다는 것일 뿐, 그 쓰임[用]의 차원에서 보면 이치는 그 만나는 곳에 따라 발현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다. 내가 사물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러울 뿐, 이치가 스스로 이를[自到] 수 없음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그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다시 고요해진다. 고요해지면 음을 낳고, 그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인다. 이렇게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해짐이 서로의 뿌리가 되어 음과 양으로 나뉘어져서 양의(兩儀)가 형성된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져서 수화목금토의 오행을 낳으니, 이 다섯 가지 기운이 순조롭게 펼쳐져 사계절이 운행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며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성학십도』, 제1도 태극도설, 한국사상연구소 역, pp. 48-49)

그 진실(眞實)과 무망(無妄)으로 말하자면 곧 천하에 리(理)보다 실(實)한 것이 없고, 그 무성(無聲)과 무취(無臭)로 말하자면 곧 천하에 리보다 허(虛)한 것이 없다. 이것은 다만 ‘무극이태극’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난다. (?)

이(理)는 지극히 허(虛)하면서도 지극히 실(實)하다. 그 본체는 무위(無爲)하지만 작용[用]을 갖추고 있어 만물에 드러난다. 솔개가 나는 것은 기(氣)이지만, 날게 하는 것은 이(理)의 묘용(妙用)이 아님이 없다. (?) 

태극이 운동하고 정지하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운동하고 정지하는 것입니다. 천명이 유행하는 것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입니다. 어찌 다시 그렇게 하는 명령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극, 음양, 오행이 신묘하게 결합하고 응취하여 만물을 생성시키는 관점에서 보면 마치 주재하고 운용하면서 이렇게 시키는 자가 있는 듯합니 다. 곧 『서경』에서 이른바 '위대한 상제가 백성들에게 선한 본성을 내렸다’라든가 정자(程子)가 이른바 ‘주재로 말하면 제(帝)라고 한다’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대개 이와 기가 결합하여 사물에 부여되면 그 신묘한 작용은 저절로 이렇게 될 따름이어서 천명이 유행하여 따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이는 아주 존귀하여 대립물이 없으 며 사물에 명령하지만 사물의 명령을 따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 (from 김병찬) 

 

 

2. 사단칠정론

  • 리기호발설: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고[이발이기수지],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기발이이승지].”
  • 인간의 도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감정인 사단을 일반 감정인 칠정과 구분하였다[비상]. 도덕적 감정인 사단은 ‘이’의 발현으로서 순선무악하다. 반면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을 가리키는 칠정은 ‘기’의 발현으로서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악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미래엔]. 그래서 이가 기의 작용을 주재해야 함. 이가 발한 감정인 사단은 본연지성이 발한 것이고, 기가 발한 감정인 칠정은 기질지성이 발한 것[비상].
  • (리기호발설은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정립함. 기대승은 리와 기, 그리고 사단과 칠정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이황의 견해를 비판함.)
  • 칠정의 선악에 대한 이황의 입장은 기대승과의 논쟁 과정에서 변화한다. 처음 이황은 ‘칠정은 선악미정’이라 주장하였다가 ‘칠정에는 선악이 있다(有善惡)’로 입장을 바꾼다. 그리고 이황은 이 입장 또한 수정하여 ‘칠정은 본래 선하지만 악으로 흐리기 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칠정의 선악에 대한 이황의 최종 입장이다. [KBC]
사람의 몸은 이(理)와 기(氣)가 합하여 생겨난 까닭에 두 가지가 서로 발하여[互發] 작용하고, 발할 적에 서로 소용되는 것이다. (?)

이가 발(發)하고 기가 따른다는 것은 이를 주로 하여 말하였을 뿐이지, 이가 기를 벗어난 것을 말함이 아니니 그것이 사단이다. 기가 발하고 이가 탄다는 것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하였을 뿐이지, 기가 이를 벗어난 것을 말함이 아니니 그것이 칠정이다. (?)

하나는 리를 주로 한 까닭에 리에 나아가 말하고, 하나는 기를 주로 했기 때문에 기에 나아가서 말한 것 뿐이다. 사단에 기가 없지 않지만 리의 발이라 했고, 칠정에 리가 없지 않지만 기의 발이라고 했다.(一則理爲主。故就理言。一則氣爲主。故就氣言耳。四端非無氣。而但云理之發。七情非無理。而但云氣之發。) (퇴계집, 답기명언, 논사단칠정제2서) 

만약 혼합하여 말한다면 칠정이 이와 기를 겸(兼)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을 대응시켜 각각 나누어 말한다면 칠정과 기의 관계는 사단과 이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이 발현하는 데 각각 혈맥이 있고, 그 이름에는 각각 가리키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로 하는 바에 따라서 이와 기로 분류하여 소속시킬 수 있습니다. 나도 칠정이 이와 무관하게 바깥 사물과 우연히 만나 감응하여 발동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칠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그것을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그것을 타는 것입니다. (?)

옛사람이 말을 타고 사람이 출입하는 것으로 이가 기를 타고 운행하는 것에 비유한 것은 참 좋은 비유입니다. 대체로 사람은 말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궤도를 잃게 되니, 사람과 말은 서로 소용되어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 사람이 혹 범범하게 가리키며 ‘간다.’고 말한다면 사람과 말이 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니, 사단ㆍ칠정을 혼합하여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사람이 간다.’고 한다면 굳이 말까지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사단이 이것입니다. 혹 이를 가리켜 ‘말이 간다.’고 한다면 굳이 사람까지 아울러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은 그 가운데 있으니, 칠정이 이것입니다. (?) 

천하에 이(理) 없는 기(氣)가 있을 수 없고, 기 없는 이가 있을 수 없다. 사단(四端)은 이가 발하고 기가 이를 따른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고 이가 기를 탄 것이다. 이가 있으면서 기가 따르지 않는다면 형성되어 나올 수 없고, 기가 있으면서 이가 타고 있지 않으면 이욕(利慾)에 빠져서 금수가 되는 것이다. (?)

마음은 이와 기가 합해진 것이다.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隨] 것이니 순선하여 악이 없다. 그러나 이가 발함에 끝까지 드러나지 못하고 기에 가려지면 흘러서 악이 된다. 또한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乘] 것이니 선하지 않음이 없다. 하지만 기가 발함에 적절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이(理)를 멸(滅)하면 나아가 악이 된다. (?)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그것을 따른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그것에 탄 것이다. 기가 따르지 않는 이는 드러날 수 없고 이가 타지 않는 기는 이기적 욕심에 빠지게 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외부의 자극을 받은 것이고, 측은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정(情)이 움직인 것이다. (?) 

맹자는 성선(性善)의 이치를 드러내어 밝히면서 사단(四端)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사단은 이(理)가 발(發)한 것이라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자는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이다.”라고 말했다. 대개 사단은 이가 발하여 선한 것이므로 이의 발이라 한 것이다. (?)

이(理)에 동정(動靜)이 있기 때문에 기(氣)에 동정이 있다. 이에 동정이 없다면 기가 어떻게 저절로 동정하겠는가? (?) 

사단과 칠정이 비록 같은 정(情)이기는 하지만 연원이 다르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름을 달리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연원이 다르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다르게 말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단의 연원을 이라고 인정한다면,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 즉 칠정의 연원은 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이황: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의 감정은 순수한 이(理)인 까닭에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감정은 기(氣)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기대승: 이와 기를 따로 떼어 각기 사단과 칠정에 분속하여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퇴계전서』, 「답기명언」(사단칠정 제1서)) 

주자가 말씀하시길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고 하셨는데, 사단은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의 발이라 한 것은 실로 의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칠정은 이와 기를 겸하고 선과 악이 있으니, 발한 것이 비록 전부 기는 아니지만 기질의 섞임이 있어 기의 발이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기질의 성에 관한 설이다. (朱子又曰。四端是理之發。七情是氣之發。失四端發於理而無不善。謂是理之發者。固無可疑矣。七情兼理氣有善惡。則其所發雖不專是氣。而亦不無氣質之雜。故謂是氣之發。此正如氣質之性之說也。) (퇴계집, 퇴계선생문집권지십칠, 중답기명언, 부기명언사단칠정총론) 

 

  • 주희의 입장처럼, 본연지성은 곧 천리로서, 기질이 섞여 있지 않은 순수지선한 인간의 본성임. 반면 기질지성은 기질이 섞여 있는 본성으로, 기질의 품질로 인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음. 본연지성이 근본임[KBC].
본연지성이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기질지성이란 리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 정으로써 말한다면, 순전히 리가 발한 것을 사단이라 하고 이와 기가 합하여 발한 것을 칠정이라 한다. (本然之性。主於理而言。氣質之性。兼理氣而言。以情言之。循理而發者爲四端。合理氣而發者爲七情。) (퇴계집, 퇴계선생연보권지2 3년기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다르듯이 정(情)에도 사단과 칠정의 분별이 있다. 성을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만 홀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하는 것이다. (?)

자사가 “하늘이 명했다.”는 성이나 맹자가 “본성은 선하다.”라고 말했을 때의 성, 정자가 “성이 곧 이(理)”라고 말했을 때의 성이나 장횡거가 “천지의 성”이라고 말했을 때의 성이 모두 본연지성(本然之性)입니다. 공자가 “서로 비슷하다.”라고 했을 때의 성, 정자가 “성은 기이며, 기는 곧 성”이라고 했을 때의 성, 주자가 “비록 기 속에 있어도 기는 기대로 성은 성대로 서로 섞이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의 성이 기질지성(氣質之性)입니다. (?) (from 김병찬)

가령 원래 본연지성이 없었다면, 이 기질지성이 또 어디서부터 올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주자, 정자, 장자의 말만 그럴 뿐 아니라, 공자 같은 성인도 “이루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각각 성명(性命)을 바로 한다.”라고도 말씀하셨으니, 어찌 일찍이 어떤 물체는 성이 있는 것이고 어떤 물체는 성이 없는 것이라고 분별한 적이 있겠습니까? 맹자는 산의 성과 물의 성을 말씀했는데, 산과 물이 어찌 일찍이 지각이 있은 적이 있었습니까? 만약 이를 꿰뚫어보셨다면, 천하에 성이 없는 물체는 없다는 것을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오직 물체가 없어야만 이 성이 없게 되는 것이고, 이 물체가 있다면, 바로 보내오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무가 타면 재가 되고, 사람이 묻히면 흙이 되는데, 역시 재와 흙의 기(氣)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재와 흙의 기가 있으면, 곧 재와 흙의 성이 있는 것인데 어찌 마른 물체에는 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from 김병찬)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쟁

[요]

기대승: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 정은 리기를 겸하며, 본성에 근거함. 칠정 중에서 발하여 중절한 것이 사단. 

이황: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이고 리기를 겸하지만, 주리와 주기의 다름이 있음.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여 말하듯 정 또한 주가 되는 바에 따라 분속시킬 수 있음. 칠정과 기의 관계는 사단과 리의 관계와 같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마음(心)에 감정이 일어나기 전의 고요한 상태를 성(性)이라고 하고, 감정이 일어난 뒤의 상태를 정(情)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정이 일어나기 전인 성은 하늘과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오롯이 선하다고 본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바깥의 사물에 감응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절도에 맞지 않아 본성이 이지러지거나 가려질 수도 있으니 정은 선할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단과 칠정을 살펴보자.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은사단과 칠정이 모두 마음속에 뭔가 움직임이 생긴 다음의 상태인 정이라는 전제이다. 사단은 인의예지라는 성이 바깥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발현된 정이므로 항상 선하다. 하지만 칠정은 바깥의 영향을 받아서 발생한 것이므로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이것이 마음에 대한 성리학의 설명이다. 
   한편 성리학에서는 만물을 이와 기로 설명한다. [...]
   퇴계와 고봉의 주장은 위와 같은 공통된 성리학의 세계관·인간관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사단칠정과 이기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두 사람의 견해는 갈라지게 된다. 퇴계의 주장은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고치면서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이다." 말한 데에 잘 나타나 있다. 퇴계의 이 말이 바로 두 사람의 사단칠정 논쟁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곧 사단은성이 그대로 드러난 정이므로 한르과 인간의 원리인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칠정은 바깥 사물이 사람에게 닿아 마음속에 생기게 되는 감정이니, 바깥 사물의 실체인 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마주 놓고 이와 기에 나누어 붙였다. 인간의 감정을 그 연원에 따라 이에서 온 것과 기에서 온 것으로 갈라놓고 보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사물의 원리인 이가 움직여 선한 감정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퇴계 철학의 독자성을 드러내 주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고봉은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에 나누어 붙이는 견해에 반대했다. 그에 따르면 칠정은 정의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기가 합쳐져 있고 선악의 가능성이 공존한다. 반면 사단은 성을 그대로 드러내어 오롯이 선한 것만을 칠정에서 따로 떼어 말한 것일 뿐이다. [...] (김영두 역, 옮긴이의 글, 592-4)

 

 

  • 기대승의 첫 번째 비판: [칠정 밖에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님. 칠정은 정 전체를, 사단은 정의 일부분을 가리킨 것. 사단은 칠정 중 발하여 중절한 것의 묘맥입니다. 칠정의 발이 선으로도 되고 악으로도 됨. 리기는 분리될 수 없음 강조.]
자사가 말하기를,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때를 중도[中]라 하고, 이것들이 발현하여 모두 절도에 맞은 때를 조화[和]라고 한다." 했고 맹자는 말하기를, "측은한 마음은 어짊의 단서이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단서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바름의 단서익,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로움의 단서이다." 했습니다. ... 자사의 말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맹자의 이론은 가르고 나누는 것입니다. 
   무릇 아직 발현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성이라 하고 이미 발현된 것은 정이라 하는데, 성은 언제나 선하고 정은 선악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만 자사와 맹자가 강조하는 것이 서로 다른 까닭에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 칠정의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영두 역, p. 354)

원래 성(性)이 처음 발할 때에 기가 잘못 작용하지 않으면 곧 본연의 선이 이루어지니, 바로 맹자가 말한 사단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천리가 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칠정의 범위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바로 칠정 중 발하여 중절한 것의 묘맥입니다. 

 

  • 이황의 변론 1: [기와 성을 섞어서 말하면 성의 본연을 드러낼 수 없듯이, 사단과 칠정도 분별해야 함.]
‘성(性)’ 한 자로 말하면, 자사가 말한 ‘천명의 성’과 맹자가 말한 ‘성선의 성’, 이들 두 성자의 가리켜 말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기가 부여된 중에 이 이의 원래의 본연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가리키는 것이 이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순선무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기를 포함하여 말한다면 이미 성의 본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사와 맹자는 도의 완전함을 투철히 보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지 하나만 알고 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정말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한다면 성의 본연을 드러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제 생각으로는 정에 사단과 칠정의 분별이 있음은 마치 성에 본성과 기품의 다름이 있음과 같습니다.
   사단은 어디에서 발합니까?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합니다. 칠정은 어디에서 발합니까? 외물이 형기에 감촉하여 마음 가운데서 움직여 경(境)을 따라 나옵니다. ... 어찌 가운데에 순리로 있던 것이 발했는데 기와 혼잡되겠으며, 밖에서 감촉되 는 것이 형기인데 그 발하는 것이 이의 본체로 되겠습니까? ... 이렇게 보면 두 가지가 다 이기를 벗어나지 않을지라도, 그 소종래(所從來)로 말미암아 각각 그 소주(所主)와 소중(所重)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느 것은 이이고 어느 것은 기라 함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 기대승의 두 번째 비판: [사단과 칠정 모두 정이고, 모두 성에서 발한 것이고, 모두 물에 감촉되어 동하는 것이고, 모두 절도에 맞거나 맞지 않음(화와 불화, 선과 불선)이 있음.]
원래 인간의 정은 하나입니다. 그 정이란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맹자는 이기가 묘합한 가운데서 오로지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만 가리켜 말하였으니, 사단이 이것입니다. 자사는 이기가 묘합한 가운데 나아가 다 혼합하여 말하였으니, 정은 참으로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것입니다. 칠정이 이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사단은 참으로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칠정도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자가 어째서 “정은 성의 발이다.” 라고 했겠습니까?

뒤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사단의 발은 순리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기를 겸하였으므로 선악이 있다.” 등등으로 개정하셨는데, 전의 것보다는 한결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두 가지 정이 있는 듯한 의문이 일고, 비록 두 정의 의문이 없더라도 역시 그 정 가운데 두 가지 선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심중에 있을 때는 참으로 순수한 천리여서 이때는 다만 성일 뿐 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발하면 비로소 곧 정이어서 화와 불화不和의 다름이 있게 됩니다. 아직 발하지 않을 때는 오로지 이지만, 이미 발한 때는 바로 기를 타고 행합니다.

칠정 역시 모두 선한 것입니다. 오직 그 발한 것이 절도에 맞지 않을 때 한쪽에 치우쳐 악으로 될 뿐입니다. ... 사단의 발함도 절도에 맞지 않을 때가 있으니 진실로 다 선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일반인 중에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있고, 시비를 따져서는 안 될 것을 시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이황의 변론 2: [다른 것 중의 같음을 보고, 같은 것 중의 다름을 봐야 함. 혼합하여 말하면 칠정은 이기를 겸하지만, 분별하여 말하면 사단과 칠정을 각각이 주로 하는 바에 따라 분속할 수 있음(칠정은 기를 주로 하고, 사단은 이를 주로 함)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임.] 
공의 생각으로는 “사단칠정이 다 이기를 겸하여 동실이명이므로 이나 기에 분속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으로 말하면, 다른 것 중에 나아가 그 같음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둘을 실로 혼합하여 말하는 것이 많이 있고, 같은 것 중에 나아가 다름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둘을 가리켜 말함이 본래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같지 않음과 분속이 있게 됩니다.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을 수 없습니까?

무릇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른다는 것은 이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일 뿐 기 밖의 이를 말함이 아니니, 사단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가 발함에 이가 탄다는 것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일 뿐 이 밖의 기를 말함이 아니니, 칠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맹자의 기뻐함, 순의 화냄, 공자의 슬퍼함과 즐거움은 기가 이를 따라 발함에 조그만 장애도 받지 않은 것이므로 이의 본체가 온전한 것입니다. 일반인이 어버이를 보면 기쁘고 상을 당하면 슬픈 것도 기가 이를 따라 발한 것이지만, 이 때는 그 기가 가지런할 수 없어 이의 본체도 순전할 수 없습니다. 이로서 논하면 비록 칠정을 기의 발이라 해도 이의 본체에 무엇이 해롭겠으며, 또 어찌 형기와 성정이 서로 관련되지 않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말..

 

  • 기대승의 세 번째 비판: ["사단이발이기수지 칠정기발이리승지"는 사단에는 리기가 모두 있지 않고 리만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이 발할 때는, 이가 움직여 기가 함께하기도 하고, 기가 감응하여 이가 타기도 한다"라고 개정하고 싶다.]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 라는 두 구절은 매우 정밀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두 구절이, 칠정은 이기를 겸유하였지만 사단은 오직 이 한쪽만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득 이 두 구절을 “정이 발할 때는, 이가 움직여 기가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기가 감응하여 이가 타기도 한다”라고 개정하고 싶은데, 이와 같이 어구지음이 선생님의 뜻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기가 이를 따라 발하여 조금의 장애도 없는 것이 바로 이의 발입니다. 만약 이를 도외시하고 다시 이의 발을 찾는다면 깊이 따지면 따질수록 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자가 이르길 “기는 뭉치고 조작할 수 있으나 이는 정의도 계탁도 조작도 없다. 그러나 기가 뭉친 곳에는 바로 이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로 발용이 있다느니 그 발함에는 또 기다린다 하니, 이것은 이에 도리어 정의, 계탁, 조작함이 있는 것이며, 또 이기 두 가지가 마치 두 사람이 마음의 한쪽씩을 나누어 차지하고서 번갈아 나와 일을 주도하면서 서로 우두머리와 따르는 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의 달...
태양과 구름...

<논쟁의 마무리>
기가 이를 따라 발한 것을 이의 발이라 하면 이것은 기를 이로 보는 병통을 면하지 못합니다.

... 사단과 칠정을 이기 에 분속함에 절로 의심할 것이 없겠으며, 사단과 칠정의 이름과 뜻에도 각각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음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은 것은 사단과 본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더라도 이는 그 안에 있으므로 그 발하여 절도에 맞은 것이 천명의 성이고 본연의 체이니, 어찌 기의 발이어서 사단과 다른 것이라 하겠습니까? 

 

  • 인심도심: 인심은 인욕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음. 도심은 순수지선한 리/성/성명을 근원으로 함. 인심이 칠정이 되고, 도심이 사단이 됨.

[2021기출: 인심과 도심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이황의 입장을 서술할 것]

인심이란 인욕의 근본이고 인욕이란 인심의 말류이다. 무릇 형기에서 생하는 마음은 성인이라도 없을 수 없으므로 단지 인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곧바로 인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욕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여기에 말미암았기 때문에 인욕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욕에 빠지는 마음은 중인들이 천리를 회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인욕이라는 이름이 되었으니 인심에서 변칭된 것이다. 이로써 인심은 처음에는 본래 이와 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심의 말류라고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심은 먼저이고 인욕은 나중이며 하나는 바르고 하나는 삿된 것이니 경중으로 말할 수 없다. (人心者。人欲之本。人欲者。人心之流。夫生於形氣之心。聖人亦不能無。故只可謂人心。而未遽爲人欲也。然而人欲之作。實由於此。故曰人欲之本。陷於物欲之心。衆人遁天而然。故乃名爲人欲。而變稱於人心也。是知人心之初。本不如此。故曰人心之流。此則人心先而人欲後。一正一邪。不可以輕重言也。) (퇴계집 권40, 答㝯姪問目) 

나누어서 말하면 인심은 진실로 형기에서 생하고 도심은 진실로 성명에서 근원한다. 합해서 말하면 도심은 인심 사이에 섞여서 나오는 것이니, 실로 서로 바탕이 되고 서로 발하는 것이어서 판연히 이물(二物)이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공부를 말할 즈음에 반드시 말하기를 도심이 주가 되고 인심이 그 명을 들어야 한다 운운하였으니, 이는 모름지기 몸소 절실하게 체험하여 공부가 오래되면 마땅히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 (from 김병찬)

인심이 칠정이 되고, 도심이 사단이 된다는 것은, 『중용 서(序)』의 주자설 및 허동양의 설 등으로 보면 두 가지가 칠정과 사단이 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함이 없다. 내가 이전에 이굉중에게 답해서 말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만약 명실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인심이란 명칭은 이미 도심과 상대하여 세워진 것이니 곧 자기 몸에 있어서 개인적 인 것에 속한다. 대개 이미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한 이상 한쪽에 치우친 것이어서, 단지 도심의 명령을 들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도심과 더불어 혼돈하여 하나로 칭할 수는 없다. 칠정 같은 것은 비록 기에서 발출한다고 하나, 그러나 실은 공평하게 세운 이름이요 일변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악기」 와 『중용』과 「호학론」가운데에서 모두 사단을 그 가운데에 포함하여 혼륜하여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자사가 “희노애락 의 미발을 중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한 것은 가하지만, 만약 인심의 미발을 중이라 운운한다면 불가하다. 정자가 말하기를 “그 중이 동하여 칠정이 나온다.”고 한다면 가하지만, 말하기를 “그 중이 동하여 인심이 나온다.”고 한다면 불가하다. 저 도심과 사단이 비록 인심 • 칠정의 설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도심은 심으로써 말한 것이니 시종과 유무를 관통하였으며 사단은 단으로 말한 것이니 발현처에 나아가 그 실마리를 가리켜 말한 것이어서, 또한 약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평숙에게 답하여 운운한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또한 그것이 같은 데로 돌아가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 (from 김병찬)

 

3. 수양론: 경(敬)

  • 경으로 마음을 주재할 것을 강조: 이황은 사단은 선하여 악이 없지만 기에 가리면 불선이 있게 되며, 칠정은 기가 발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된다고 본다. 따라서 악행을 피하는 관건은 기에 있으므로 기를 제어해야 사단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천재]. 사단과 칠정의 근원을 구분하여 기가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조심하고, 이(理)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는 것이 경으로 수양하는 목적이다[천재]. 사람의 행동을 주재하는 마음을 자각 상태로 유지하여 도덕 본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바로 경이다[씨마스].
  • 경이 수양의 근본. 경은 '마음을 주재하는 것'. 수양의 핵심은 마음을 다스려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 경이 성학의 근본이요 토대. [KBC]
  • 지경의 방법: 의식을 집중시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주일무적],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며[정제엄숙], 항시 또렷이 깨어 있는 것[상성성] 
  •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과정인 궁리에 앞서 거경의 중요성을 강조[씨마스].
마음의 이(理)는 너무나 넓어 잡을 수 없고 흐려서 그 경계를 알 수 없으니, 실로 경(敬)으로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성(性)을 보존하고, 그 본체를 세울 수 있겠는가? 이 마음이 발할 때는 은미하여 털끝처럼 살피기 어렵고 위태로워 구덩이처럼 밟기 어려우니, 참으로 경으로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기미를 바르게 하고 실제의 작용에 통할 수 있겠는가? 군자의 학문은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을 때 반드시 경을 위주로 하여 존양(存養) 공부를 하고 마음이 이미 발했을 때도 역시 경을 위주로 하여 성찰(省察) 공부를 해야 한다. 이는 경학(敬學)이 처음과 끝이 되고 체와 용을 관통하는 까닭이다. (『천명도설 도여서』) (?)

사람이 일을 하려면 반드시 뜻을 세움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뜻이 서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요, 또 비록 뜻을 세웠다 해도 진실로 거경(居敬)하여 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범연히 주장이 없어져 아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낼 것이니 실속 없는 말에 그치고 말 것이다. 뜻을 세우려면 사물 밖으로 높이 뛰어 넘어서야 하고, 거경하려면 언제나 사물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과 사물로 하여금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 말할 때도 모름지기 경(敬)해야 할 것이요, 움직일 때도, 앉아 있을 때도 경해야 할 것이니 잠깐이라도 이 경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언행록』) (?)

사람은 생각이 없을 수 없으니, 실없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만 한 것이 없으니 경하면 마음은 한결같아지고 마음이 한결같으면 생각은 스스로 고요해질 것이다. (『언행록』) (?)

항상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혀 마치 상제를 모신 듯이 하라.
   걸음걸이를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하며, 땅을 골라 밟는 것이 마치 개미 둑 사이로 말을 달리듯이 하라.
   문을 나서면 손님을 대하듯 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하며, 조심조심 두려워하여 잠시도 안이하게 행동하지 말라.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고, 잡생각 막기를 성문 지키듯 하며, 삼가고 조심하여 잠시도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 (『성학십도』, 제9장 경재잠도)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는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 의식이 있을 때나 없을 때를 막론하고 오직 마땅히 경(敬)으로써 위주로 삼아 동정(動靜) 간에 바름을 잃지 않으면, 의식이 싹트기 전에는 마음의 본체가 텅 비고 밝아 본령(本領)이 깊고도 순수하고, 의식이 발생할 때에는 의리가 환히 드러나 물욕(物慾)이 물러가고 혼란스러움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이런 능력이 쌓여 성숙함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학문의 중요한 방법이다. 

요컨대 이기를 겸하고 성정을 통섭하는 것은 마음이요, 성이 발하여 정이 되는 그 경계는 바로 마음의 기미요, 만화의 지도리로서 선과 악이 여기에서부터 갈라집니다. 학자는 진실로 한결같이 경을 견지하여 이와 욕에 어둡지 않고, 더욱 이 마음을 삼가 미발인 때에 존양의 공부를 깊이하고, 이발인 때에 성찰을 익숙하게 하여 진리를 쌓고 오래도록 힘쓰면, 이른바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중용을 잡는’ 성학과 ‘체를 보존하여 사물에 응하여 작용하는 심법을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여기에서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학십도』, 심통성정도) 

무릇 마음이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고, 경이란 또한 한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다. (?) (from 김병찬)

인륜을 갈고 닦느냐 그것을 어기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경(敬)을 하느냐 방심하느냐 하는 차이에 있을 뿐이다. 경하면 욕심이 적고 사리가 밝아진다. 욕심을 줄이고 줄여서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정(靜)할 때는 사욕이 비고, 동(動)할 때는 바르게 되어 성인이 되는 학문을 배우기에 적합하게 된다고 한다. (?) (from 김병찬)

사람이 학문을 할 때에는 일이 있거나 없거나 뜻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오로지 마 땅히 경으로써 주를 삼아 동할 때나 정할 때에 법도를 잃지 않게 되면 그 생각이 아직 싹트기 전에는 마음 자체라 허명하여 근본이 깊고도 순수하며 그 생각이 이미 발함에 이르러서는 의리가 환히 드러남으로써 물욕이 물러나고 모든 시끄러움이 차츰 감소될 것인데 이렇게 쌓고 쌓아서 성숙하기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학문의 요체이다. (?) (from 김병찬)

경으로 근본을 삼고 이치를 궁리하여 치지하고, 몸을 돌이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법을 묘하게 하는 것이며, 도학을 전하는 요체이다. (?) (from 김병찬)

경이라는 한 글자가 성학의 시작과 끝맺음에 걸친 일관된 요령이다. ... (중략) ... 그리고 경이란 상하에 모두 통하는 것으로서, 공부를 착수하는 데 있어서나 그 공부의 효과를 거두는 데 있어서나 항상 실천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이 이와 같았으며 이제 이『성학십도』도 모두 경을 위주로 한다. (?) (from 김병찬)

 

[내가 성학십도 보고 추가]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한 마음으로 지극히 뚜렷하고 지극히 알찬 리를 구하는 것이니 마땅히 터득해 내지 못하는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하면 얻고’ ‘슬기롭게 되어 성인이 되는’ 일을 어찌 오늘날이라고 징험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의 텅 빔과 신령함도 만약 경우로써 주재(主宰)하지 못하면 일이 눈앞에 닥쳐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리의 뚜렷함과 알참도 만약 밝게 비추어 보지 못하면 눈으로 날마다 접하고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도(圖)를 토대로 하여 생각을 다하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성학십도』를 올리는 차자, 한국사상연구소 역 p. 39)
   [...] 그런데 지경(持敬)이란 생각과 배움을 겸하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관통하며 안과 밖을 합하고 드러난 것과 은밓나 것을 하나로 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은 반드시 이 마음을 가지런하고 장엄하며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에서 보존하고 이 리를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 사이에서 궁구하여,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때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함을 더욱 엄하고 조심스럽게 하며 은미하여 혼자만 아는 마음의 기미에서도 성찰하는 것을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도(圖)에 나아가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이 도에 전일하여 마치 다른 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하고, 한 가지 일에 나아가 그 일을 익힐 때는 마땅히 그 일에 전일하여 마치 다른 일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하여, 아침저녁으로 늘 한결같이 하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 이어지게 하며, 혹은 야기(夜氣)가 청명한 때에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어 완미하거나 혹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길러나가야 합니다. (『성학십도』를 올리는 차자, 한국사상연구소 역 pp. 40-41)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경(敬)을 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 주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정자는 일찍이 ‘하나에 전일하여 다른 일로 옮겨감이 없는 것’(주일무적)으로써 말하였고,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며 마음을 엄숙하게 하는 것’(정제엄숙)으로써 말하였다. 문인 사량좌의 설에는 이른바 ‘항상 또렷하게 깨어있게 하는 법’(상성성법)이란 말이 있으며, 윤돈의 설에는 ‘그 마음을 수렴하여 한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다(기심수렴, 불용일물)라고 말한 것이 있다.”
   경이란 한 마음의 주재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그 힘쓰는 방법을 알면 소학이 경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여 시작됨을 안다면 저 대학도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끝맺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로 꿰뚫을 수 있어 의심이 없게 된다. (『성학십도』, 제4도 대학도, 한국사상연구소 역 pp. 82-83)
   [...] 이것이 모두 일찌기 하루라도 경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경’이라는 한 글자가 어찌 성인이 되는 학문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성학십도』, 제4도 대학도, 한국사상연구소 역 p. 84)
   [...] 경이라는 것은 또한 상하를 다 관통하는 것이니, 공부를 시작하고 공부의 효과를 거두어들임에 있어 모두 마땅히 종사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도 위에서 인용한 『대학혹문』과 같았고, 지금 이 열 개의 그림도 모두 ‘경’으로써 주를 삼았습니다. (『성학십도』, 제4도 대학도, 한국사상연구소 역 p. 85) 

 

  •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이와 하나가 되는[심여리일] 경지를 추구함[비상].
참다움을 쌓은 것이 많아지고 노력을 기울인 지가 오래되면, 자연히 자신의 마음[心]과 사물의 이치[理]가 서로 하나가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혼연일체가 될 것입니다. 또 자신의 습관[習]과 마땅히 해야 할 일[事]이 어긋나지 않아 점점 평이하고 편안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저마다 하나씩이었던 것들이 마침내 하나가 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학십도』를 올리는 글) 

 

  • 지행
궁리한 다음 실천 속에서 분명하게 체득해야 진정한 앎이 된다. 날마다의 생활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깨달음이 무슨 소용인가? (『자성록』)

사람의 마음이 형기(形氣)에서 발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능하여, 좋아하고 싫어함에 표리(表妻)가 한결같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색을 보자마자 바로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서 진실로 좋아하니, ( 행 )이/가 ( 지 )에 붙어 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리(義理)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 (중략) ... 불선(不善)을 보고도 싫어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으며, 선(善)을 알고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좋아함과 싫어함[好惡]’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속이지 말도록 한 것은 옳지만, ‘갑’이 형기의 하는 바를 끌어다가 의리의 ( 지 )와/과 ( 행 )에 대한 설을 밝히려 한 것은 대단히 옳지 않습니다. (『퇴계전서』, 권41,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 中) [2023기출: 왕수인(갑)과 이황(을) 지문에서 빈칸에 지, 행 넣기] (from 김병찬) 

 

  • 궁리
사물의 이(理)는 그 근본에 있어서 본래 지선(至善)아 아닌 것이 없으나,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면 그른 것이 있는 것 또한 필연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격물하고 궁리하는 까닭은 시비와 선악을 탐구하고 밝혀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려는 것이다. (?) (from 김병찬)

경(敬)을 위주로 하여 모든 사물마다 소당연과 소이연을 궁구하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반복해서 깊이 생각하고 뜻을 잘 새겨서 체인해서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리하여 세월이 오래되고 공력이 깊어지면 하루아침에 자기도 모르게 의혹이 눈 녹듯이 풀리어 활연관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체와 용이 하나의 근원이며, 현(顯)과 미(微)가 차이가 없음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태로운 것과 은미한 것에 미혹되지 않고 정(精)하고 전일(專一)하게 하는 데 있어서 현혹됨이 없이 중(中)을 잡을 수 있다. 이것을 진지(眞知)라고 한다. (?) (from 김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