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 서브노트/동양윤리

동양윤리 (5) 왕수인

neon_eidos 2024. 4. 6. 08:06

교과서5종(천재, 비상, 미래엔, 교학사, 씨마스)▶현자의돌 선생님, Hamartia 선생님 제시문모음▶ 『2024 김병찬 교수의 서양.동양.한국윤리: 중등임용 시험대비』

 

1. 심즉리

  • 마음이 곧 이치다[심즉리]. 마음 밖에는 이치가 없고 마음 밖에는 어떤 사물도 없다[심외무리, 심외무물].

   욕심에 가리지 않은 본래의 마음이 바로 리. 인간 본심에 있는 도덕적 마음을 떠나 도덕적 이치가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천재)

   사물에 대한 이치를 규명하고 도덕 법칙을 탐구하면서 이(理)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체의 도덕성을 회복해야만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주장 (씨마스)

   모든 이치가 마음에 있음. 효도나 충성의 이치가 그 대상인 부모나 임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주체의 마음에 있음.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이치가 있고, 그렇지 않다면 효도나 충성의 이치도 없다는 것이다. (비상)

  왕수인은 심즉리 사상에 입각하여 사람의 본 마음이 천지만물의 마음이라는 심즉천(心卽天)을 주장한다. 즉, 사람의 본 마음이 곧 우주의 본체인 천(天)이고, 그래서 천지 만물의 이치가 모두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왕수인에게 있어서 천은 곧 본마음이므로, 본마음은 무궁무진한 창생력을 지닌 생명의 근원이다. 심체는 천리이고, 내 마음의 이가 곧 천지 만물의 이치이기 때문에, 내 마음의 이를 파악하기만 하면 천지만물의 이치를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왕수인은 인간의 마음은 천지 만물을 포괄하고 있다고 말하고, 나아가 ‘신령스러운 밝은 마음이 곧 천지 만물의 주재자’라고 주장한다. (김병찬)

 

  • 주자 비판: 사물에 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본 주희와 대조 (천재) / 주희가 제시하는 격물치지의 주장이 사물의 이치와 나의 마음을 둘로 분리하는 것이라고 비판 (씨마스) / 주자학의 문제는 마음[심]과 이치[리]를 둘로 나누는 데 있음.
마음이 곧 이치이다. 어찌 마음 밖에 본성이 있겠으며 본성 밖에 이치가 있겠는가? 또 어찌 이치 밖에 마음이 있겠는가? 마음 밖에서 이치와 본성을 구하면 이는 ‘옳음[義]이 밖에 존재한다.’는 고자(告子)의 이론이다. (?)

마음이 곧 이[理]다. 천하에 마음 밖의 일이나 마음 밖의 이가 있겠는가? (?) (from 김병찬)

마음은 이(理)이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측은해 하는 이치가 생기는데, 이치는 어린아이의 몸에 있지 않고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측은해 하는 마음으로 말하면 인(仁)이라 하고, 상황에 맞는 이치로 말하면 이라고 한다. (?)

마음은 곧 이치이다. 측은히 여기는 것으로 말하면 인(仁)이라 하고, 마땅함을 얻은 것으로 말하면 의(義)라 하며, 상황에 맞는 것[條理]으로 말하면 이(理)라 한다. (?)

마음의 본체는 성(性)이고, 성은 곧 이(理)이다. 그러므로 효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효도의 이치가 있고, 효도하는 마음이 없으면 효도의 이치가 없다. 이치는 마음에서 구할 뿐이다. (?)

부모를 섬기는 경우 부모에게서 효도의 이치를 구할 수 없고, 임금을 섬기는 경우 임금에게서 충성의 이치를 구할 수 없으며, 벗과 사귀고 백성을 다스리는 경우도 벗과 백성에게서 믿음과 어짊의 이치를 구할 수 없다. 모두가 다만 이 마음에 있을 뿐이니, 마음이 곧 이(理)이다. 이 마음이 사욕(私欲)에 가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천리(天理)이니, 밖에서 조금이라도 보탤 필요가 없다. 이 순수한 천리의 마음을 부모를 섬기는 데 드러낸 것이 바로 효도이고, 임금을 섬기는 데 드러낸 것이 바로 충성이며, 벗과 사귀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드러낸 것이 바로 믿음과 어짊이다. 다만 이 마음에서 인욕(人欲)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데 힘쓰기만 하면 된다. (『전습록』) (?)

이(理)란 마음의 조리(條理)이다, 이 마음이 어버이에게 드러난 것이 효(孝)이고 임금에게 드러난 것이 충(忠)이고 벗에게 드러난 것이 믿음(信)이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모든 것들도 나의 한 마음[一心]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단정하고 위엄 있고 평온하고 전일하게 하는 것’을 ‘마음을 기르는 공부’라 하고, ‘배우고 묻고 사유하고 변별하는 것’을 이(理)를 궁구하는 공부‘라고 한다면, 이는 마음과 이를 둘로 나누는 태도이다.  (『전습록』) (?) 

몸을 주재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心]이고 마음이 드러난 것이 바로 의(意)이며 의의 본체가 바로 지(知)이고 의가 있는 곳이 곧 물(物)이다. 만약 의가 부모를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를 섬기는 것이 하나의 물이다. …… 그래서 나는 마음 밖에는 이(理)가 없고 마음 밖에는 사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 마음의 본체가 성이며 성은 곧 이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곧 효의 이치가 있고 효도하는 마음이 없으면 곧 효의 이치가 없다. …… 그러니 이치가 어찌 내 마음을 벗어나서 있다고 하겠는가? (『전습록』) (?)

자네의 뜻은 본래 하늘과 사람을 하나로 합일시키려는 것이었지만 도리어 그것을 둘로 나누고 말았네. 사람은 천지만물의 마음이고, 마음은 천지만물의 주재자이므로 마음이 곧 하늘이며, 마음을 말하면 천지 만물이 모두 포괄된다네. (?)

천지 사이의 이치[理]는 사물이 생길 때 성(性)이 되는데, 인의예지가 바로 그것이다. 인(仁)으로써 사랑하고 의(義)로써 미워하고 예(禮)로써 사양하고 지(智)로써 아는 것은 마음[心]이고, 성은 마음의 이치이다. (?)

제자가 꽃나무를 가리키면서 스승에게 물었다. “마음 밖의 사물이란 없다고 하셨는데, 만일 이런 꽃나무가 깊은 산 속에서 저 혼자 피었다가 진다면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그대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이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곳으로 돌아갔다. 그대가 이 꽃나무를 보았을 때는 그 모습이 일시에 분명해졌다. 그러니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밖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습록』) (?) 

마음의 본체(心體)는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원래 하나의 하늘이다. 다만 사욕에 가려졌기 때문에 하늘의 본체를 잃은 것이다. 마음의 이(理)는 끝이 없어 원래 하나의 연못이다. 다만 사욕에 의해 메워졌기 때문에 연못의 본체를 잃은 것이다. (?) (from 김병찬)

내가 심즉리설을 정립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마음과 이(理)를 나누어 둘로 여김으로써 허다한 병폐가 생겼기 때문이다. (?) (from 김병찬)

마음은 이(理)다. 이(理)는 끝이 없으며 우주에 질서 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두루 퍼져 있다. 이가 있으므로 천지 만물 간에 차례가 있고, 사람은 스스로 인륜을 갖는다. 이는 내 마음 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마음이 곧 이다[心卽理]. 때문에 나의 본심을 밝히면 천지 만물의 이 역시 환하게 빛난다. 이른바 우주 간 일체 현상을 관통하는 이는 내 마음이 활동하는 양식 밖의 것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면 우주 일체의 이를 알 수 있다. (?) (from 김병찬)

 

  • (김병찬) 심체설: (1) 심체는 천리이다. (2) 심체는 지선(至善)이다. (vs. 의념(意念)은 선도 있고 악도 있으며, 수양의 대상임) (3) 심체는 성(誠), 즉 우주의 보편적 덕성임. (사성(思誠): 사심물욕을 제거하여 심체를 회복하는 공부) (4) 넷째, 심체는 즐거움[樂]이다. (5) 심체는 정(定)이다. (6) 심체는 성(性)이다.
마음은 몸의 주재다. 주재가 바르게 되면 눈으로 드러나기로는 저절로 예(禮)가 아닌 것을 보는 일이 없게 되고 귀로 드러나기로는 저절로 예가 아닌 것을 듣는 일이 없게 되며 입과 사지로 드러나기로는 저절로 예가 아닌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몸을 닦는 것(修身)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正心) 있다.”라는 말의 의미다. 그러나 지선(至善)은 마음의 본체이다. 마음의 본체에 어디 선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지금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하나 본체에서야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반드시 마음이 일어난 곳을 대상으로 삼아야만 힘을 쏟을 곳이 생긴다. 마음이 일어났을 때 불선한 것이 없을 수 없으므로 이것을 대상으로 삼아 거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의(誠意)이다. (?) (from 김병찬)

성(誠) 개념을 공부의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성은 마음의 본체이고, 그 본체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사성(思誠) 공부이다. (?) (from 김병찬)

즐거움이 마음의 본체이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천지 만물과 일체여서 기쁘고 화창하니 원래 간격이 없다. ‘늘 때에 맞게 익히는’ 것은 이 마음의 본체를 회복하기 위해서이고 ‘기쁘다’는 것은 본체가 점차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벗이 찾아온다’는 것은 본체의 기쁘고 화창한 기상이 천지 만물에 두루 미쳐서 간극이 없다는 것이다. 본체의 기쁘고 화창한 기상은 본래 이와 같아서 애초에 더할 것이 없다. (?) (from 김병찬)

정(定)은 마음의 본체이고 천리(天理)이다. 동정(動靜)은 마음이 처해 있는 각각의 상황이다. 마음의 본체는 본디 동과 정의 구분이 없다. 이(理)는 동정이 없는 것이니 움직이게 되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이를 따라 행할 수 있으면 수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더라도 움직였다고 할 수 없다. (?) (from 김병찬)

성(性)은 심체(心體)이고 하늘은 성의 근원이니, 마음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성을 다하는 것이다.

“회암 선생이 ‘사람이 공부의 내용으로 삼는 것은 마음과 이(理)일 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이 어떻습니까?”라고 여줘 보니, 선생께서는 “마음이 곧 성(性)이고 성이 곧 이(理)이니, ‘〜과’라는 글자를 그 사이에 넣으면 둘이 나누어지게 된다. 이 점은 학자들이 잘 살펴야 할 문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from 김병찬)

 

  • (김병찬) 사덕과 사단은 하나의 심체의 표덕(表德) : 주자학에서 성의 본체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이고, 사단(四端)은 사덕이 발하여 나타나는 정(情)이다. 따라서 사덕은 미발(未發)이고 사단은 이발(己發)이다. 왕수인은 이러한 입장에 반대한다. 사단과 사덕은 모두 미발의 성에서 발한 것이 아니라 인륜 관계에서 심체(心體)가 현현한 것임. 즉, 사덕과 사단은 모두 다양한 인륜 관계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성의 다양한 표현.
내가 “인의예지라는 이름은 ‘이미 드러난(己發)’ 마음에 대해 붙인 것입니까?” 라고 물으니 선생께서는 “그렇다.”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날 내가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은 성(性)의 표덕(表德)입니까?”라고 물으니 선생께서는 “인의예지도 모두 표덕(表德)이다. 성은 하나일 뿐이다. 그 형체를 말할 때는 하늘이라고 하고, 주재라는 점에서 말할 때는 제(帝)라 하고, 유행이라는 점에서 말할 때는 명(命)이라 하고, 사람에게 품부되었다는 점에서 말할 때는 성(性)이라고 하고, 한 몸의 주재라는 점에서는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이 일어나 부모를 만났을 때는 효라고 하고, 임금을 만났을 때는 충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무궁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의 성일 뿐이다. 마치 사람은 하나 여서, 부모에 대해서는 자식이라 하고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라 하지만 이로부터 무궁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단지 한 사람일 뿐인 것과 같다.”라고 하셨다. (?) (from 김병찬)

 

  • 선악은 마음에.
[사구종지] 
無善無惡心之體
有善有惡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마음의 본체는 본래 선과 악이 없는 것이지만,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意]의 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나타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 양지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이다. (『전습록』 하, 「황성증록」, 315조목; 김병환 교수의 신유학 강의, p. 369)

천지의 생명 의지는 꽃이나 풀이나 한가지이다. 어찌 선악의 구분이 있는가. 그대가 꽃을 감상하려고 하기 때문에 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풀을 나쁜 것으로 여긴다. 만약 풀을 쓰려고 한다면 다시 풀을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한 선악은 모두 내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다. (『전습록』) (?) 

 

2. 양지

  • 양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서, 시비와 선악을 즉각적으로 가려내고 이에 따라 행할 수 있는 능력.
  • 내 마음의 양지가 이른바 천리이다.”라고 주장.
  • 이론적인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양지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치양지]을 중시.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통해서는 도덕 법칙을 깨달을 수 없음. 누구나 본래부터 갖춘 양지로써 시비와 선악을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면 도덕적 실천을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처럼 도덕적 이치를 굳이 학문적으로 깊이 탐구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으로 자연히 알 수 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면 자연히 측은함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양지이며, 쓸데없이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 도덕 판단이 흐려지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이치로서의 양지가 인간의 욕망으로 어두워졌기 때문
앎은 마음의 본체이다. 마음은 자연히 알 수 있다. 아버지를 보면 자연히 효도할 줄 알게 되고, 형을 보면 자연히 공경할 줄 알게 되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자연히 측은해 할 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양지이니, 쓸데없이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전습록』) (?) 

= 안다는 것은 곧 마음의 근원이고, 마음은 저절로 알 수가 있다. 부모를 보면 저절로 효도하게 되고 윗사람을 보면 저절로 공경하게 되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저절로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양지(良知)’며, 이는 마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만약 이 양지가 드러나면 그 어떤 사사로운 욕망에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맹자』에서 말한 ‘측은한 마음으로 가득하면 그 인자함은 다 쓸 수 없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은 사리사욕에 미혹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깨닫도록 사물의 이치를 따져 밝혀줌으로써 사욕을 이기고 천리를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의 양지가 미혹되지 않고 가득 차서 흐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양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가 실현되면 반드시 그 뜻이 성실해진다. (知是心之本體。心自然會知。見父自然知孝,見兄自然知弟,見孺子入井,自然知惻隱。此便是良知。不假外求。若良知之發,更無私意障礙。即所謂『充其惻隱之心。而仁不可勝用矣』。然在常人不能無私意障礙。所以須用致知格物之功,勝私復理。即心之良知更無障礙,得以充塞流行。便是致其知。知致則意誠。) (전습록, 서애인언, 9)

( 양지 )은/는 다만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며, 옳고 그름은 다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으며, 옳고 그름은 온갖 일과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 (?)

사람의 마음은 몸을 주재하며, 양지는 텅 비고 영험한 마음으로 밝게 지각하는 것이다. (?)

인간은 모두 양지(良知)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맹자가 말한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양지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性]이고, 내 마음의 본체로서 자연히 대상을 환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것으로, 그 본체는 성(性)이고 천리(天理)이며 참된 앎[良知]이다. 마음의 본체는 천하의 이치를 포괄하고 있으면서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함이 없다.

사람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양지(良知)라고 한다. 어떤 생각이 일어남이 곧 행동이다. 생각이 일어난 곳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생각을 없애야 한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양지(良知)는 마음의 본체이다. 마음의 본체는 일어남도 없고 일어나지 않음도 없다. 망념(妄念)이 발생했을 때라도 양지는 그 속에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보존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가끔 놓치기도 하는 것일 뿐이다. 어둠과 막힘의 극단적인 단계에서도 양지는 밝지 않은 적이 없다. 단지 사람이 살필 줄 몰라서 가끔 가려지기도 할 뿐이다. (?) (from 김병찬)

양지(良知)란 이른바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으며 배우지 않고도 가지고 헤아리지 않고도 얻는 것이다. (?) (from 김병찬)

양지란 맹자가 “시비지심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비지심이란 사려를 기다리지 않고도 아는 능력이며, 배움을 기다리지 않고도 잘 행하는 능력이니, 이런 까닭에 양지라 말한다. (?) (from 김병찬)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知)이며 사람이 모두 가지고 있다. 그대는 앎이 없음을 걱정하 지 말로 오직 알려고 하지 않음을 걱정하라. … (중략) … 지금 길 가는 사람을 잡고 인의(仁義)에 해당하는 일들을 말하면 저들은 모두 그것이 선하다고 여길 것이고, 불인(不仁)•불의(不義)에 해당하는 일들을 말하면 저들은 그것을 불선하다고 여길 것이다. (?) (from 김병찬)

양지는 천리의 환하고 밝으며 영묘하게 알아차리는 힘이다. 그러므로 양지가 곧 천리이다. 생각은 양지의 발용이다. 만일 양지에서 발용된 생각이라면 그 내용이 천리가 아닌 것이 없다. 양지에서 발용된 생각은 자연히 명백하고 간이할 것이므로 양지는 당연히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사의(私意)로 안배해서 생긴 생각이라면 자연히 어수선하고 혼란스럽겠지만 양지는 그것도 자연스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생각의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은 양지가 자연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 (from 김병찬)

그대의 이 양지가 그대 자신의 준칙이다. 그대가 염두에 두는 어떤 것에 대해, 양지는 그것이 옳다면 옳다는 것을 알고 그르면 그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조금도 양지를 속일 수 없다. (?) (from 김병찬)

양지는 시비지심일 뿐이고, 시비는 호오(好惡)일 뿐이다. 호오가 시비를 전부 아우르고 시비가 온갖 변화되는 상황을 아우른다. (?) (from 김병찬)

 

  • (김병찬) 양지가 온전히 실현된 마음이 곧 도심(道心)이다. 즉, 마음에 사심물욕이 없는 것이 도심이고, 마음에 사심물욕이 섞여 있는 것이 인심이다. [심체=천리=성=리=도심=양지]
마음의 본체가 곧 천리(天理)이다. 마음의 본체는 곧 성(性)이요 성은 곧 이(理)이다. 사서 오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 심체(心體)에 불과하니, 이 심체가 곧 이른바 도심(道心)이다. 도 심이란 양지(良知)를 말하는 것이다. 양지는 마음의 본체이다. 내 마음의 양지가 곧 이른바 천리다. (?) (from 김병찬)

공부는 반드시 마음의 본체에 대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모든 알 수가 없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돌이켜 자기 마음에 합당하도록 체찰하면 곧 통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서나 오경도 다만 이 마음의 본체에 대하여 해설한 데 불과한 것이다. 이 마음의 본체가 곧 이른바 도심(道心)인 것이다. 본체가 밝으면 곧 도(道)도 밝아지는 것이다. 도와 마음은 다른 게 아니다. 이것이 학문을 하는 요점인 것이다. (?) (from 김병찬)

『서경』의 도심과 인심에 관해서 여쯤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에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한다.’ 하였으니 바로 그것이 도심인 것이다. 그러나 약간이라도 개인의 뜻이 존재하기만 하면 곧 그것이 인심이다. 도심이란 본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이어서 ‘미묘하다’고 하는 것이다. 인심을 따라서 행동한다면 곧 여러 가지 타당치 않은 일이 생기게 될 것이므로 ‘위태롭다’고 하는 것이다. (?) (from 김병찬)

 

  • (김병찬) 주희의 인심도심설 비판: 도심이 주인이 되고 인심은 그 명령을 따른다는 주장은 하나의 마음을 둘로 나누는 것.
정자가 말하기를 “인심은 곧 사람들의 욕심이며, 도심은 곧 천리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마음을 둘로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그 뜻은 사실상 올바른 것이다. 지금 “도심은 주인이 되고 인심은 그 명령을 따른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두 가지 마음이 된다. ‘천리’와 ‘사람의 욕망’은 아울러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천리’가 주인이 되고 ‘사람의 욕심’이 또 따라서 그 명령을 듣게 되겠는가? (?) (from 김병찬)

 

  • (김병찬) 양지는 성(聖)이다. 즉, 양지는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다.
선(善)은 곧 양지다. 양지라고 말하면 더욱 알기 쉽다. 그래서 근래 나는 마음의 양지를 성(聖)이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 (from 김병찬)

사람들 가슴 속에는 각각 하나의 성인(聖人)이 있다. 다만 스스로 믿지 못해서 모두 스스 로 묻어버린 것이다. … (중략) … 사람에게 있는 양지는 그가 어떤 짓을 하든 없앨 수 없다. 비록 도적이라 할지라도 도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남이 도적이라고 부르면 그 역시 부끄러워한다. (?) (from 김병찬)

마음의 양지를 성(聖)이라 한다. 성인의 학문은 오직 이 양지를 완전히 실현 시키는 것일 뿐이다. 양지를 자연스럽게 실현시키는 이는 성인이다. 양지를 힘써서 실현시 키는 이는 현인(賢人)이다. 스스로 가려지고 어두워져서 양지를 실현시키지 못하는 이는 우매하고 불초한 사람이다. 우매하고 불초한 사람들은 그 가려지고 어두워진 것이 극도에 이르긴 하지만 그 양지는 여전히 존재해 있지 않은 적이 없다. 진실로 그것을 실현시킬 수만 있으면 성인과 다르지 않다. (?) (from 김병찬)

 

  • (김병찬) 양지는 천지만물의 생멸 변화를 이끄는 원리인 천리(天理)이다.
양지는 조화의 정령(精靈)이다. 이 정령이 하늘을 낳고 땅을 낳으며 귀신을 이루고 상제를 이루니 모든 것이 이로부터 나온다. 진실로 이것은 사물과 더불어 상대적인 게 아니다. 사람이 만약 그것을 완전하게 회복하여 조금이라도 흠이 없다면, 저절로 손과 발이 춤을 출 것이니, 천지 사이에 어떤 즐거움이 이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 (from 김병찬)

사람의 양지란 바로 풀과 나무와 기와나 돌의 양지와 같은 것이다. 만약 풀과 나무나 기와와 돌에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풀과 나무나 기와나 돌로써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찌 다만 풀과 나무와 기와와 돌만이 그러하겠는가? 하늘과 땅에도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역시 하늘과 땅으로써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천지만물과 사람은 원래가 일체이다. (?) (from 김병찬)

 

3. 공부: 치양지, 사상마련, 지행합일

  • 치양지: 양지의 실현(실천). (양지의 실현, 내 마음의 양지를 지극하게 하는 것(김병환)) 
  • 사람의 심체는 천리이고 양지이다. 따라서 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밝히기만 하면, 모든 인간은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육체를 가진 인간은 사심물욕에 끌려 다닐 때가 많다. 사심물욕에 의해 양지가 가려지면 인간은 악하게 된다. 사심물욕을 제거하면 잃어버린 심체를 회복할 수 있다. 사심물욕을 제거하여 잃어버린 심체를 회복하는 것이 치양지다. (김병찬)
  • 『대학』의 ‘치지’에서 ‘지(知)’를 ‘양지(良知)’로, ‘치(致)’를 ‘지극함에 이르다’로 해석하여, 치양지를 ‘양지를 지극히 하여 결여됨과 가려짐이 없게 만드는 것’ 혹은 ‘나의 양지에 사욕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여 지극함에 이르는 것’으로 정의함. (김병찬)
  • 왕수인은 또한 ‘치(致)’를 ‘힘써 실행한다(力行)’로 해석하기도 한다. 양지에 따라 힘써 실행하는 것이 치양지. (김병찬)
  • 사람 가운데에는 양지가 밝게 빛나는 사람이 있고, 욕심에 가려 양지가 잘 발휘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면 누구나 양지가 밝게 빛나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천재)
  • 실제에서 벗어난 공부와 수양이 아니라 현실 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일을 하며 마음의 사욕을 제거하고 양지를 실천하는 공부[사상마련(事上磨鍊)]를 중시 
웃고 쥘 수 있는 정도의 아이라도 그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고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단지 이 영묘한 능력[靈能: 양지]이 사욕에 가리지 않고 완전하게 확충될 수만 있다면 온전하게 그 본체가 된다. (?) (from 김병찬)

치(致)란 ‘지극한 데 이름’이니, 예컨대 ‘상례에 슬픔을 다한다’라고 할 때의 ‘치’와 같다. 『역경』에서 “지극함을 알아 그것에 이른다.”라고 말할 때의 ‘지지(至知)’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치지(致知)’를 운운하는 것은 후세의 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식을 넓힌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양지(良知)를 실현하는 것일 따름이다. (?) (from 김병찬)

양지가 생길 때 사의(私意)에 의해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 것이 이른 바 ‘측은지심을 확충하여 인(仁)을 이루 다 쓸 수 없게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사의에 의해 생긴 장애를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치지격물 공부를 해야 한다. 사의를 이겨내고 천리를 회복하게 되면 마음의 양지는 더 이상 장애가 없기에 우주에 가득 차서 유행할 수 있다. 이것이 ‘그 지(知)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지가 온전히 이루어 지면 의(意)가 참되게 된다. (?) (from 김병찬)

누군들 양지가 없겠는가? 다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주역』에서 “지극한 곳을 알아서 그곳에 이른다.”고 했는데, 여기서 '지극한 곳을 아는 것’은 지(知)이고 ‘그것에 이르는 것’은 치지(致知)이다. 이것이 지행이 합일되는 까닭이다. (?) (from 김병찬)

자네의 이 한 점 양지는 자네 자신의 준칙이네. 양지는 자네가 마음에 둔 것에 대해 옳으면 옳다고 알아차리고 그르면 그르다고 알아차리므로 자네는 절대로 이 양지를 속일 수 없네. 그러므로 자네는 양지를 속이지 말고 정말 절실하게 그것에 의지해서 실행해야 할 것이네. (?) (from 김병찬)

그것이 선인 것을 알 때는 그것이 선인 것을 아는 지(知)를 확충하여 그것을 실행하는 지(知)가 지극해진다.
… (중략) … 지는 물과 같다. 사람의 마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막힌 것을 터서 흘러가게 하면 아래로 흐르지 않는 것이 없다. 터서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치지(致知)의 역할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 지행합일이다. (?) (from 김병찬)

추울 때 따뜻하게 해 드리고 더울 때 시원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 이부자리를 바로 해 드리고 아침에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온청정성(溫淸定省)의 의절(儀節)을 대충 알고서 마침내 그 지식에 다한 것이라고 한다면, 임금이 마땅히 어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두 인(仁)의 지(知)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신하가 마땅히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충(忠)의 지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천하에 누가 지를 다하지 않은 사람 이 있겠는가? 이를 근거로 말하면, 치지(致知)의 관건은 반드시 행에 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으면 ‘지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행이 합일된 본체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가? (?) (from 김병찬)

 

  • 앎과 행함은 본래 하나임[지행합일]. 서로 분리될 수 없음 (김병찬: 기본적으로 지와 행을 분리한 후 그것의 동시 수행을 주장한 주희의 지행호발 혹은 지행병진과는 다름). 
  • 주희의 선지후행(앎과 실천이 서로 병행되어야 하지만, 앎과 실천의 선후를 따질 때는 지적인 탐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비판 
  • 생각부터 행동의 시작으로 여김: 왕수인은 지와 행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선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도 아직 행하지는 않았다고 여겨 그 생각을 억누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행합일설에 따르면, 선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나쁜 행동의 시작이므로 그러한 생각조차 그쳐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선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그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천해야 한다. (천재)
  • (김병찬) 지의 진절독실(眞切篤實)한 면이 행이고 행의 명각정찰(明覺精察)한 면이 지이다. 행은 ‘실제로 어떤 일을 충실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학문 사변의 지적 활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요즘 사람들은 지와 행을 따로따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와 행은 한가지이다. 이를 둘로 나누어 따로따로 간주하는 것은 사욕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사욕을 버려야 지와 행이 하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알면서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모르는 것이다. 효도와 공경도 실행에 옮길 때 비로소 효제(孝悌)를 안다고 할 수 있다. (?)

알면서(知) 행(行)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다. 안다고 말하면 이미 그 안에 행이 있는 것이며, 행한다고 말하면 이미 그 안에 앎이 있는 것이다. (未有知而不行者。知而不行,只是未和聖賢教人知行,正是要復那本體 (중략) 只說一個知,已自有行在。只說一個行,已自有知在) (『전습록』, 서애인언, 6)

오늘날 사람들은 선(善)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아직 실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금지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 지행합일 )을/를 강조하여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실행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 조금이라도 선하지 않음이 있다면 그 선하지 않은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내 사상의 주된 가르침이다. (?)

지(知)는 행(行)의 시작이고, 행은 지의 완성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지만 말해도 이미 행이 거기에 들어있고, 행만 말해도 이미 거기에 지가 담겨 있다. … (중략) … 성인의 학문은 하나의 공부일 뿐이니 지와 행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없다. (?)

앎은 행함의 시작이고 행함은 앎의 완성이다. 예컨대, 사람은 반드시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긴 뒤에라야 음식을 먹을 줄 안다.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의(意)이며 곧 행위의 시작이다. 또 음식 맛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반드시 입안에 넣어 본 뒤에야 알 수 있다. 음식을 먹는 것이 행이며 곧 앎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만 하나의 앎을 말해도 이미 행함이 저절로 포함되어 있으며, 다만 하나의 행함을 말해도 이미 앎이 저절로 포함되어 있다. (『전습록』) (?) 

내가 일찍이 말한 지는 행위의 주된 의지[主義]이며, 행은 지의 공부이다. (『전습록』, 서애록, 5) 

임선생(사훈)은 나이가 79세다. 수천리를 걸어 월 땅까지 나를 보러 왔다. 나는 그의 늙고 가난함에 안타깝고, 그를 구제할 수 없음에 부끄럽다. 아아! 과거 왕도가 크게 행해졌을 때에는 밭을 나누고 녹봉을 정하여 사민에게 다 정해진 규격이 있었다. 장성한 이는 효제충신을 실천했고 늙은이는 비단 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으며, 길가에서 무거운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았다. 죽어 장사지내거나 이사할 때에 자기 고을을 벗어나지 않았고, 평소에 서로 짝하고 지냈으며, 아프면 서로 위무하고 부축해주었다. 폭삭 늙어서까지 길에서 먹고 입고 하는 경우가 어디있나! 주나라가 쇠하고 왕 된 이의 흔적도 소멸하면서부터 ‘항산’이 없는 백성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때는 그래도 성학이 여전히 밝았었기에 선비들이 비록 가난해도 외려 궁벽함을 꽉 지키고 버티는(고궁) 식의 절조가 있었고, 리려족당(다 평범한 사람 모여 사는 마을 읍 면 리 동 취락) 사람들은 서로 돌봐주는 의(義)를 알았다. 더 후세에 이르러서는 이익(혹은 공리)을 따지는 학설이 날로 흥해서 명덕과 친민같은 알맹이(實)를 다시 알지 못하였다. 선비들은 글을 교묘히 하고 말을 넓게 함으로써 지어내며, 서로 거짓을 권하고 서로 경쟁하며 이득을 좇으니 겉모습은 정중한 의관과 복식을 입었지만 속은 금수와 같다. 그러면서도 때로 스스로를 이르기를 성현의 학문에 종사한다고 말한다. 상황이 이럴 진데 삼대를 회복하려고 하니, 어렵도다! 내가 이러한 것을 걱정하여 지행합일의 설법을 내세워 치지격물 설법의 오류를 바로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삿된 설법을 종식시킴으로써 성현의 학을 밝히려고 하니, 거의 군자는 대도의 요점을 듣게 될 것이요, 소인은 지극한 치세의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헌데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이 모두 이것을 보고 실성했다고 욕하고 비웃고 화낸다. 나 또한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함도 모른 채 하루하루 위태로운 지경에 굴러 떨어진다.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죽어도 괜찮다.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내가 팽택을 경유할 당시 임씨의 곤궁함이 마음에 걸려서 읍령을 시켜 마을 학당의 선생님으로 초빙토록 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또 직장을 잃었다. 돌아가려 하는데 줄 돈은 없고 그저 이 글을 써준다. (왕양명집 권8, 잡저 서림사훈권)

= 오늘날 사람들은 밖으로 의관을 갖추고 있지만 안으로는 금수인데도 오히려 자신은 성현의 학문을 안다고 착각한다. 이러고도 삼대(三代)의 태평성세를 회복하려 하니 어렵지 않겠는가! 나는 이 점을 걱정하여 ( 지행합일 )을/를 내세워 치지격물(致知格物) 이론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니, 이는 인심(人心)을 바로잡고 헛된 주장을 없애서 성인의 학문을 다시 밝히려는 노력이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부모님의 따스함과 서늘함을 잘 보살펴 드리고 잘 봉양하려 한다면 이는 이른바 의意지 이를 성의誠意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따스함과 서늘함을 잘 보살피고 봉양하면서 자신의 실행함이 부끄러울 바가 없이 만족스럽게 인정되어야 이를 성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따스함과 서늘함을 제대로 보살펴 드리는 것이고, 어떻게 하여야 잘 보양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이른바 지知지, 이것을 치지致知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알고 있는 만큼 실제로 잘 봉양하여야 이를 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스함과 서늘함에 관한 일, 공양에 관한 일은 이른바 물物이고, 이를 격물格物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따스함과 서늘함에 관한 일에서 완전히 양지良知에 의해 장악한 것만큼 추호의 차이도 없어야 하며 봉양하는 일에서 완전히 양지에 의해 장악한 것만큼 추호의 차이도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야 격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스함과 서늘함에 관한 일을 제대로 하여야 따스함과 서늘함에 관한 양지에 도달할 수 있고 봉양에 관한 일을 제대로 하여야 봉양에 관한 양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는 “격물하여야 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스함과 서늘함에 관한 양지가 갖추어져야 따스함과 서늘함에 관한 의意가 정성精誠을 갖추게 되고, 봉양에 관한 의가 정성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학』은 또 “지가 갖춰져야 의에 정성이 갖춰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의, 치지, 격물 학설에 관한 저의 몇 가지 해석입니다. 선생께서 다시 깊이 사고해보시면 의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전습록, 답고동교서) 

내가 “여기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는 당연히 효도해야 하고 형에게는 공경해야 한다는 것 을 알면서도 효도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지와 행은 분명 별개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사욕에 의해 단절된 것이지 지행의 본체가 아니다.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 (중략) ... 『대학』에서는 참된 지와 행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고 악취를 싫어하듯 하라.’라고 한 것이다. 이 경우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것은 지에 속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것은 행에 속한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이미 저절로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 보고 난 뒤에 마음을 세워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 (중략) ... 어떤 사람이 ‘효도할 줄 안다’느니 어떤 사람이 ‘공경할 줄 안다’느니 하고 일컫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이 이미 효도와 공경을 행했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해 그렇게 일컫는 것이다. 설마하니 효도와 공경이라는 말을 뜻을 이해하는 것만을 가지고 ‘효도하고 공경할 줄 안다’고 일컬을 수야 있겠는가?" ... (중략) ... 이것이 지와 행의 본체이고 사의(私意)에 의해 단절되지 않은 것이다. (?) (from 김병찬)

지행(知行) 공부는 원래 단지 하나의 공부일 뿐이므로 무릇 지행에 대한 옛사람들의 말은 모두 하나의 공부에 치우친 것을 보충하고 폐단에서 구제하기 위해 한 것이었다. 따라서 요즘 사람들이 절연하게 두 가지 일로 나누어 추구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 (중략) ... 지행은 원래 두 용어로써 하나의 공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 근본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 지행을 둘로 나누어 말하더라도 결국은 하나의 공부로 보게 된다. (?) (from 김병찬)

한 문인이 “지행이 어떻게 합일적일 수 있겠습니까? 예컨대 『중용』에서 ‘널리 배운다.’라고 하고 또 ‘독실하게 행한다.’라고 한 것을 보면 지행이 둘인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자, 선생께서는 “널리 배운다는 것은 단지 일마다 이 천리를 보존한다는 뜻이고, 독실히 행한다는 것은 단지 배우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또 “『역』에서는 ‘배움으로써 모은다.’라고 하고 또 ‘인으로써 행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 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선생께서는 “이것도 마찬가지다. 일마다 이 천리를 보존하도록 배우면 더 이상 이 마음을 놓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배움으로써 모은다’라고 한 것이다. 이 천리를 보존하도록 배워서 더 이상 사욕에 의해 단절되지 않으면 이것은 바로 이 마음이 인을 끊임없이 발현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으로써 행한다’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다시 “공자께서 ‘앎은 거기에 이르렀지만 아직 인으로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지와 행은 여기서도 두 가지 일입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는 “이르렀다고 했으니 이미 행한 것이다. 단지 늘 행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사욕에 의해 끊김이 생기고, 그래서 그 사람의 인의 정도는 아직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from 김병찬)

 

  • 양지를 실현하는 데 사사로운 욕망이 방해가 된다고 보고, 사욕을 극복하여 순선한 마음을 유지[존천리거인욕]한다면 누구나 지선(至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 
성현이 베푼 가르침은 인욕(人慾)을 제거하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방법 아닌 것이 없다. 인욕이 없고 순수한 천리인 마음은 정성스럽게 효도하는 마음이다. (?)

 

4. 『대학』 삼강령 팔조목 해석

  • ‘격’을 ‘바로잡는다[正]’라는 뜻으로, ‘물’을 ‘뜻[意]이 있는 곳<의 일?>’으로 해석하여, 격물이란 사욕을 제거하여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없앰으로써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해석. (물을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내 마음의 의지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따라서 격물을 그 물, 즉 일을 바로잡는 것으로 해석한다. (천재))
  • 치지는 ‘치양지’, 즉 마음의 양지를 실현하라는 뜻으로 해석. ‘치지격물’은 내 마음의 양지를 사사물물에 실현하는[致] 것임. 
  • 바깥의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탐구하여 지극한 앎을 이루어야 한다[격물치지]는 성리학의 탐구 방법에 반대. 주희는 도덕 법칙의 내재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앎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격물치지를 설명하였는데, 왕수인은  주희가 해석한 격물은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눈 것이라고 비판. 
  • 격물·치지·성의·정심 을 각각 지(知) 공부와 행(行) 공부로 구분한 주희와는 달리 왕수인은 그것들이 모두 본질에 있어서 치양지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격물(格物)의 ‘격’은‘바로잡는다[正]’는 뜻이다. 격물은 그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없애 그 마음의 본체를 회복 하는 것이다. 즉, 의념[意]이 머무는 곳이라면 그 바르지 못함[惡]을 없애 그 바름[善]을 회복해야 한다. (?)

격물의 격은 바로잡는다는 정(正)의 의미이고, 물은 일이라는 사(事)의 의미이다. 내 마음의 뜻과 생각이 향하는 일이 물이고, 격물이란 그 일을 바로잡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을 당해서 그 일에 관한 자신의 바르지 않은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다. (『전습록』) (?)

격물(格物)의 ‘격’은 ‘바로잡음[正]’이다. 격물은 인간의 양지를 마음의 일[事]에서 발휘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루는 것이다. (?)

‘격’은 바로잡음[正]이다. 바르지 못한 부분을 바로잡아 바름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의(意)의 소재가 바로 물(物)이다. 예컨대 의가 부모를 섬기는 데 있으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고, 의가 임금을 섬기는 데 있으면 임금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고, 의가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끼는 데 있으면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끼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고, 의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으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다. (?) (from 김병찬)

『대학』에서 말하는 ‘치지격물’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양지를 각각의 사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 치지(致知)이고 각각의 사물이 모두 그 이치를 얻는 것이 격물(格物)이다. (『전습록』) (?) 

몸을 주재하는 것이 마음[心]이고, 마음이 드러난 것이 뜻[意]이다. 뜻이 본체가 곧 앎[知]이며, 뜻이 머무는 것이 곧 사물[物]이다. 만약 뜻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를 섬기는 것이 하나의 사물이니, 그것은 마음에 있다. (?)

마음의 본체는 성(性)이고, 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다. 생각이 일어나면서 바르지 않음이 생긴다. 생각이 머무는 곳이 물(物)이고, 바로잡는 것이 격(格)이다.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고 옳은 생각을 행해야 마음의 본체가 회복된다. (?)

무릇 정심(正心)․성의(誠意)․치지(致知)․격물(格物)은 모두 몸을 닦는 길이고, 그 가운데 격물은 그런 공부의 실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격물은 그 심(心)의 물(物)을 바로잡는 것이고, 그 의(意)의 물을 바로잡는 것이며, 그 지(知)의 물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정심은 그 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성의는 그 물의 의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며, 치지는 그 물의 지를 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찌 안팎, 이것저것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夫「正心」、「誠意」、「致知」、「挌物」,皆所以「修身」:而「格物」者,其所用力,日可見之地。故「格物」者,格其心之物也,格其意之物也,挌其知之物也:「正心」者,正其物之心也:「誠意」者,誠其物之意也:「致知」者,致其物之知也。此豈有內外彼此之分哉?)(『전습록』, 답나정암소재서) 

‘격물’에서의 ‘격’은『맹자』의 “대인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다(大人格君心).”의 '격’과 같다. 마음의 바르지 못한 부분을 제거하여 그 본체의 바름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의념의 소재인 일(物)에 대해 그 속의 바르지 못한 점을 주저 없이 없애서 온전히 바르도록 해야 한다. 즉, 언제 어느 곳에서든 옳지 않음이 없도록 해야 한다.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 바로 궁리이다. 천리가 바로 명덕이고, 궁리가 곧 명덕을 밝히는 일[明明德]이다. (?) (from 김병찬)

 

  • 주희의 격물 해석 비판
만약 ‘격물’을 ‘천하 만물 모두를 연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천하의 만물을 어떻게 다 연구한다는 말인가? 지금 초목에 대하여 연구했다고 해도 어떻게 나 자신을 진실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격’은 ‘바로 잡는다[正]’의 뜻으로, ‘물 ’은 ‘일[事]’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세상 사람들은 늘 격물에 대한 해석에서 주희의 학설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주희의 학설대로 실천한 사람이 있는가? 나는 이전에 주희의 학설을 실천한 적이 있다. 일찍이 나는 성이 전(錢)인 친구와 함께 성현이 되자면 천하의 모든 사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러한 큰 힘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함께 토론한 일이 있다. 나는 정자 앞의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그더러 대나무의 이치[理]를 탐구해보라고 했다. 그 친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대나무 옆에서 정신을 집중하며 대나무의 이치를 연구했는데, 사흘째 되던 날 그는 지쳐서 드러누웠다. 그때 나는 그 친구가 정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나무를 놓고 궁리해도 대나무의 이치를 알 수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서 나도 그 친구처럼 병이나 드러누웠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성현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성현처럼 큰 힘이 없어 사물을 탐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후에 나는 귀주의 용장에 3년간 있는 동안에 깊은 체험을 얻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천하의 사물에는 원래부터 격물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격물의 공부는 신(身)의 마음속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사람은 다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렇게 되자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도리를 여러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한다. (왕양명전서, 지행록1, 전습록상, 112)

 

삼강령 해석 (김병찬)

  • 명명덕: 명덕은 곧 양지이다. 따라서 명명덕은 사심물욕을 제거하여 양지의 밝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친민: 백성, 나아가 천하만물을 친애하는 것. 명명덕과 친민은 체와 용의 관계.
  • 지어지선: 명명덕과 친민의 지극한 원칙인 양지를 회복하여 오직 그에 따라서 처신하는 것.
성인(聖人)의 학문을 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의 사사로움과 욕망에 의한 가려짐을 없앰으로써 그의 밝은 덕(明德)을 스스로 밝히어 그가 천지의 만물과 한 몸이 되고 있는 본연(本然)을 되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본체(本體) 이외에 더 늘이고 보태어야만 할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 (from 김병찬)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은 천지만물이 한 몸이 되고 있는 체(體)를 세운 것이다. ‘백성을 친근히 한다(親民]’것은 천지만물이 한 몸이 되고 있는 용(用)을 통달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덕을 밝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백성을 친근히 하는 데’ 있게 되며, ‘백성을 친근히 하는 것’은 바로 ‘밝은 덕을 밝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 (from 김병찬)

공자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수양함으로써 백성을 편안케 한다.”라는 말의, ‘자기를 수양함’이란 바로 ‘밝은 덕을 밝힘(明明德)’을 뜻하며, ‘백성들을 편안케 함’이란 바로 친민(親民)을 뜻하는 것이다. 친민이라고 말하면 곧 교화와 양생의 뜻을 다 겸하는 게 되지만, ‘백성들 을 새롭게 한다(新民)’고 말하면 곧 한편으로 치우쳐짐을 느낄 것이다. (?) (from 김병찬)

내 마음의 본체는 인(仁)이며 이것은 삼라만상의 본질이기도 하기 때문에, 임금이 밝은 덕을 밝혀서 인(仁)을 드러낸다면 삼라만상의 본체도 스스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밝은 덕을 밝힌다는 것은 천지만물이 모두 일체라는 것을 수립하는 일이므로 친민 즉 백성과 친하다는 것이 되어야 천하가 모두 한 가족이 되어 만물이 일체가 되는 것이다. (?) (from 김병찬)

지선(至善)은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의 지극한 원칙인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성(性)이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것이다. 그 영묘하고 어두운 것 없이 밝은 것은 바로 이 지선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덕의 본체(本體)이며 또한 곧 양지(良知)라는 것이다. 지선이 드러난다는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가볍 고 무겁고 두텁고 엷은 것은 거기에 따라 그대로 감응하게 되어, 그대로만 있지 아니하고 변동하지만 역시 스스로 천연(天然)의 가운데 있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법도와 사물의 원칙의 극치여서, 그 사이에는 조금도 논란을 벌이고 더하거나 줄이는 일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논란을 벌이고 더하거나 줄일 것이 있다면, 곧 그것은 사사로운 뜻과 작은 지혜이지 지선을 말하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 (from 김병찬)

 

  • 성의: 충실하게 마음을 쏟아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생각(意)에 따라 실제로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誠) (= 양지의 지도에 따라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 (=치양지)
  • 정심: 의념의 악함을 제거하는 공부, 즉 사심물욕으로 인해 악에 빠진 마음을 바르게 하여 양지를 실현하고, 마음이 그것에 순응하여 활동하게 하는 공부. (정심 또한 그 본질은 치양지이다.)
초기에 만일 실제로 충실하게 마음을 쏟아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실제로 충실하게 마음을 쏟는 것이 바로 성의(誠意)이다. (?) (from 김병찬)

마음이 발동하면 불선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해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 이 바로 성의이다. 선을 좋아하는 생각이 하나 일어나면 정말 착실하게 선을 좋아해야 하고, 악을 미워하는 생각이 하나 일어나면 정말 착실하게 악을 미워해야 한다. (?) (from 김병찬)

일어난 생각이 선하면 그것을 좋아하는 정도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참되고, 일어난 생각이 악하면 그것을 싫어하는 정도가 마치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 참되면, 의(意)는 참되지 않음이 없게 되고 심(心)은 바르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 (?) (from 김병찬)

지금 양지에 의해 선이나 악으로 판단된 것에 대해 그것을 참으로 좋아하거나 참으로 싫어하지 않는 경우가 없게 된다면, 자신의 양지를 속이지 않게 되어서 의가 참되게 될 수 있다. (?) (from 김병찬)

마음이 없다면 몸도 없고, 몸이 없다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할 적에는 몸이라 하고, 그 몸을 주재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할 적에는 마음이라 하고, 마음이 발동하는 점을 가리킬 적에는 의(意)라 하고, 의가 영묘하고 밝은 점을 가리킬 적에는 앎이라 하고, 의와 관계되는 점을 가리킬 적에는 물(物)이라 한다. 그것 들은 오직 한 가지 것인 것이다. 의에는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란 없다. 반드시 물에 달라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의(誠意)하고자 한다면 곧 의가 있는 바로 그 일을 따라서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가 사람의 욕망을 버리고 천리로 돌아간다면 이 일에 관계 되어 있는 양지가 발휘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의 공부인 것이다. (?) (from 김병찬)

『대학』의 공부는 바로 명명덕인데, 명명덕은 단지 성의이며, 성의의 공부는 격물치지일 뿐이다. 성의를 중심에 두고 격물치지의 공부를 하면 공부는 손을 댈 수 있게 된다. 곧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뜻을 정성되이 함의 일인 것이다. 주자의 『대학』 신본(新本)처럼 먼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려 든다면 곧 아득하고 막연하여 전혀 종잡을 곳이 없게 될 것이니, 반드시 경(敬)이란 한 자를 더 보태야 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끌어올 수 있다. 그러나 끝내 경을 끌어들일 근거가 없는데, 만약 반드시 경 한 글자를 보태야 할 것 같으면 어찌하여 공자 문하에서는 가장 요긴한 그 글자를 빠뜨려 천여 년 뒤에 다른 사람이 나와 보충하도록 하였겠느냐? 나는 성의 를 위주로 한다면 곧 경이란 글자를 보탤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성의를 끌어 내어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학문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잘 살피지 않는다면 바로 조그만 출발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대체로 『중용』의 공부도 오직 자신을 진실되게 하는 것에 있는데, 이러한 성신(誠身)의 극치가 지선(至善)인 것이다. 『대학』의 공부는 오직 성의에 있는데, 성의가 극점에 다다르면 바로 지선이 되는 것이다. 공부는 모두 같은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경’자를 보충하고, 저곳에는 ‘성’ 자를 보충하여 설명하는 것은 뱀을 그림에 있어 다리를 붙이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달려 있다. 그런데 마음의 본체는 곧 성(性)이다. 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음의 본체는 본래 바르지 않음이 없다. 무엇을 좇아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를 하는가? 대저 마음의 본체는 본래 바르지 않음이 없으나, 그 의념(意念)이 발동한 뒤에 바르지 않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의념이 발한 것에 나아가 바로 잡아야 한다. 무릇 한 생각이 발동하여 선하다면 그것을 좋아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고, 한 생각이 발동하여 악하다면 그것을 싫어하기를 참으로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면 의념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어서 마음이 바르게 될 수 있다.  (?) (from 김병찬)

 

기타 주희 비판

  • 미발 공부와 이발 공부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공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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