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 서브노트/동양윤리

동양윤리 (3) 순자

neon_eidos 2024. 1. 24. 12:04

기출 확인▶교과서5종(천재▷비상▷미래엔▷교학사▷씨마스)▶현자의돌 선생님, Hamartia 선생님 제시문모음▶ 2024 김병찬 교수의 서양.동양.한국윤리: 중등임용 시험대비』, 김병환 교수의 동양윤리사상 강의』
+ 김학주(2008), 『순자(2판)』, 을유문화사

+ 동양고전DB 『순자집해』

(아래 인용문들은 두 번역본과 원문을 참고해서 내가 최종적으로 다듬은 것. 출처를 찾을 수 있는 한에서 '편-장'을 표기함. 장 구분은 책마다 다른데, 아래에서 장 구분은 김학주의 구분임.)

 

# 이 임용 노트 게시물들 모두 미완성이고, 무한 수정될 예정임.

# 임용시험을 차라리 좁고 깊게 내면 좋겠다. 맹자나 순자 같은 책들은 읽어야 할 편을 몇 개로 정해 주고, 논술이나 구술로 어떤 부분을 중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고 자기 해석을 제시하라는 식으로 내면 좋겠음. 그러면 깊은 공부를 하도록 유도될 텐데. 그런데 임용시험 형식은 어떻게 정해지는 거지? 임용고시 정책의 정당성도 숙의를 통해 확보돼야 하지 않을까...

 

시험과 무관하게 그냥 내가 좋아서 가져온 제1(권학)편 1장(학문을 권하는 건 성선설이나 성악설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성악설의 레토릭이 더 드라마틱한 느낌이 있음):

군자들은 “학문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푸른 물감은 쪽풀에서 얻지만 쪽풀보다 더 파랗고, 얼음은 물로 이루어졌지만 물보다 더 차다. 나무가 곧아서 먹줄에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굽혀 수레바퀴를 만들면 굽은 자에 들어맞게 되고, 비록 바싹 마른다 하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것은 굽혔기 때문이다.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군자도 널리 배우며 매일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살피면 앎이 밝아지고 행동에 허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 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것을 알지 못하고, 깊은 계곡 가까이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터운 것을 알지 못하며, 옛 임금들이 남긴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오(吳)나라나 월(越)나라나 오랑캐의 자식들도 태어났을 때는 같은 소리를 내지만 자랄수록 풍습이 달라지는 것은 가르침이 다르기 때문이다. (...)

 

 

1. 성악설, 화성기위, 예

  • 사람의 본성은 악하며, 선해지는 것은 인위적 노력 때문임.
  • 본성이란 배우지 않고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을 말하는데, 인간의 본성은 이익과 쾌락을 좋아하고 서로 미워하며 시기하므로, 그대로 두면 사회적 혼란이 발생함. (맹자의 성선설 비판: 본성이란 배우거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말함; 사람을 본성대로 내버려두면 악을 행함; 본성이 선하다면 성왕과 예의가 소용이 없을 것.)
  • 그래서 본성을 변화시키고 인위를 일으켜야[化性起僞] 함. 성인이 만든 예를 배우고 악한 본성을 교화해야 사회 질서가 확립됨.

# 좀 많지만, 관련 여러 구절들을 아래에 모아봄.

1) 성악편

23(성악)-1.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선은 인위적인 노력에서 비롯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한다. 이것을 따르니 다툼이 일어나고 사양함이 없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하는데, 이것을 따르니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며 충성과 믿음이 없어진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귀와 눈의 욕망이 있어 아름다운 소리와 빛깔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니 지나친 혼란이 생기고 예의와 아름다운 형식이 없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본성을 따르고 사람의 감정을 좇는다면 반드시 다투고 뺏게 되며, 분수를 어기고 이치를 어지럽히게 되어 난폭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의 교도가 있어야 하며, 그런 뒤에야 서로 사양하게 되고 아름다운 형식을 갖게 되어 다스려짐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은 인위에서 나온다[其善者 僞也; 김학주: 그것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다].

23(성악)-2.
그래서 구부러진 나무는 반드시 교정목을 대고 쪄서 바로잡은 뒤에야 곧아지며,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로 간 뒤에야 날카로워진다. 지금 사람의 본성이 악하니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이 있은 뒤에야 바르게 된다. 지금 사람들에게 스승과 법도가 없다면 편벽되고 음험하여[偏險] 바르지 않을 것이며, 예의가 없다면 이치에 어긋나는 짓을 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다.
   옛날 성왕께서는 사람들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편벽하고 음험하며 바르지 않으며, 이치에 어긋나는 어지러운 짓을 해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 예의를 만들고 법도를 제정해 사람들의 감정과 본성을 바로잡고 수식함으로써 그것을 올바르게 하였으며, 사람들의 감정과 본성을 길들이고 교화함으로써 이를 올바로 인도하였다. 이에 비로소 모두 잘 다스려지고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스승과 법도에 교화되고 학문을 쌓으며 예의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본성과 감정을 멋대로 버려두고 멋대로 행동하는 데 안주하고 예의를 어기는 자를 소인이라 한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은 인위에서 나온다.

23(성악)-3. [2024B기출]
맹자는 “사람이 배우는 것은 그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잘 알지 못하고 인간의 본성[性]과 인위[僞]의 구별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이다. 본성이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배울 수 없고,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不可學 不可事]. 예의란 성인이 만들어낸 것으로 배우면 행할 수 있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배워서 될 수 없고 노력해서 될 수 없는 것으로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본성이라 하고, 배워서 할 수 있고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사람에게 있는 것을 인위라 한다. 이것이 본성과 작위의 구분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 볼 수 있는 시력은 눈에서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들을 수 있는 청력은 귀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니, 눈의 시력과 귀의 청력은 배울 수 없음이 분명하다.
   맹자는 “대체로 사람의 본성이 악해진 것은 분명히 모두가 그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본성대로 내버려두면 그 질박함을 떠나고 그 고유한 자질을 벗어나 반드시 선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今人之性 生而離其朴 離其資 必失而喪之].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다.
# 사람은 악한 '본성'뿐만 아니라 선한 '질박함'도 타고난다는 것? 아래 장에서도 마찬가지 뉘앙스.

23(성악)-4.
이른바 성선설이란 본래의 질박함이 떠나지 않아야 아름답고, 자질이 떠나지 않아야 이로운 것이다[所謂性善者 不離其朴而美之 不離其資而利之也; DB: 이른바 본성이 선해진다는 것은 그 질박함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변화되며, 그 고유한 자질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더 좋아지는 것이다]. 자질과 질박함의 아름다움, 마음과 뜻의 선함을 마치 볼 수 있는 시력이 눈을 떠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청력이 귀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눈은 밝게 볼 수 있고 귀는 분명히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이 밝게 보고 귀가 분명히 듣는 것 같다고도 한다.
   사람의 본성은 배고프면 배불리 먹으려 하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으려 하며, 수고로우면 쉬려고 하니, 이것이 사람의 감정과 본성이다. 그런데 사람이 배고프더라도 웃어른을 보면 감히 먼저 먹지 않는 것은 사양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수고로우면서도 감히 쉬려 하지 않는 것은 대신 일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사양하고 아우가 형에게 사양하며, 자식이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고 아우가 형을 대신해서 일하는데, 이 두 가지 행동은 모두 본성에 반대되고 감정에 어긋난다. 그렇지만 효자의 도리요 예의 형식적 수식[禮義之文理; DB: 예의의 법도]이다. 그러므로 감정과 본성을 따르면 사양하지 않게 되며, 사양하면 감정과 본성에 어긋나게 된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해지는 것은 작위 때문이다.

23(성악)-5.
어떤 사람이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면 예의(禮義)는 어디서 생기는가?” 하고 물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의는 성인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지,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쳐서 질그릇을 만드는데, 질그릇은 옹기장이의 작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또 목수가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은 목수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 생각을 쌓고 작위를 오랫동안 익혀 예의를 만들어내고 법도를 세운다. 그러니 예의와 법도는 성인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눈이 색깔을 좋아하고 귀가 소리를 좋아하고 입이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고 몸은 상쾌하고 편안함을 좋아하는데, 이는 모두 사람의 감정과 본성[情性]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느껴서[感; DB: 외물에 감촉되어]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어떤 일이 있은 뒤에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느껴도 그러하지 못하고 반드시 또한 어떤 일이 있은 뒤에야 그렇게 되는 것을 일컬어 작위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성과 작위가 생겨나게 하는 것들이 같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본성을 변화시켜 작위를 일으키고[化性而起僞], 작위를 일으켜 예의를 만들어 내고, 예의를 만들어 내어 법도를 제정한다. 그러니 예의와 법도는 성인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여러 사람들과 같은 것, 곧 성인이 대중과 다름이 없는 것이 본성이고, 대중과는 다르고 훨씬 뛰어난 것이 작위이다.

23(성악)-6.
이익을 좋아하고 얻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요 본성[情性]이다. 예를 들어 [형제가 있는데] 재물을 취해 나누어 갖게 되었다고 하자. 이때 다만 감정과 본성을 따른다면 이익을 좋아하고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형제가 서로 성내며 다툴 것이다. 그러나 예의의 규범[禮義之文理; 김학주: 예의의 형식과 이치]에 교화된다면 나라 안의 다른 사람에게라도 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감성과 본성을 따르면 곧 형제라도 다투고, 예의의 교화를 받으면 나라 안의 다른 사람에게라도 사양할 것이다.
   무릇 사람들이 선해지고자 하는 것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얇으면 두터워지기를 바라고 흉하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며 좁으면 넓어지기를 바라고 가난하면 부유해지기를 바라며 천하면 귀해지기를 바라는데, 진실로 자기에게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려 한다. 그러므로 부유하면 재산을 바라지 않고 귀하면 권세를 바라지 않으니, 진실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이 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 ἔρως.
   사람의 본성은 본디 예의가 없으므로 노력하여 배우고 그것을 지니기를 추구하며, 본성은 예의를 모르기 때문에 사색하고 고려하여 그것을 알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만 지니고 있다면[性; 김학주: 生, 낳은 그대로 있다면] 사람이 예의가 있을 수 없고 예의를 알 수도 없다. 사람에게 예의가 없다면 질서를 어지럽히고[亂], 예의를 모르면 도리를 거스르게 된다[悖]. 그러므로 본성만 지니고 있다면[낳은 그대로 있다면] 도리를 거스르고 질서를 어지러워짐이 자기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則悖亂在己; DB: 도리를 거스르고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는데 이는 자기가 <예의로 교화되지 않는 데에> 있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니, 그것이 선해지는 것은 작위 때문이다.

23(성악)-7. [2024B기출]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 무릇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하에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바르고 조리 있고 평안하고 다스려지는 것[正理平治]이며, 악하다고 하는 것은 치우치고 위험하고 어그러지고 혼란스러운 것[偏險悖亂]이다. 이것이 선악의 구분이다. 진실로 사람의 본성이 본디 단정하고 순리롭고 공평하고 질서를 지키는 것이겠는가? 그렇다면 성왕이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예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성왕과 예의가 있다 하더라도 [본성이 이미] 단정하고 순리롭고 공평하고 질서를 지키는데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것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그러므로 옛날에 성왕은 사람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편벽되고 음험하여 바르지 않고 도리를 거스르고 질서를 어지럽혀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임금의 권세를 세워 그들을 통치하고, 예의를 밝혀 그들을 교화하고, 법도를 세워 그들을 다스리고, 형벌을 무겁게 하여 그들의 〈범죄를〉 금지함으로써, 천하가 모두 잘 다스려지고 선에 부합되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이 성왕의 다스림이며 예의의 교화이다.
   지금 시험삼아 임금의 권세를 버리고, 예의에 의한 교화를 없애며, 법도에 의한 다스림을 버리고, 형벌로 금지하는 것을 없애고서, 세상의 백성들이 서로 어떻게 어울려 사는지 살펴보자. 그러면 강자는 약자를 해치고 그들의 것을 빼앗으며, 다수는 소수에게 난폭하게 굴면서 이들을 짓밟을 것이다. 세상이 도리를 거스르고 질서를 어지럽혀 금세 <제후국들이> 잇달아 멸망할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니, 그것이 선해지는 것은 작위 때문이다.

23(성악)-8. (...)
지금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하는데, 분별 있게 잘 들어맞거나 증거가 잘 들어맞는 일이 없고[無辨合符驗], 앉아서 말한 것을 일어나서 실천할 수 없고 널리 알려 시행할 수가 없으니, 어찌 매우 심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본성이 선한 것으로 여긴다면 성왕을 버리고 예의를 없애는 것이다. 본성이 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성왕을 따르고 예의를 존중하는 것이다[性惡則與聖王 貴禮義矣].
   그러므로 댈나무가 생겨난 것은 굽은 나무가 있기 때문이며, 먹줄이 만들어진 것은 곧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고, 군주를 세우고 예의를 밝히는 것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니, 그것이 선해지는 것은 작위 때문이다. 곧은 나무가 댈나무를 쓰지 않아도 곧은 것은 그 본성이 곧기 때문이고, 굽은 목재가 반드시 댈나무를 대고 불로 쪄서 바로잡힌 뒤에야 곧아지는 것은 그 본성이 곧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반드시 성왕의 다스림과 예의의 교화[聖王之治 禮義之化]가 있은 뒤에야 모두 잘 다스려지고 선함에 부합되는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니, 그것이 선해지는 것은 작위 때문이다.

 

# 나는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모두 선해지려는 수양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말하려 하며, 동일한 수양의 과정을 다르게 기술한 것이라고 이해. 우리 안에는 저속한 부분과 고귀한 부분이 있는데, 맹자는 후자를 본성으로 규정하고 그걸 확충하라고 하고, 순자는 전자를 본성으로 규정하고 그걸 교화하라고 함. 더 수사적 효과가 있는 쪽을 취하면 됨. 이를테면 너무 안일한 사람에게는 본성에 대한 비관을 통해 좀 정신차리게 해주고, 너무 의기소침한 사람에게는 본성에 대한 낙관을 말해줘서 좀 희망을 불러일으켜줘야 할 수 있겠음. 

 

2) 예론 편

19(예론)-1.
예는 어디에 기원하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이 있다. 욕망하는데 얻지 못하면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추구함에 일정한 기준과 한계가 없으면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다투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궁해진다. 옛 임금들은 그 어지러움을 싫어했기 때문에 예의를 제정해 이들의 분계를 정함으로써,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공급했다. 그리하여 욕망이 결코 물자로 인해 곤경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고 물자가 결코 욕망으로 인해 고갈되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이 두 가지가 서로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예가 생겨난 이유이다.
   그러므로 예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故禮者 養也]. (...) 군자가 이미 그의 욕망을 충족시켰다면 또 그 분별을 좋아할 것이다. 분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귀하고 천한 등급이 있고, 어른과 어린이의 차별이 있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가볍고 무거움이 있어, 모두 알맞게 어울리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19(예론)-5.
(...) 하늘과 땅은 예로써 합치되고 해와 달도 예로써 밝으며, 사철은 예로써 차례를 이루고 별의 운행도 예로써 행해지며, 강물은 예로써 흐르고 만물도 예로써 번창하며, 좋고 나쁜 것도 예로써 조절되고 기쁨과 노여움도 예로써 합당하게 된다. 아랫자리에 있으면 순종을 하고 윗자리에 있으면 밝게 다스려 만물이 변화해도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예를 어기면 곧 망하게 된다.
   예야말로 어찌 지극한 것이 아니겠는가? 융성한 예를 세워서 법도로 삼는다면 천하에 그 누구도 그것에 더하거나 덜지 못한다. 근본과 말단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처음과 끝이 서로 호응하여, 극도로 형식을 갖춰 〈尊卑와 貴賤의〉 구별이 있고 극도로 치밀하여 〈옳고 그른 사리를 분별하는〉 이론이 있다. 천하에 예를 따르는 국가[김학주: 사람]은 다스려지고 예를 따르지 않는 국가는 혼란에 빠질 것이며, 예를 따르는 국가는 안락해지고 따르지 않는 국가는 위태로워질 것이며, 예를 따르는 국가는 보존되고 예를 따르지 않는 국가는 멸망할 것이다. 소인은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19(예론)-6.
(...) 그러므로 먹줄이란 곧음의 표준이고 저울은 공평함의 표준이며 굽은 자와 둥근 자는 모꼴과 동그라미의 표준이듯이, 예란 사람들의 올바른 도의 극점이다. 

19(예론)-14.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이란 시작의 근본이며 소박한 본질이요, 작위란 형식과 무늬가 융성된 것이라 하는 것이다. 본성이 없다면 작위가 가해질 곳이 없고, 작위가 없다면 본성은 스스로 아름다울 수가 없다. 본성과 작위가 합쳐진 다음에라야 성인이라는 이름과 천하를 통일하는 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합쳐 만물이 생겨나고 음과 양이 접해 변화가 일어나며 본성과 작위가 합치면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하는 것이다. 하늘은 만물을 생성하기는 하지만 만물을 분별하지는 못하며, 땅은 능히 사람들을 싣고 있지만 사람들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우주 가운데 만물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는 성인에 의해 비로소 분별지어지는[分] 것이다. 『시경』에 “여러 신령들을 편히 달래 황하와 높은 산의 신까지도 편하게 되었다.”라고 읊은 것은,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 

 

3) 수신, 영욕, 유효 편

2(수신)-2.
(...)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예가 없다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일을 하는 데 예가 없다면 일을 성취시킬 수 없으며, 나라에 예가 없다면 편안하지 못하다. (...) 

2(수신)-10. [예 강조. 학문의 목표는 예를 올바로 체득하는 것.]
예는 몸을 바르게 간직하는 근거가 되고, 스승은 예를 바르게 지키는 근거가 된다. 예가 없다면 무엇을 근거로 몸을 바르게 간직하겠는가? 스승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가 올바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예에 따라 그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예를 따르면 편안히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 말한 대로 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지려[知]가 스승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예를 따라 편안하고 지려가 스승을 따르는 사람은 바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어기는 것은 법도가 없는 것과 같고, 스승을 배반하는 것은 스승이 없는 것과 같다. 스승과 법을 부정하면서 멋대로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 색깔을 분별하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분별하는 것과 같아서, 혼란스럽고 망령된 일만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이란 예를 법도로 삼는 것이다. 스승이란 자신을 올바른 의표로 내세우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편안한 것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시경』에 “알지도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의 법도를 따른다.”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 

 

4(영욕)-10.
사람은 모두 동일한 점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으며,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한다. 이것은 사람이 나면서부터 지니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른 영향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우임금이나 걸왕이 모두 같다.
   눈은 희고 검은 것과 아름답고 추한 것을 가려내고, 귀는 소리와 가락과 맑은 소리 탁한 소리를 가려내고, 입은 시고 짜고 달고 쓴 것을 가려내고, 코는 향기와 비린내 누린내를 가려내고, 육체와 피부는 추위와 더위, 아프고 가려운 것을 분별한다. 이것들도 사람이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다른 영향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며, 우임금이나 걸왕이 모두 같다.
   그러니 누구든 요임금·우임금이 될 수도 있고, 걸왕이나 도척이 될 수도 있으며, 목수나 공인이 될 수도 있고, 농사꾼이나 장사꾼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형세와 마음가짐과 행동과 배움과 버릇이 쌓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 
  요임금이나 우임금은 나면서 모든 것이 갖추어 있던 사람은 아니다. 옛 것을 변화시켜 일어서고 수양과 행동을 통해 완성시켜서 완전하게 된 다음에야 모든 것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래 소인이어서 스승도 없고 법도도 없다면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래 소인인데 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어지러운 버릇을 갖게 된다. 그래서 소인이 더욱 소인이 되고 어지러움에 어지러움을 더하게 된다. 군자가 권세를 가지고 그들에게 군림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마음을 열어 바른 길로 끌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

 

8(유효)-4.
옛 임금들의 도란 어짐[仁]이 융성하여 이룩된 것으로, 올바름[中]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올바름이라 하는가? 예의가 바로 그것이다. 도란 하늘의 도도 아니요, 땅의 도도 아니며, 사람들의 근본이 되는 도이며, 군자가 지켜야 할 도이다. 군자가 이른바 현명하다고[賢]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군자가 이른바 지혜롭다고[知] 하는 것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군자가 이른바 말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을 다 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군자가 이른바 잘 살펴 안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살펴 알 수 있는 것을 다 잘 살펴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근거로 삼는 예의[所正]가 있다는 것이다. (...)

 

2. 수양

  • 쉬지 않고 조금씩 쌓아갈 것,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한결같이 할 것, 예와 스승을 따를 것, 지행일치.
1(권학)-5.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비바람이 일어나고, 물을 모아 못을 이루면 용이 생겨나며, 선함을 쌓아 덕을 이루면 신묘하고 밝은 지혜를 저절로 얻어 성인의 마음이 갖춰진다. 그러므로 반걸음이 쌓이지 않으면 천리길을 갈 수 없고, 작은 흐름이 쌓이지 않으면 강과 바다를 이룰 수 없다. 천리마도 한 번 뛰어 열 걸음을 갈 수 없지만, 둔한 말도 열 배의 시간과 힘을 들여 수레를 끌면 천리마를 따를 수 있다. 공을 이루는 것은 멈추지 않는 데 달려 있다. 칼로 자르다 중단하면 썩은 나무라도 자를 수 없고, 중단하지 않으면 쇠나 돌이라도 자를 수 있다. 지렁이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도 없고 억센 근육과 뼈도 없지만, 위로 진흙을 뚫어 먹고 아래로 지하의 샘물을 빨아먹으니, 이는 한결같이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게는 여덟 개의 발에 두 개의 집게발이 있지만 뱀이나 드렁허리의 굴이 아니면 몸을 붙일 곳이 없으니, 이는 마음을 산만하게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은 뜻이 없는 사람은 밝은 깨우침이 없을 것이며, 묵묵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뛰어난 업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두 갈래 길에서 헤매는 자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동시에 두 군주를 섬기는 자는 양쪽에서 모두 용납받지 못한다. 눈은 동시에 두 물체를 보지 못하므로 분명하게 보고, 귀는 동시에 두 가지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분명하게 듣는다. (...) 그러므로 군자는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故君子結於一也]. 

1(권학)-7.
학문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가? 그 방법에 있어서는 경문을 외우는 데서 시작하여 『예기』를 읽는 데서 끝나며, 그 뜻에 있어서는 선비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 노력을 오랫동안 쌓으면 그런 경지에 들어갈 수 있지만, 학문이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방법에는 끝이 있지만, 그 뜻은 잠시라도 버려둘 수가 없다. 학문을 하면 사람이 되고, 학문을 버리면 짐승이 된다. (...) 

1(권학)-8.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마음에 붙어서 온몸으로 퍼져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의 간단히 하는 말과 작은 움직임이라도 모두 다른 사람이 본받을 기준이 될 수 있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밖에 안 되니, 어찌 일곱 자나 되는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였고,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학문을 한다.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그 자신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이고, 소인이 학문을 하는 것은 남에게 내놓아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묻지도 않았는데 얘기하는 것을 시끄러움이라 하고, 하나를 물었는데 둘을 얘기하는 것을 뽐냄이라 한다. 시끄러움도 그르고 뽑냄도 그른 것이니, 군자는 소리가 울리듯 일에 따라 적절히 행동하는 것이다. 

1(권학)-9.
학문하는 방법으로는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다. (...) 위로는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예를 존중하지 못한다면, 다만 잡된 기록의 책이나 공부하고 『시경』과 『서경』을 따를 뿐일 것이니, 곧 세상이 끝나고 해가 다한다 하더라도 비루한 선비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옛 임금들을 근본으로 삼고 어짐과 의로움을 근본으로 삼으려 한다면, 곧 예가 바로 그 바탕과 지름길이 될 것이며, 다섯 손가락을 굽혀 깃을 들기만 하면 갖옷의 옷깃을 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순조로울 것이다. 예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시경』과 『서경』만을 따른다면, 그것은 마치 손가락으로 강물의 깊이를 헤아리고, 창으로 수수를 방아 찧고, 송곳으로 박 속을 긁어먹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를 존중한다면 비록 명석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법도를 지키는 선비가 될 것이다. 예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비록 사리에 밝고 말을 잘 한다 하더라도 허튼 선비가 될 것이다. 

1(권학)-10.
예는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스승은 예를 바르게 하는 자이다[禮者 所以正身也 師者 所以正禮也]. 예가 없으면 어떻게 몸을 바르게 하고, 스승이 없다면 어떻게 예가 옳은지 알겠는가? 예에 따라 그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이 예를 따르면 편안히 지낼 수 있기 때문이고, 스승이 말한 대로 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지혜가 스승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예를 따라 편안하고 지혜가 스승을 따르는 사람은 바로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어기는 것은 법도가 없는 것과 같고, 스승을 배반하는 것은 스승이 없는 것과 같다. 스승과 예법을 부정하면서 멋대로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 색깔을 분별하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분별하는 것가 같아서, 혼란스럽고 망령된 일만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이란 예를 법도로 삼는 것이다. 스승이란 자신이 모범이 되어 스스로 예법에 편안한 것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시경』에 “알지도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의 법도를 따른다”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 
# 예를 따르는 게 사실 나한테 더 편안하다는 것: 성선설과 통하는 것...?

3(불구)-9.
군자가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정성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정성을 다하면 다른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인만을 지키고, 오직 의만을 행해야 한다. 정성된 마음으로 인을 지키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면 신묘해지고, 그것이 신묘해지면 사람을 교화시킬 수 있다. 정성된 마음으로 의를 행하면 조리가 서고, 조리가 서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모든 것이 분명해지면 사람들을 훌륭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변화와 교화가 연이어 일어나는 것을 하늘의 덕이라고 한다.  

21(해폐)-7.
(...) 모든 일은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를 택해 한결같이 하는 것이다.

21(해폐)-9.
옛날에 문자를 좋아했던 사람은 많았으나 창힐(倉頡)의 명성만 전해오는 것은 그가 글씨에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에 마음을 쓰면서도 한 가지 일을 잘한 사람은 없었다. (...) 

21(해폐)-13.
대체로 사람의 본성을 알면 사물의 이치도 알 수 있다[凡以知人之性也 可以知物之理也; 원문엑셀파일: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안다; 사물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性이고, 사물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이(理) 때문이다]. (...)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성왕을 스승으로 삼고, 성왕의 제도를 법칙으로 삼아 그 법칙을 법도로 받들면서 그 강령을 추구하고 그 사람을 본받기에 힘쓰는 것이다. (...)

(?)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좋고, 보는 것보다 아는 것이 좋으며,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좋다. 실천해야만 분명해지며, 분명해지면 성인이 된다.

 

  • 치기양심
2(수신)-4.
기운을 다스리고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治氣養心之術]이 있다. 혈기가 굳세고 강하면 곧 조화시켜 부드럽게 한다. 혈기가 굳세고 강하면 곧 조화시켜 부드럽게 한다. 지혜와 생각이 너무 깊으면 곧 평이하게 하여 단순하게 한다. 용감하고 사나우면 곧 순하게 인도하여 돕는다. 너무 잽싸고 서두르면 곧 행동을 절제케 해 준다. 마음이 좁고 옹졸하면 곧 넓고 크게 틔워 준다. 비굴하고 느슨하며 이익을 탐하면 높은 뜻으로 드높여 준다. 용렬하고도 아둔하면 곧 스승과 벗으로 그런 성질을 없애 준다. 게으르면서도 경박하면 곧 재앙으로 경고해 분명히 알게 해 준다. 어리석다 할 정도로 정성스럽고 우직하면 곧 예와 악으로 알맞게 해주고, 사색으로 융통성이 있게 해 준다. 
   모든 기를 다스리고 마음을 기르는 방법은 예를 따르는 것보다 더 빠른 길은 없고, 스승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좋아하는 것을 한결같이 하는 것보다 더 신통한 것은 없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을 기를 다스리고 마음을 기르는 방법이라고 한다.

 

  • 교화의  가능성: 인간은 다른 존재와 달리 성인이 될 수 있는 바탕과 자질(질, 구) 내지 지적 능력이 있음.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고려하는 지려(知慮)가 있어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음 / 인간은 다른 존재와 달리 인의를 알 수 있는 도덕적 인식 능력과 그것을 실천할 능력을 가짐)
21(해폐)-13.
대체로 사람의 본성을 알면 사물의 이치도 알 수 있다[凡以知人之性也 可以知物之理也; 지문파일: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안다; 사물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性이고, 사물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이(理) 때문이다]. (...)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성왕을 스승으로 삼고, 성왕의 제도를 법칙으로 삼아 그 법칙을 법도로 받들면서 그 강령을 추구하고 그 사람을 본받기에 힘쓰는 것이다. (...)

23(성악)-11.
“길거리의 사람도 우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말인가? 우임금이 우임금이 된 까닭은 그가 인의와 법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의와 법도는 알 수도 있고 행해질 수도 있는 이치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길거리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인의와 법도를 알 수 있는 자질[質]이 있고, 모두 인의와 법도를 행할 수 있는 능력[具]이 있다. 그러니 그들도 우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인의와 법도를 본디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이치의 것으로 본다면, 비록 우임금이라 하더라도 인의와 법도를 알지 못하고, 인의와 법도를 행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길거리의 사람은 본디부터 인의와 법도를 알 수 있는 자질도 인의와 법도를 행할 능력도 없다고 한다면, 길거리의 사람은 또한 안으로는 아버지와 자식의 도리를 알 수 없고 밖으로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정도[正]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길거리의 사람도 모두 안으로는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도리를 알 수 있고 밖으로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것들을 알 수 있는 자질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길거리의 사람에게도 있음이 분명하다.
   길거리의 사람에게 그 알 수 있는 자질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인의와 법도를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이치를 장악하게 한다면 그들도 우임금처럼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길거리의 사람에게 도를 익히는 학문을 하고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사색하고 깊이 헤아리면서 하루 또 하루 오랫동안 선을 쌓아 중단하지 않도록 한다면 신명함에 통달해 천지와 필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란 사람이 쌓은 것[人之所積; 김학주: 사람의 작위가 쌓여; DB: 사람이 善을 쌓아]으로 도달한 것이다.

 

  • 해폐: 한편만을 보고 다른 한편을 보지 못하는 마음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 허, 일, 정을 통해 대청명에 이름.
21(해폐)-1.
모든 사람의 병폐는 한 모퉁이가 가려져 있어 큰 이치에 어둡다는 데 있다. (...) 그러므로 욕심에 가려지기도 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가려지기도 하며, 일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가려지기도 하고, 일을 끝낸다는 생각에 가려지기도 하며, 멀리 있다는 생각에 가려지기도 하고,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가려지기도 하며, 옛것의 생각에 가려지기도 하고, 현재의 생각에 가려지기도 한다. 모든 만물은 서로 다른 한편만을 생각하면 서로 가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마음을 쓰는 술법의 공공연한 환난이다. 

21(해폐)-4.
옛날 여러 나라를 유세하며 마음이 가려졌던 사람으로는 다음의 어지러운 학파들이 있다. 묵자는 실용에 가려서 겉치장[文]을 몰랐고, 송자(宋子)는 사람이 욕망이 〈적다는 데에만〉 가려져서 사람이 얻기를 〈탐한다는〉 것을 몰랐고, 신자(愼子)는 법에 가려서 현인을 〈임용할 줄〉 몰랐고, 신자(申子)는 권세에 가려서 지혜를 몰랐고, 혜자는 말에 가려서 실속을 몰랐고, 장자는 자연에 가려서 사람을 몰랐다. (...)

21(해폐)-5.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을 쓰는 술법[心術]에서 환난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마음이 가려져 막힘으로써 생기는 화를 본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에 치우치지 않고 싫어하는 것에 치우치지 않으며[無欲無惡], 시작하는 것에 치우지지 않고 끝나는 것에 치우지지 않으며, 가까운 것에 치우지지 않고 먼 것에 치우지지 않으며, 넓은 [지식]에 치우지지 않고 얕은 지식에 치우지지 않으며, 옛것에 치우지지 않고 지금에 치우지지 않으면서 각종 사물을 동시에 나열해놓고 그 속에서 〈일정한 표준에 근거하여〉 저울질한다. 무엇이 사물을 저울질하는 표준인가? 그것은 도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도를 알지 못하면 안 된다. 마음이 도를 알지 못한다면 도를 부정하여 도를 위배하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 어째서 도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올바른 도를 알아야만 올바른 도를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 어째서 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가? 본디 다스림의 요체는 올바른 도에 대해 아는 데 있기 때문이다. 

21(해폐)-6.
사람들은 무엇으로 도를 아는가? 그것은 마음으로 알 수 있다. 마음은 어떻게 도를 아는가? 그것은 마음이 텅 비고 한결같아지고 고요해지는 것[虛壹而靜]으로 알 수 있다.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쌓여 있으나 이른바 텅 빈 상태[虛]가 있다. 마음은 여러가지를 생각하지만 이른바 한결같은 상태[一; DB: 전일한 상태]가 있다. 마음은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이른바 고요한 상태[靜]가 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각[知]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기억[志]이 있게 된다. 기억한다는 것은 쌓이는 것[臧; 저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텅 빈 상태[虛]가 있다. 마음에 이미 쌓여 있는 것들 때문에 새로 받아들이려는 것들이 방해를 받지 않는 것, 그것을 텅 빈 상태라 한다.
   마음은 생겨나면서부터 지각이 있고, 지각이 있으면 서로 다른 것들을 분별하게 된다[知而有異]. 분별하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아울러 알게 하며, 동시에 여러 가지를 아울러 알게 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兩; DB: 이쪽저쪽을 아울러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한결같은 상태가 있다. 저쪽의 하나 때문에 이쪽의 하나가 방해받지 않는 것, 그것을 한결같은 상태[壹]라 한다.
   마음은 잠을 자면 꿈을 꾸고, 멍청히 있을 때는 제멋대로 하며, 그것을 부리면 생각을 하게 된다[謀; DB: 계획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때가 없다. 그런데도 이른바 고요한 상태[靜]가 있다. 몽상이나 번잡한 생각으로 지각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을 고요한 상태라 한다.
   도를 아직 체득하지 못하여 도를 구하는 사람은 마음을 텅 비우고 한결같이 고요하게 추구해야 한다. (...) 도를 알아 그것을 잘 살피고, 도를 알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도를 체득한 사람이다. 마음이 텅 비고 한결같아지고 고요한 것을 크게 맑고 밝다고[大淸明] 한다. 그렇게 되어 만물이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보이는 것들은 조리가 없는 것이 없으며[DB: 논평하지 않는 일이 없으며], 조리가 있는 것들은 자기 자리를 잃는 일이 없게[DB: 논평을 하면 합당하게 하지 않는 적이 없게] 된다. 방 안에 앉아서도 천하를 볼 수 있고,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도 먼 옛일을 논할 수 있으며, 만물을 꿰뚫어 보아 그 진상을 알 수 있고,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일을 참고하고 고증하여 그 법도에 통달하게 된다. 천지의 운행을 다스리되 만물이 기능을 합당하게 잘 발휘하게 하고 큰 도리를 관할하여 우주가 잘 다스려지게 한다.
   그 마음이 넉넉하고 광대하니 누가 그 한계를 알겠는가? 여유롭고 광대하니 누가 그 덕의 위대함을 알겠는가? 변화무쌍하고 복잡 다양하니 누가 그 윤곽을 알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크기는 온 우주에 가득 찬다. 이와 같은 사람을 대인(大人)이라 한다. 이런 사람이 어찌 마음이 가려지는 일이 있겠는가?

21(해폐)-8. (...)
사람의 마음은 마치 쟁반의 물과 같다. 똑바로 놓아두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찌꺼기와 탁한 물은 밑에 있고 맑고 투명한 물은 위에 있게 되니, 수염과 눈썹까지도 비추어 보고 잔주름까지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가벼운 바람이 그 위를 스쳐 찌꺼기와 탁한 물이 밑에서 떠 일어나고 맑고 투명한 물이 위에서 어지러우면, 큰 형체조차도 올바르게 비추어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마음을 도리로 인도하고 맑게 잘 길러서 외물이 그것을 기울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을 가리고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작은 사물에 끌리게 되면 마음의 올바름이 밖으로 바뀌어지고 그의 마음이 안에서 기울어져 여러 가지 이치를 가려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 성위지합: 예를 통해 악한 본성을 교화하여 예와 일체가 된 경지.
(?) 
본성이 없다면 인위를 더할 데가 없고, 인위가 없다면 본성이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없다. 본성과 인위가 합해진 연후 에 성인(聖⼈)이란 이름이 있게 되고, 천하를 하나가 되게 하는 공도 여기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본성과 인위가 합해져 서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이라 한다.

(?)
천지가 합쳐 만물이 생기고, 음양이 접해 변화가 일어나고, 성(性)과 위(僞)가 합쳐져 다스려진다.

 

  • 인식은 감각기관과 징지(徵知,사물을 변별하는 능력, 인지 능력) 두 단계로 이루어짐.
22(정명)-3. (확인해야되나 말아야되나...)

 

3. 예의 기능

  • 예의 기능: 예는 귀천상하의 분별을 확립하며(分), 욕망을 적절히 충족하는(養) 한편 과도한 욕망을 절제하고(節), 적절한 형식과 수식을 갖추는(文) 기능을 함.
(?)
소, 돼지, 벼, 수수, 다섯 가지 조미는 입을 조양(調養)하고, 향기로운 것들은 코를 조양하고, 아름다운 무늬와 채색은 눈을 조양하고, 비금의 아름다운 소리는 귀를 조양하고, 앉을 때 기대는 탁자와 방석은 몸을 조양하는 것처럼 예란 곧 욕구를 기르는 것이다.

(?)
먹고 입고 거하고 움직임에 있어 예를 따르면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 조절(和節)하고, 예를 따르지 않으면 빗나가서 병이 생긴다. 예의란 안으로는 사람들을 조절하고,밖으로는 만물을 조절하는 것이다. 위로는 임금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조절하는 것이다. 안팎과 위아래 모든 것을 조절하는 것이 의로움의 실정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는 예의를 근본으로 삼고, 그 다음은 신의를 본으로 삼는다. 옛날에 우 임금과 탕 임금은 예의를 근본으로 삼고 신의에 힘써서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그러나 걸왕과 주왕은 예의를 버리고 신의를 배반하여 천하를 어지럽혔다. 그러므로 위의 임금은 반드시 예의를 삼가고 신의에 힘써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임금으로서의 근본이다.

(?)
예란 안으로는 사람들을 조절하고, 밖으로는 만물을 조절한다.

 

4. 정치

  • 예치: 예에 따라 다스려야 함
  • 귀천과 상하를 명확히 구분해야 함. (정치에서 정명론: 귀천의 구별과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함을 의미)
  •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덕과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정하고 인재를 등용해야 함. 
  • 예뿐만 아니라 법도 중시 / 부강한 나라를 위한 실용적 가치에 관심

 

1) 왕제편

9(왕제)-1.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생각으로는 어질고 능력 있는 이는 차례를 기다릴 것 없이 등용하고, 변변치 않고 능력 없는 자는 조금도 지체없이 파면시키며, 매우 악한 자는 교육을 기다릴 것 없이 죽이고, 보통 백성들은 상벌제도[政]를 기다릴 것 없이 교화시키면 된다. <귀천의 구분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에는 종묘에는 아버지 자리 아들 자리처럼 분명히 정해야 한다. 비록 임금이나 사대부들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예의에 합당하지 못하면 곧 서민으로 돌리고, 비록 서민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학문을 쌓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예의에 합치된다면 곧 그들을 경상(卿相)이나 사대부로 삼는다.
   (...)그들을 격려할 때는 상을 주고 그들을 징계할 때는 형벌을 가하며, 직업을 안정되게 수행하면 길러 주고 직업을 안정되게 수행하지 못하면 버린다. 다섯 가지 큰 병이 있는 사람들은 임금이 거두어 그들을 부양해 주며, 재능에 따라서 그들을 부리고, 관청에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베풀어 주어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보호해야 한다. 재능과 행동이 시국에 반하는 자는 용서 없이 사형에 처한다. 이런 것을 두고 하늘의 덕이라 하며, 왕자의 정치라 하는 것이다.

9(왕제)-2. [kbc: 선례후법. 법은 예를 보완함. 법가 사상가들과 대조]
소청을 처리하는 대원칙은[聽政; kbc: 올바른 정치의 요체는], 선한 일을 가지고 온 자는 예로써 대접하고, 선하지 못한 일을 가지고 온 자는 형벌로써 대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분별하면, 어진이와 못난이가 섞이지 않게 되고, 옳고 그름이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어진이와 못난이가 섞이지 않는다면 뛰어난 인물들이 모여들 것이며, 옳고 그름이 혼동되지 않는다면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성이 드러나고 온 세상이 그런 정치를 바라게 될 것이며, 명령이 행해지고 금령이 없어져서[禁止; kbc: 금령이 지켜져], 임금으로서의 일이 완성될 것이다. 

9(왕제)-3.
신분이 고르면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고[分均則不偏; 偏: 해석 논란], 세력이 고르면 세상이 통일되지 않을 것이며, 대중이 고르면 부릴 수가 없을 것이다. 대체로 양편이 모두 귀한 사람이면 서로 섬길 수가 없고, 양편이 모두 천하면 서로 부릴 수가 없는데, 이것은 하늘의 섭리이다. 세력과 지위가 같으면서 바라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같으면, 물건이 충분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다투게 된다. 다투면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반드시 궁해질 것이다. 옛 임금들은 그러한 혼란을 싫어했기 때문에 예의 제도로써 이들을 구별해 주어 빈부와 귀천의 등급이 있게 하여 서로 아울러 다스리기 편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천하의 백성들을 기르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서경』에 “고르지 않은 것을 고르게 다스린다”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

9(왕제)-4.
(...)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골라 쓰고 착실하고 공경스런 사람을 등용하여 효도와 우애를 일으키고 고아나 과부 같은 사람들을 거두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원조해 준다. 이렇게 하면 서민들이 정치에 안심할 것이다. 서민들이 정치에 안심한 뒤에야 군자는 그의 자리에 안정될 수 있는 것이다. 전하는 말에 “임금은 배요, 서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 하였는데,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안정되려 한다면 정치를 공평하게 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고, 번영을 바란다면 예를 존중하고 선비들을 공경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공명을 세우기 바란다면 어진 이를 높이고 능력 있는 이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 이것이 임금 된 사람의 큰 원칙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이 합당하면 그 밖의 것은 합당하게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세 가지 원칙이 합당하지 못하면 그 나머지 것이 비록 부분적으로 합당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을 것이다. (...)
#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데 있다.”(김학주 해설 p. 264) = 공맹순 공통

9(왕제)-16.
물과 불은 기운은 있으나 생명이 없고, 풀과 나무는 생명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새와 짐승은 지각은 있으나 의로움이 없다. 사람은 기운, 생명, 지각, 의로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섯 가장 존귀한 것이다.
   힘은 소만 못하고 달리기는 말만 못한데, 소와 말은 어째서 사람에게 부림을 받는가? 그것은 사람들은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 살 수 있으나, 소나 말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분별[分]이 있기 때문이다. 분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의로움[義]이 있기 때문이다. 의로움으로써 사람들을 분별 지으면 화합하고, 화합하면 하나로 뭉치고, 뭉치면 힘이 많아지고, 힘이 많으면 강해지고, 강해지면 만물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집을 짓고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사철의 질서를 따라 만물을 성장케 하여 온 천하를 함께 이롭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분별과 의로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영욕, 예론, 대략편

4(영욕)-12. [군거화일: 여럿이 모여 살면서 하나로 조화된다. 실현하는 요체는 예]
천자처럼 귀해지고 온 세상을 차지할 만큼 부유해지는 것은 사람들의 성정으로서는 다같이 바라는 바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욕심을 따른다면 곧 형세는 그 욕심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고 물건은 충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 임금은 생각 끝에 이를 위해 예의를 제정하고 분별을 마련해, 귀하고 천한 등급이 있게 하고, 어른과 아이의 차별을 두게 하고, 지혜 있는 이와 어리석은 자와 능력 있고 능력 없는 사람의 분별을 마련하셨다.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을 맡아 하게 함으로써 각기 그에게 합당한 일을 갖게 하셨다. 그러한 뒤에야 녹으로 받는 곡식이 많고 적고 두텁고 엷은 균형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곧 여러 사람이 모여 살면서 하나로 조화되는[群居和一] 도이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이 윗자리에 있으면 곧 농군은 힘써 밭을 갈고, 상인은 잘 살펴 재물을 늘리고, 여러 공인들은 기술과 기계를 써서 물건을 만든다. 사대부 이상부터 제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인후함과 지혜와 능력으로써 그들의 관직을 다한다. 이것을 가리켜 지극한 공평함이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온 세상을 녹으로 받아도 스스로 많다고 여기지 않고, 어떤 이는 문지기나 여관 돌보는 사람, 관문지기, 야경꾼이 되어도 스스로 녹이 적다고 여기지 않는다.그래서 “잘라서 가지런히 하고 굽혀 따르게 해, 같지 않으면서도 하나가 된다” 하였는데, 이것을 일컬어 인륜이라 한다. 『시경』에 “작은 홀 큰 홀 쥔 이들 받아들여 세상 나라들을 크게 돌보아 주었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

19(예론)-3. [존군 사상]
예에는 세 가지 근본이 있다. 하늘과 땅은 생명의 근본이고, 선조는 종족의 근본이고, 훌륭한 임금은 다스림의 근본이다. 하늘과 땅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는가? 선조가 없다면 사람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군왕과 스승이 없다면 어떻게 다스려지겠는가? 이 세 가지가 모두 없으면 어찌 인간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는 위로는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는 땅을 섬기며 선조를 높이고 군왕과 스승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세 가지 근본이다. (...)

(?)
인생(人生)은 군거(群居)하지 않을 수 없다. 군거에 분계가 없으면 다투게 되고,다투면 어지러워지고,어지러워지면 궁해진다. 인군(人君)은 분계의 추요를 관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군주를 찬미하는 것은 천하의 근본을 찬미하는 것이고,군주를 안정되게 하는 것은 천하의 근본을 안정되게 하는 것이고,군주를 소중히 하는 것은 천하의 근본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27(대략)-1.
무릇 임금이란 예의를 숭상하고 현명한 사람들을 존중하면 왕자가 되고, 법을 중시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면 패자가 되지만, 이익을 좋아하고 속임수를 많이 쓰면 위태롭게 된다. 

27(대략)-7.
냇물을 건네주는 사람은 물의 깊은 곳에 표지를 세워 사람이 깊은 곳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는 혼란함에 대해 표지를 세워 사람들이 과실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는 바로 그 표지이다. 옛 임금들은 예로써 천하가 혼란해지는 표지를 삼았다. 지금 예를 없애는 자들은 표지를 뽑아 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미혹되어 환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형벌이 많아지고 있는 까닭이다. 

27(대략)-16.
친근한 사람을 친근히 하고, 오랜 친구를 오랜 친구로 대하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공로를 인정해 주고, 수고를 한 사람에게는 수고를 위로해 주는 것[親親故故庸庸勞勞]이 어짐[仁]에서 생겨나는 차등이다. 존귀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고, 현명한 사람을 현명한 사람으로 대접하고, 노인을 노인으로 모시고,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는 것[貴貴尊尊賢賢老老長長]이 의로움[義]의 원리이다.
   이상의 것들을 실천해 그것이 절도에 맞는 것이 예의 질서이다. 어짐은 사랑이기 때문에 서로 친해지고, 의로움은 원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게 되고, 예절은 절도이기 때문에 일이 이룩되는 것이다. (...)

27(대략)-24.
(...) 예란 사람들이 밟고 나가는 길이다. 밟고 나가는 길을 잃으면 반드시 걸려 넘어지고 깊은 곳에 떨어지거나 물에 빠지게 된다. 잘못은 미세한 듯하지만 그로 인한 혼란은 큰 것이 예이다. 예가 국가를 바로잡는 역할은 마치 저울이 가볍고 무거운 것을 다는 것과도 같고, 먹줄로 굽고 곧은 것을 가늠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가 없고, 일은 예가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가 없고, 국가는 예가 아니라면 편안할 수가 없다.

 

  • 가망론: 군주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스스로 망함. 군주의 교체 수긍
  • 승계설: 요순의 선양설을 부인하고 승계설을 주장: 요와 순이 보위를 선양한 것이 아니라 순과 우가 각각 덕을 바탕으로 보위를 승계한 것 
  • 존군의 궁극적인 목적은 위민임. 
  • 정치체제를 왕도, 패도, 망도 세 가지로 구분. 
(?)
천하가 돌아오게 되면 왕자라 하고 천하가 버리면 망자라 한다. 그러므로 걸, 주는 천하가 없었던 것이고 탕, 무는 군주를 죽인 것이 아니다.

(?)
도덕이 완비되어 있고 지혜가 밝아 천하의 일을 처리하면 그것에 동조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어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런데 천하를 물려주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27(대략)-46.
하늘이 백성들을 낳은 것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며,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다. (...)

(?) 
저 패자는 존망계절을 행하며 약한 나라를 지켜주고 포악한 나라를 제재했다. 관중은 밭과 들을 개간하고 창고를 충실하게 했다. 점차로 상을 줌으로써 인민을 선도하고 형벌을 엄격히 함으로써 인민들을 바로잡았다.

(?)
임금이란 천하의 이로운 권세이지만 스스로 안락하게 지내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임금의 자리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사람은 반드시 올바른 도를 지킨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의로움이 행해지면 왕자(王者)가 되고,믿음이 알려지면 패자(顯者)가 되고,권모술수가 행해지면 망자(亡者)가 되는 것이다.

 

5. 천인지분

  • 공자나 맹자와 달리 순자는 하늘을 도덕의 근원이 아닌 자연 현상으로 보고, 하늘과 사람의 일을 구분할 것[天人之分]을 주장. 자연은 인간사와 무관하게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행함. 자연을 존숭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용해야 함(제천론). 
17(천론)-1.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왕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다스림으로 호응하면 길하고, 어지러움으로 호응하면 흉하다. 농사에 힘쓰고 쓰는 것을 절약하면 하늘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잘 보양하고 제때에 움직이면 하늘도 병들게 할 수 없으며, 올바른 도를 닦아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하늘도 재난을 당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장마와 가뭄도 그런 사람을 굶주리게 할 수 없고, 추위와 더위도 그런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없으며, 요괴도 그런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없다.
   농사 같은 근본적인 일은 버려 두고 사치하게 쓰기만 하면 하늘은 그를 부유하게 할 수 없으며, 잘 보양하지 않고 잘 움직이지 않으면 하늘은 그를 온전하게 할 수 없으며, 올바른 도를 어기고 함부로 행동하면 한르은 그를 길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장마와 가뭄이 오기도 전에 굶주리고, 추위와 더위가 닥치지 않아도 병이 나며, 요괴가 나타나기도 전에 불행하게 된다.
   사람이 사계절을 만나 생활하는 점은 태평한 세상과 같은데 재앙을 당하는 것은 태평한 세상과 다르다. 하늘을 원망해서는 안 되니, 그 행하는 방법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의 구분[天人之分]에 밝으면 곧 그를 지극한 사람[至人]이라 말할 수 있다.

17(천론)-2.
작위를 가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추구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 이것을 하늘의 직무라 한다. 이러한 것이 비록 심원하다 하더라도 올바른 사람은 거기에 대해 생각을 더하지 않고, 그것이 비록 위대하다 하더라도 능력을 더 보태려 하지 않으며, 그것이 비록 빈틈없다 하더라도 살펴보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하늘과 직무를 두고 다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하늘에는 변화하는 사계절이 있고, 땅에는 여러 가지 생산물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그 다스림이 있다. 이것을 두고 하늘과 땅의 변화에 참여하는 것이라 한다[能參; DB: 능히 天地와 어울려 셋이 된다고 말한다].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자신의 할 일은 버리고 참여하는 대상만 알기를[DB: 천지와 어울려 셋이 되는 그 위상만] 바란다면 미혹된 일이다[舍其所以參 而願其所參 則惑矣].
   뭇별은 일정하게 돌고, 해와 달은 번갈아가며 비추고, 사계절은 번갈아 바뀌고, 음양은 크게 변화하며 만물을 생성시키고, 비바람은 널리 내리고 불어 생육을 돕는다. 만물은 각각 그러한 조화를 얻어 생겨나고, 각각 그러한 양육을 얻어 성장한다.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드러내 보이지 않고 그 공적만을 드러낸다. 이러한 것을 두고 신묘함이라 한다. 모두가 그렇게 하여 이루어 놓은 것은 알지만, 이루어 놓는 방법은 그 형체가 없어 알 수 없다.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늘[의 공적: DB]이라 하는 것이다. 오직 성인은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17(천론)-11.
하늘을 위대하게 여기고 그것을 사모하는 것과, 물건을 저축하면서 그것을 사용하는[制]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하늘을 따르면서 그것을 기리는 것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을 처리하면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철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기다리는 것과, 철에 호응해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물건을 그대로 두고 그것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과 능력을 다해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물건을 가지려 생각하면서 만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는 것과 물건을 다스려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하는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물건을 생성하는 자연을 사모하는 것과 물건을 만들어 이룩하는 사람의 입장을 지니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으로서의 입장을 버리고 하늘을 생각한다면 곧 만물의 실정을 잃게 될 것이다.

9(왕제)-15.
(...) 하늘과 땅은 삶의 시작이고, 예의는 다스림의 시작이며, 군자는 예의의 시작이다. 예의를 만들고 그것을 통용케 하고 그것이 무겁게 쌓이도록 하여, 그것을 애호하는 것은 군자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군자를 낳았고 군자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니, 군자란 하늘과 땅의 변화에 참여하는 것이며 만물을 아울러 거느리는 것이며 백성들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군자가 없다면 하늘과 땅은 다스려지지 않고, 예의는 법통이 없게 되며, 위로는 임금과 스승이 없고 아래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지극한 혼란이라 한다. (...)
   그러므로 장사 지내는 의식과 제사 지내는 의식, 조정에서 천자와 신하가 모이는 의식과 제후들이 서로 문안하는 의식, 군대의 의식은 근본이 하나이다. 귀하고 천하게 하는 것, 죽이고 살리는 것,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것도 한 가지 원리이다.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고, 형은 형 노릇을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을 하는 것도 한 가지 원리이다. 농군은 농사를 짓고, 선비는 벼슬살이를 하고, 공인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은 장사를 하는 것도 한 가지 원리에 의한 것이다[故喪祭朝聘師旅 一也 貴賤殺生與奪 一也 君君臣臣父父子子兄兄弟弟 一也 農農士士工工商商 一也].

(?)
소인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은 버려두고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을 흠모한다. 군자는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에 힘을 쓰고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은 흠모하지 않기 때문에 날로 발전한다. 소인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은 버려두고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을 흠모하기 때문에 날로 퇴보한다. 

 

임용 기출

(김병찬 기출집, 도교사 serenity 선생님 타이핑 자료 활용)

 

[2022B] 5.

예시 답안(김병찬): (ㄱ)은 예의이다. 대청명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양의 방법은 허, 일, 정이다. 허란 기존의 관념이 새로운 사태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마음을 깨끗이 비우는 방법이고, 일이란 심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집중하여 다른 사물이나 사건들에 관한 생각이 인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정이란 마음을 평정하게 하여 마음의 작용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는 방법이다.

 

[2019A] 9. 갑, 을은 동양 윤리 사상가들이다. ( ) 안에 들어갈 용어를 쓰고, ㉠에 대한 을의 견해를 갑의 입장에서 비판하시오. [4점]

  • 갑: 무릇 예의(禮義)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 )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의 성(性)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옹기장이가 진흙을 쳐서 질그릇을 만드는데, 질그릇은 옹기장이의 ( )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의 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또 목수가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은 목수의 ( )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의 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 을: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큰 나라 성 밖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끼로 자꾸만 베어내니, 어찌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밤마다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시어 주므로 싹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와 양떼가 또 쫓아가서 뜯어먹는 까닭에 저렇게 맨숭맨숭하게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산을 보고 원래부터 산에 나무라고는 없는 것처럼 여기나, 그것이 어찌 우산의 성(性)이겠는가? ㉠ 사람의 성(性)도 이와 같다.

예시 답안(김병찬): ( )는 위(인위적인 노력)이다. / 을은 사람의 성을 사덕을 본질로 하는 선성으로 본다. 갑에 의하면, 이는 성과 위를 구분하지 못해 생겨난 잘못된 입장이다. 성이란 자연히 타고난 바 그대로의 것이기 때문에, 배움과 같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형성된 것은 성이 아니다. 그런데 을이 선성의 본질로 간주하는 사덕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성이라 해서는 안 된다.

 

[2015-A] 4. (가)는 중국 선진 시대 어느 사상가의 주장이다. 이 사상가가 (나)의 편지를 쓴다고 가정할 때, ( ) 안에 들어갈 용어를 쓰시오. [2점]

  • (가)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함이 있으니, 이 일정함은 요(堯) 임금을 존립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걸(桀)왕을 망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하늘의 직무라는 것은 작위[爲]를 가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추구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하늘의 직무가 비록 심원하다 하더라도 올바른 사람은 거기에 대해 생각을 더하지 않고, 그것이 비록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능력을 더 보태려 하지 않으며, 그것이 비록 빈틈이 없다고 하더라도 더 살피지 않는다. 이것을 가리켜 사람은 하늘과 직무를 두고 다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 (나) 그리운 벗에게, / 그동안 잘 있었는가? 선한 것을 분별하는 법도가 있다네. 그것으로써 기운을 다스리고 양생을 한다면 오래 살았다는 팽조보다도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네. 또한 그것으로써 몸을 닦고 스스로 노력하면 요임금이나 우임금처럼 될 수 있으며, 뜻대로 잘될 때도 처신을 잘할 수 있고 곤경에 처했을 때도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네. ( )이/가 바로 그 법도라네. ...(하략)...

예시 답안(김병찬): 예

 

[2012] 14. (갑), (을), (병)에 대한 옳은 설명만을 <보기>에서 있는 대로 고른 것은?

  • (갑) 백성을 정치제도나 법령(政)으로 인도하고 형벌(刑)로써 그들을 질서정연하게 하면 백성들은 형벌을 피하려고만 할 뿐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게 된다. 백성을 도덕(德)으로 인도하고 예의제도(禮)로서 질서정연하게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바르게 될 것이다.
  • (을) 남에게 예(禮)로써 대했는데, 만일 그가 예로써 답하지 않으면 나의 공경함에 부족함이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 어떤 일을 실행함에 있어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을 때에도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그 까닭을 찾아야 한다(反求諸己). 자신의 몸이 먼저 바르고 나서야 천하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 (병) 예는 무엇으로부터 기원한 것일까? 사람은 선천적으로 욕망을 지니고 태어나며, 욕망이 있는데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계속 추구하게 된다.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 일정한 한도와 경계선이 없으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다툼이 발생하게 되면 무질서한 상태가 되며, 이런 혼란은 사람들을 곤궁한 상태로 만든다. 과거의 제왕들은 이와 같은 무질서한 상태가 싫었으므로 예의(禮義)를 제정하였다.

<보 기> 

ㄱ. (갑)은 학문이란 다른 사람을 위한 것(爲人之學)임을 강조하며, 사회에 유용한 한 가지 전문 기술이나 기능(器)을 갖춘 군자를 양성하고자 한다.

ㄴ. (을)은 인(仁)의 실질적 바탕이 친친(親親)과 경장(敬長)이라고 보고,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해 나간다.

ㄷ. (병)은 일상적인 예를 실행하는 근본적인 목표로서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통일(群居和一)’을 지향한다.

ㄹ. (을), (병)은 모두 정명(正名) 사상에 입각하여 사회관계에 내재해 있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강조한다.

ㅁ. (을)은 외왕(外王)의 측면을, (병)은 내성(內聖)의 측면을 발전시켰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ㄹ    ④ ㄴ, ㄹ, ㅁ    ⑤ ㄷ, ㄹ, ㅁ  

정답(김병찬):

 

[2006] 11. 맹자와 순자가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 목적을 선진 유학의 이론 체계 속에서 설명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도덕 규범의 기원을 비교하여 서술하시오. [4점]

  •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마음을 보존하고 확충하여 본래의 인간성을 실현시킨다(存心養性). - 맹자 -
  •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옛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끊임없이 갈고 닦아 본성을 변화시켜 선하게 만든다(化性起僞). - 순자 - 

예시 답안(김병찬):  선진 유학 사상가들은 사회 혼란의 근원을 도덕성의 타락으로 보고, 그러한 타락의 원인을 해명하고, 원인을 제거해 줄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인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선진 유학의 사상적 맥락 속에서 맹자와 순자는 도덕성의 함양을 통해 사회 혼란의 극복이라는 공통의 목적 하에 인성론을 전개하였다. / 맹자는 사덕을 본질로 하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덕규범의 기원으로 간주하였다. 반면에 순자는 인간의 악성을 교화하여 평화로운 사회를 확립하고자 예의법도를 제정한 성인의 위를 도덕규범의 근원으로 보았다.

 

[2005] 13. 다음 글을 읽고, 순자 (荀子)의 인성 교육 방안을 사회 질서 회복과 관련하여 서술하시오. [3점]

  • 사람에게 예(禮)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도모하는 일에 예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으며, 국가에 예가 없으면 사회의 안정을 이룰 수 없다.
  • 덕을 헤아려 지위의 순서를 정하고, 능력을 헤아려 관직을 맡겨야 한다.

예시 답안(김병찬): 순자는 사회 혼란은 인간의 악한 본성이 그대로 방치됨으로써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악한 인성의 교화를 사회 질서 회복을 위한 관건으로 간주하였다. 그에 의하면, 악한 인성의 교화는 성인이 제정한 예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순자는 예를 배워 통달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예와 일체가 되는 것을 인성 교육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예를 자세히 배워 통달하는 학과 배워 알게 된 것을 실천함으로써 예를 체득하는 수신을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인성 교육의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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